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10호
명 칭 : 서울성곽(서울城郭)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467,922.6㎡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외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서울특별시
조선 태조 5년(1396)
1392년 개성 수창궁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지 한 달도 못되어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명하였다.
경복궁, 종묘, 사직단, 건립이 완성된 다음 달인 윤9월, 태조는 곧바로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함과 동시에 정도전에게 도성 축조 기본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이때에도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의견이 엇갈려 인왕산 선바위를 서울 성곽 안으로 할 것인가, 바깥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격렬히 대립하였다. 《조선불교통사》에 전해지는 일화에 의하면 양쪽의 주장이 너무 강하여 태조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어느날 큰 눈이 내렸다. 이튿날 아침 한양의 안쪽은 눈이 녹은 반면에 바깥쪽은 여전히 녹지 않고 하얗게 쌓여있는 것을 보고, 그 눈 녹은 선을 따라 성곽의 선을 그었다고 한다. 그 때 인왕산 선바위는 눈이 그대로 남아있어 서울 성곽 바깥쪽으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결정된 서울 성곽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59,500척(약 18.2km)이었다. 서울 성곽은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축조하기로 계획되었는데,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만 하기로 하고,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시행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396년 1, 2월 49일 동안에 걸친 1차 공사에는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등에서 11만 8천명을 동원하였다. 이 때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는 전 해에 궁궐공사 때 차출되었기 때문에 면제시켰고,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도 국방상의 임무를 고려하여 동원하지 않았다.
그 후 27년이 지난 세종 4년(1422), 세종은 서울 성곽에 대한 전면적인 보수 정비 작업을 시행하였다. 이 공사는 결과적으로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사업이었으며, 1,2월 농한기 38일 동안 전국에서 약 32만 명의 인부와 2천2백 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약 1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공사였고, 사망자만 872명에 달했다. 이것이 지금 서울 성곽의 기본 골격이다.
이후 서울 성곽을 재정비했던 숙종 30년(1704)까지 260년 동안 성곽은 부분적으로 보수했을 뿐 크게 붕괴된 곳은 없었다. 원래 서울 도성은 도성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았지만 정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구실을 하지 못했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전란으로 인한 큰 피해는 없었다.
이후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부설하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의 성곽 일부가 헐려 나갔고, 이듬해에는 용산과 종로 사이 전차를 부설하기 위해 남대문 부근을 철거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서대문과 혜화문(동소문)이 헐려 사실상 서울의 평지 성곽은 모두 철거되어 오늘날에는 총 길이 18.2km 중 산지성곽 10.5km만 남게 되었다.
2006년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는 서울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서울 성곽을 가능한 한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그 정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서울성곽에는 4大門과 4小門이 있는데
▣ 4大門은
-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종로구 종로6가 69),
-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중구 남대문로4가 29),
-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종로구 신문로2가 강원산업 건너 보도 강북삼성부근 - 현재 멸실됨)
- 북쪽에 숙정문(肅靖門, 肅淸門, 종로구 삼청동 , 76년 門樓復元)이 있고
▣ 4小門에는
- 동북쪽에 혜화문(惠化門, 弘化門, 東小門-종로구 혜화동 34
(혜화동로타리에서 삼선교로 가는 종로 성북구 경계), 94년 門樓復元),
- 남동쪽에 광희문(光熙門-중구 광희동2가 105-24, 75년 門樓復元)
(지하철 2호선 동대문운동장역 3번출구 20m),
- 서남쪽에 소의문(昭義門, 昭德門, 西小門-중구 서소문동 589)
(中央日報社 정원길 마루턱 언덕, 멸실됨),
- 서북쪽에 창의문(彰義門, 紫霞門-종로구 부암동)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 3번출구 50m전방 버스이용 경복고 다음에 하차)
풍수지리에 입각한 서울 즉 한성은 음양오행에 따라 만들어 졌습니다.
그래서 그 성의 각 대문에는 인(흥인지문), 의(돈의문), 예(숭례문), 지(숙정문, 숙청문), 신(보신각)을 두었다.
먼저 낙산(125m)
홍인지문(동대문)에서 혜화문까지...
참고로 서울성곽 성벽의 시대별 차이이다.
흥인지문 (동대문) 밖의 모습
안쪽 모습이고..
길건너 바로 성벽이 시작되는데, 당시 기술자의 이름이 각인되어있다.
이대부속병원을 끼고 길게 나 있다.
바깥쪽 모습으로 성벽과 거리감이있어, 별로 추천하고싶지 않다.
시대별로 복원한 모습이다. 왼쪽이 숙종시절, 오른쪽이 세종시절이다.
암문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본다.
안쪽으론 성벽을 따라 걸을수 있게 되어있다.
이길로 올라가본다.
주택가를 끼고 성벽이 따라올라간다.
성벽의 안과 밖의모습이 잘도 나타나있다.
정상부근에오니 암문이 있어 밖으로 나가본다.
암문 바깥모습이다.
시대별로 돌이 제각각이다.
지저분해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오랜세월과 역사를 함께 느낄수가 있다.
달동네와 함께하는 성벽.
다시 안으로 들어왔는데, 밖과는 비교도 할수없을정도로 깔끔하다.
저 뒤의 북한산이 멋지네...
혜화동방면으로 길게 성벽이 뻗어간다.
내려오며 뒤돌아 봤다.
사유지라 더이상 가지못하고, 계단으로 내려섰는데, 거기가 바로 대학로다.
대학로에서 한성대지하철역으로 오니 성벽이 보인다.
이 성벽이 바로혜화문으로 이어진다.
혜화문.
혜화문벽이 어디까지 이어져있나 따라가 보았다.
약 100여미터를 가니 빌라 담장으로 끝나고 말았다.
오늘은 사대문중 하나인 흥인지문(동대문)으로 시작해, 사소문중 하나인 혜화문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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