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강화의 보(堡)와 진(鎭)

메탈 2008. 2. 24. 11:31

 

 강화 5진 7보

● 강화도의 해안선을 따라 53 곳에 있는 강화53돈대를 관할하는 진과 보.

● 진과 보는 모두 조선시대의 군대를 뜻하는 것으로
진은 요즘 군대의 대대,
보는 요즘 군대의 중대 규모에 해당된다.
그러나, 진과 보 사이에는 상하 관계가 없다.
그리고 진, 보 아래에는 돈대가 소속되어 있다.

 

강화 5진

● 월곶진 : 강화5진의 하나. 강화읍 월곶리.

● 제물진 : 강화5진의 하나. 강화읍 갑곶리.

● 용진진 : 강화5진의 하나. 선원면 연리. 향토유적 제8호.

● 덕진진 : 강화5진의 하나. 불은면 덕성리. 사적 제226호.

● 초지진 : 강화5진의 하나. 길상면 초지리. 사적 제225호.

 

강화 7보

● 광성보 :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7보의 하나. 사적 제227호.

● 선두보 : 강화7보의 하나. 길상면 선두리.

● 장곶보 : 강화7보의 하나. 화도면 장화리.

● 정포보 : 강화7보의 하나. 내가면 외포리.

● 인화보 : 강화7보의 하나. 양사면 인화리.

 

용진진(龍津鎭)

이 진은 조선 효종 7년 (1656)에 축조된 진이다.
용진진은 본래 병마만호의 관리하에 있었고 군관 24명, 사병 59명, 진군 18명 도합 101명의 병력이 주둔하였으며 포좌 4문, 총좌 26개소의 시설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진에서는 가리산돈대, 좌강돈대 등 3개돈대를 관리하였다.
석축 대부분이 없어지고 홍예 2문만이 남아 있었던것을 1999년 강화 문화권 정비계획에 의거 문루를 복원하였다. 좍측홍예의 높이는 2.57m, 폭은 4.15m, 두께는 60-61cm, 우측 홍예의 높이는 2.14m, 폭은 4.80m, 두께는 50-60cm의 규모이며 석재는 대리석이다

 

 

밖에서본 용진진모습이다.

 

문루와 이어져있어 올라본다.

 

돈대에있는 포구다.

 

 

용진진 내부모습.

 

 

 

이 문으로 대포나 화물을 날랐던 모양이다.

 

오두(鰲頭)돈대

이 돈대는 조선 숙종 5년 (1679)에 유수 윤이재가 해안방어를 튼튼히 하고자 축조한 돈대이다.형태는 원형이고 지름이 32m다.

돈대 전경이다.

 

돈대입구.

 

입구에서 포대가 보인다.

 

돈대내부.

 

 

배수구같다. 안의모습과 밖의모습이다.

 

 

밖에서 바라본 포대다.

 

광성보(廣城堡)

인천광역시 강화군(江華郡)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12진보(鎭堡) 중의 하나.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留守)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였는데, 1679년에 축조된 오두(鰲頭)·화도(花島)·광성 등의 돈대(墩臺)와 1874년에 축조된 오두정포대를 관할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로, 미국함대가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자 광성·초지(草芝)·덕진(德津)·덕포(德浦) 포대에서 물리쳤으나, 미군이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과 병사들은 분전하였으나 몇 명을 제외하고 전원 순직하였다. 이때 성첩(城堞)과 문루(門樓)가 파괴된 것을 1976년 복원하였으며, 당시 전사한 병사들의 무덤과 어재연의 쌍충비각(雙忠碑閣)을 보수·정비하였다. 사적 제227호.

 

신미양요때 우리군인이 350명이 죽었는데, 미군은 3명 죽었다.

이런 일방적 전투원인은 근대화한 무기를 가지고있느냐의 차이인것 같다.

 

광성돈대속에 화포가 보인다.

홍이포(紅夷砲)라고하는데,사정거리 700m로, 자체폭발하지않아 위력이 약하다.

이런걸로 미군과 싸웠으니... 

 

당시사용하던 포를 갖춰놓았다.

 

 

광성보 안해루.

 

밖에서본 안해루와 광성돈대.

 

손돌목 돈대와 용두돈대 가는길.

 

손돌목 돈대다.

숙종5년(1769)년에 축조된 돈대로 길이 108m이며. 고종 8년(1871)년 신미양요때 미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일어난 곳이다.

 

 

 

광성포대. 길이 약 80m다.

 

용두돈대서 바라본 광성포대.

 

용두돈대 가는길.

 

용두돈대는 강화해협쪽으로 쑥 나와있다.

 

 

 

 

용두돈대 밖으론 세찬 물살이 흐른다.

소리만 들어봐도 겁이난다.

 

덕진진(德津鎭)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 현재 문루(門樓)·포대(砲臺)와 성곽·돈대(墩臺)가 남아 있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의 방비책을 강구하여 내성·외성·진보·돈대 등을 축조하였는데, 12진보는 그 중의 하나로서 강화도 주위에 설치되었다. 덕진진은 1679년 축조된 용두(龍頭)·덕진 등 2개 돈대와, 1874년(고종 11) 축조된 남장(南障)·덕진 등 2개 포대를 관할하는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부대가 이 진을 통하여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퇴하였고, 71년 신미양요 때는 치열한 포격전 끝에 미국함대를 격퇴시켰으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해 점령당하였다. 이때 성첩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지(門樓址)만 남게 되었다. 1976년 홍예(虹霓)를 틀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를 다시 세웠다. 사적 제226호.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

돈대와 포대는 숙종5년(1697)에 설치하였다.

 

 

남장포대.

대포만 컸지 위력이 약한 홍이포(紅夷砲)다.

 

 

 

덕진돈대다. 원형의 다른돈대와 달리 사각형이다.

 

 

 

물림쌓기방식으로 경사가있다.

 

밖에서 본 포구.

 

 

경고비

고종4년(1876) 흥선대원군이 세운것으로,외국선박 출입을 통제하겠다는 척화비다.

 

초지진(草芝鎭)

강화도(江華島) 방어를 위해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초지리(草芝里)에 설치한 진.

《여지도서(輿地圖書)》 《강화부지(江華府志)》 등에, 1716년(숙종 42) 설치된 것으로 전한다. 1726년(영조 2)에 진장(鎭將)으로 종4품 무관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배치하였다. 1763년(영조 39)에는 종3품 첨사를 두고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 목자 210명, 진선(鎭船) 3척, 포대 9문 등을 배치하였다. 또한 초지돈·장자평돈·섬암돈이 이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진은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전적지로, 1871년(고종 8) 미국해병 450명이 이곳에 상륙하였을 때 필사의 격전을 벌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 미군에 점령당하였고 1875년(고종 12)에는 일본군함 운요호[雲揚號(운양호)]와 교전이 벌어져 일본 함포공격으로 파괴되었다.
모두 허물어지고 돈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다가 1973년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이 돈은 높이 4m, 장축 약 100m의 타원형으로 3개의 포좌(砲座)와 100여 개의 총좌(銃座)가 있고 포각(砲閣) 안에 대포 1문을 전시하였다. 사적 제225호.

 

당시 대포자국이란다.

 

 

 

초지진 입구다.

 

 

 

 

초지진에서 건너다보이는 초지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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