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남한산성 (南漢山城) 외곽한바퀴 : 남문 - 동문

오솔 길 2010. 5. 12. 11:58

종    목 : 사적  제57호 
명    칭 : 남한산성(南漢山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528459.47㎡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광주시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광해군 13년(1621)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키 시작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 2년)이다. 인조는 총융사 이서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 옹성 3개, 성량 115개, 문 4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벽암 각성대사를 도총섭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 문화재청

 

남한산성은 여러번 왔으나 외곽을 한바퀴 돌아본적이 없다.

이번엔 산성을 바깥쪽으로 한바퀴 돌아본다. 먼저 남문이다. 

 

 

조선시대의 남한산성 지도다.

먼저 1800년대에 만들어진 광여도에 나타난 남한산성.

 

1872년도 지방도의 남한산성.

 

제작연대를 알수없는 여지도의 남한산성.

 

1700년대 영조때 제작된 해동지도의 남한산성.

 

병지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 호위대장 구굉은 남성, 도감대장 신경진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 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외침에 의하여 정복당한 적이 없는 성이다.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 문화재청.

 

그리고 다른 고지도에 나타난 남한산성의 모습으로 스케일, 위치등이  비교적 다른것에비해 상세했다.

 

이것도 외성,옹성등이 아주 상세했고...

 

그리고 현재의 남한산성 안내도.

 

서울에서 동남쪽 24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져 있는 남한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9.05km, 높이는 7.3m이다. 2천여 년 전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온조 때 쌓은 토성이 있으나, 이를 신라 문무왕 때 다시 쌓아 '주장성'을 만들고, 그 옛터를 활용하여 후대에도 여러 번 고쳐 쌓다가, 조선 광해군(1621년) 때 본격적으로 축성했다고 한다.
광해군 당시에는 9개의 절과 성문, 망루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장경사와 서장대만이 남아있다. 등산을 겸한 관광은 봄, 가을에는 성남시를 거치는 남문길이 좋고,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을 끼고 있는 동문길이 좋다. - 문화재청

 

남문에서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본다.

 

 

 

 

 

치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 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성곽 시설물 중의 하나이다.
치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지는데 산성의 경우에는 지형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굴곡을 이루게 되어 별도의 치가 필요 없는 경우가 많다.

남한산성의 경우에도 치가 거의 필요 없을 정도로 성벽의 굴곡이 심하여 암문도 성벽의 능선을 따라 회절 하는 곳에 인접하여 설치하고 있다. - 문화재청

 

남쪽성곽은 상태가 좋았다.

 

 

남한산성의 경우에도 치가 거의 필요 없을 정도로 성벽의 굴곡이 심하여 암문도 성벽의 능선을 따라 회절 하는 곳에 인접하여 설치하고 있다.
원성의 경우 남옹성1과 남옹성3, 연주봉 옹성 부분에는 폭 12m, 길이 3m 하단부의 폭이 3m 정도 되도록 돌출 시켜 치를 구축하였다.
축성기법을 보면 체성벽을 쌓으면서 동시에 축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치의 바깥쪽에는 옹성이 돌아가고 있어 이 치의 존재는 보통 간과되고 있다. 비교적 다른 옹성 축조시 에는 연주봉 옹성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치만 설치되었다. - 문화재청.

 

굴곡으로 인하여생긴 자연스런 치의 모습이다.

 

제1 옹성 치의 모습.

 

 

제2 남옹성으로 이어진다.

 

이부근이 남한산성중 높이가 가장 높은것 같다. 여장까지 포함하면 7-8m는 되어보인다.

 

제1 옹성 암문으로 제 7 암문이다.

 

 

바위에 당시의 이니셜이다.

 

복원과 보수로 인하여 이질감이 나는곳도 있지만, 어찌 완벽할수 있으랴...

 

잘 정비된 구간이다.

 

 

제2 옹성의 치성이다.

 

제2 옹성암문. 8암문이다.

 

재미있는것은 본성과 치성의 쌓기방식이나 성곽돌의 상태가 전혀 다르다.

 

 

치성은 막돌쌓기 수준이다.

 

치성앞에있는 제2 남옹성. 홍예문도 보인다.

그리고 산위에보이는 시설물이 군부대가있는 신남대의 돈대다.

 

하늘에서 본 치성과 제2 남옹성 모습.

 

 

본성과 치성의 성곽이 잘 비교된다.

 

다시 3옹성으로...

 

짜깁기한 모습이 흉하긴 하다.

 

여길 돌아서자 암문이다.

 

제 9암문. 암문에서 급경사구간은 계단식 여장이다.

 

 

제3 옹성의 치.

 

 

치앞의 제3 남옹성.

 

이곳은 본성과 쌓기방식이나 성곽돌이 같은 모양이었다.

 

 

다시 성곽을 따라간다.

아주 깨끗한 구간이다.

 

 

경사구간은 계단식 여장으로 이어지고...

 

남한산성은 현재 남아 있는 암문이 모두 16개로서 우리나라의 성 중에서 암문이 가장 많은 성에 속한다. 그중 원성에 11개가 있고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있다. 원성에 있는 11개의 암문은 남쪽에 4개, 동쪽에 2개, 북쪽에 3개, 서쪽에 1개가 분포되어 있다.
암문의 구조는 대체로 평거식과 홍예식으로 구분되는데 남한산성의 암문은 16개의 암문중 6개는 평거식이며, 나머지 10개는 홍예식이다. 평거식 중 3개는 봉암성에 설치되고 1개는 한봉성에 설치되었으며, 원성에 설치된 암문은 장경사옹성 으로 나가는 곳에 설치된 2암문과, 수어장대 서남쪽에 있는 제6암문의 2개만 평거식이고 나머지는 홍예식이다.
암문의 규모는 기능과 위치에 따라 크기가 매우 달랐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산성 동쪽 수구문 남쪽 20m 지점에 있는 11암문으로 암문의 폭은 286cm이고 높이는 307cm에 달하여 성문에 가까울 정도의 크기이다. 반면 가장 작은 암문은 수어장대 남서쪽의 6암문으로 푹은 77cm이고 높이는 155cm에 불과해 성인 1명이 지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 문화재청.

 

또하나의 암문. 제 10 암문이다.

 

 

 

새로 복구한 여장에는 미석의 흔적이 뚜렸하다.

 

작년에는 무녀져있었는데 성곽과 미석 여장까지 깨꿋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옛모습이 남은구간이다.

 

 

무너져있어서 오히려 옛스러움이...

 

 

여장은 무너져있고 돌도 듬성듬성 빠져있다.

 

여기부터 새로 복원한 곳이고....

 

아쉽게도 여기부터 바깥쪽은 잡목이라 진행이 안된다.

 

안쪽으로 들어왔다. 여장만이 보인다.

 

 

급경사구간.

 

동문이 보이고...

 

이밑이 시구문이다.

 

남한산성 암문중 가장 크다고하는 시구문 제 11암문이다.

 

길건너 동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