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완주 위봉산성 (威鳳山城)

메탈 2008. 2. 23. 05:29

종    목 :  사적  제471호 
명    칭 : 완주위봉산성(完州威鳳山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1,659,342㎡ 
지 정 일 :  2006.04.06 
소 재 지 :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1-32 외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사유
관 리 자 : 완주군(완주군수)

 

 이 산성은 조선 숙종 원년(1675)에 쌓은 것으로, 1974년 9월 24일 전북기념물 제 17호로 지정되었으며, 둘레가 약 16km에 이르는 대단한 규모이다.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과 조경묘에 있던 태조의 초상화와 그의 조상을 상징하는 나무 패를 피난시키기 위해 이 성을 쌓았다. 실제 동학농민봉기로 전주가 함락 되었을 때 초상화와 나무 패를 이곳으로 가져 왔다. 성안에는 초상화와 위폐를 모실 소형 궁전을 두었으나 오래 전에 헐려 없어졌다. 성의 동, 서, 북쪽에 각각 문을 냈는데, 지금은 전주로 통하는 서쪽에 반월형 문 하나만이 남아있다. 성 안에는 위봉사와 전주 팔경의 하나인 위봉폭포가 자리하고 있다.
 

1974년 9월 24일 전라북도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었다. 1675년(숙종 1)에 축성하고, 1808년(순종 8)에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중수하였다.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것으로 동학농민운동 때 전주부성(全州府城)이 동학군에 의해 함락되자 태조의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 피난시킨 일이 있다. 당시의 규모는 너비 3m, 높이 4~5m, 길이 16㎞이며, 서·동·북 3개 소의 성문과 8개의 암문이 있었고, 성 안에는 4~5개의 우물과 9개의 못을 팠다. 지금은 성벽 일부와 전주로 통하는 서문만이 남아 있는데, 문 위에 있던 3칸의 문루(門樓)는 붕괴되어 없어지고 높이 3m, 너비 3m의 아치형 석문만 남아 있다.

 

 

위봉산성 입구다. 길건너 성곽이 잘 보존되어있고, 여장도 깔끔하게 보수되었다.

 

산 중턱으로 성곽이 이어진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서문의 홍예문.

 

선정비가 남아있다.

보통 선정비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에게, 재임기간중 백성을 잘 다스렸다고백성들이 고마와 하면서 그 이름과 업적을 새긴 비석이다.

 

서문 안쪽모습이다.

 

 

산중턱부터는 복구가 안되어있다.

 

 

산 정상부근도 성곽이 보존되어있다.

암문으로 산죽님 사진이다.

 

산 정상부분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있으나, 보호가 시급한 상황같다.

 

위봉산성내의 위봉사. 비구니 절이다.

위봉사는 604년(백제 무왕 5) 창건된 것인데 한국 불교사찰 31본산의 하나로서 경내에는 보광명전(普光明殿;보물 608) 등이 있다

 

 

 

위봉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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