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종 14년(1414) 충남 덕산에서 충청병마절도사영(忠淸兵馬節度使營)이 해미로 옮겨진 후 1651년 청주로 옮겨갈 때까지 해미는 군사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 성은 성종 22년(1491)에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지승람에 의하면 절도사영은 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있었으며 석성으로 둘레 3,172척, 높이 15척, 우물이 세 곳, 군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다.
한편 읍지에 기록된 바로는 읍성의 둘레가 6,630척이며 성벽 높이는 13척, 치성이 380첩, 옹성이 두곳, 초루, 포루는 없고, 남문은 세 칸에 홍예를 틀었고, 2층 다락을 지었다. 동서문도 각 세칸이나 북문은 없다. 성내에는 천정이 여섯이고, 성밖의 호지는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본다면 조선 초기의 병마절도사와 읍성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충청남도 서산시(瑞山市) 해미면(海美面) 읍내리(邑內里)에 있는 조선시대 석축 읍성. 둘레 2000m, 면적 6만 4463㎡. 1414년(태종 14)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설치되어 1651년(효종 2) 청주(淸州)로 옮길 때까지 군사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현재 성내에 동헌(東軒)·어사(御舍)·교련청(敎鍊廳)·작청(作廳)·사령청(使令廳) 등의 건물이 있고, 감옥은 터만 남아 있다. 감옥터 앞의 오래된 호야나무 가지에는 천주교 박해 때 천주교인을 묶어 두었던 철사줄이 남아 있다. 동·서·남문이 남아 있으며, 남문에는 진남문(鎭南門)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성책에는 총안(銃眼) 380개소, 수상각(水上閣) 1개소, 망루(望樓) 1개소 등이 복원되어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읍성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이다. 사적 제116호.
입구다. 해미읍성 소개할때 늘 나오는 남문사진이다. 진남문이라 써있다.
남문과 치성.
본래의 규모는 동 ·서 ·남의 3문이 있었고, 옹성(甕城)이 2개소, 객사(客舍) 2동, 포루(砲樓) 2동, 동헌(東軒) 1동, 총안(銃眼) 380개소, 수상각(水上閣) 1개소, 신당원(神堂院) 1개소 등 매우 큰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복원된 것은 3문과 객사 2동, 동헌 1동, 망루 1개소뿐이다.
남문으로 올라가 한바퀴 돌아본다.
뒤로 남문모습이다.
원래 해미읍성은 사람이 살고있지 않은 읍성이다. 그래서 텅빈 공간인데 관헌과 민가를 복원해놨다.
동문 삼양루다.
삼양루를 안에서 본모습과 밖에서 본 모습.
북으로 성벽이 이어진다.
밖에서 본 모습.
북쪽에는 해자[垓字] 가 설치되어 있다.
전투시에 망루역할을 하던 청허정.
빙 돌아 암문이다.
밖에서본 암문.
암문에서 서문까지의 밖의모습이다.
암문을 지나자 서문까지 내리막이다.
뒤돌아 본모습.
서문 지성루이다.
서문의 안과 밖.
서문에서 다시 남문까지는 치성에 누각이 2개 서있다.
텅빈 읍성내부이다.
관헌이 보이고...
누각 2개를 지나니 더시 남문이다.
안에서 본 진남문.
천주교 박해를 했던 옥사다.약 1,000명이 죽었단다.
관헌으로 가본다.
이순신장군도 여기서 10개월 근무 했다지...
해미읍성 관아의 외삼문으로,2층 문루에 올라서면 바다가보여 읍해루라 불린다.
여기는 집무하던곳.동헌(東軒)이다.
사잇문을 지나가자, 관리와 가족들이생활하던곳 내아(內衙:살림집)가 나온다.
민가도 몇채 복원해 같다놓았다.
다시 남문으로 돌아오니 약 한시간남짓의 해미읍성 일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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