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Zone이다.
핫셉수트 여왕의 신전
Deir el-bahar Temple of Hatshepsut
위치 : 이집트 테베의 서쪽 다이르 알 바흐리
건축기간 : BC 1500년경
건축배경 : 핫셉수트 여왕의 치적 유물
건축시기 : 이집트 고대 제 18왕조
핫셉수트 여왕은 이집트 왕조에서 보기 드문 여왕으로 제 18왕조의 5대왕이다. 그녀는 투트모세 1세의 장녀로, 이복남매인 투트모세 2세의 왕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서출의 조카 투트모세 3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카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여왕은 정통왕위 계승권을 주장, 22년간 공동통치를 하였다.
핫셉수트는 어린 투트모세 3세를 대신해서 섭정을 하다가 결국은 그녀 스스로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오직 내정에만 전념하였던 그녀는 시나이 광산의 채굴과 교역을 위하여 푼트 원정을 감행하는등 여걸다운 면모를 보였다. 이 시기에 핫셉수트 여왕의 신전이 그녀의 총애를 받는 신하이며 건축가인 센무트의 설계에 의해 이집트의 고도(古都) 테베의 서쪽 다이르 알바흐리에 건축되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을 뒤로하고 서 있는 핫셉수트 여왕의 신전은 거대한 3층의 테라스식 신전으로 가장 독창적이고 웅장한 신전이다. 이 곳의 벽화에는 그녀의 통치기간 중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신전은 투트모세 3세에 의해 많이 훼손되었다. 투트모세 3세에 의해 많이 훼손된 데에는 그 이유가 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The Great Pyramid of Cheops, Khufu
위치 : 이집트 기제
건축기간 : BC 2550년경
건축배경 : 이집트 왕족의 무덤
건축시기 : 이집트 고대 제 4왕조
세계 7대 불가사의중의 하나인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의 국왕과 왕비 등 왕족의 무덤이었다.
현재 약 80여개의 피라미드가 남아 있는 가운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쿠푸왕의 피라미드’이다. 가장 거대한 이 피라미드를 가리켜 ‘대 피라미드’ 또는 ‘제1 피라미드’라고도 부른다.
쿠푸왕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남서쪽 15km에 위치한 기제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높이만 146.5m(현재 137 m)이고, 밑변도 230m에 이른다. 평균 2.5t의 돌을 무려 230만개나 쌓아올렸다. 이러한 대 건설 사업에는 최소한 10만명의 노예가 석 달씩 교대로 해서 10년이 걸렸고, 돌을 높게 쌓아 올리는데도 20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
쿠푸왕 피라미드는 도굴방지를 위해 입구를 돌로 막아서 오랫동안 내부의 구조를 알 수 없었는데 818년 이집트의 회교왕 알 마문이 피라미드에서 자고 있다고 하는 쿠푸왕의 막대한 보물을 찾아 북쪽 사면밑을 파 내려갔을 때 안의 통로를 찾아 드디어 왕의 현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현실에 있는 석관은 텅 비어 있어 보물은 커녕, 아무리 찾아도 왕의 미이라 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설사 도굴을 당했다 해도 도굴범이 유해까지 훔쳐가는 경우란 있을 수 없었기에 아직까지도 대 피라미드는 수수께끼의 건조물로 남아 있다.
아부심벨 대신전
Great Temple of Abu Simbel
위치 : 이집트 나세르 호수 서쪽 연안
건축기간 : BC 1,300년경
건축배경 : 왕권의 람세스 2세의 왕권 과시 목적
건축시기 : 이집트 제 19왕조 람세스2세
아부심벨 대신전은 이집트 아스완에서 남쪽으로 280km 떨어진 나세르 호수의 서쪽 연안에 있다. 이 곳은 수단과의 국경에서 20km 떨어진 지점이다. 이집트 제 19왕조의 람세스 2세에 의해 기원전 1300년경에 세워졌다. 사암으로 된 절벽을 뚫어서 건립했는데 높이가 33m이고, 너비는 38m이다. 정면에는 높이 22m의 거대한 람세스 2세 상 4개가 나일강을 굽어보는 입구를 지키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곧 대열주실이다. 이 신전은 왕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신전은 정면 높이 32m, 너비 38m, 안쪽 길이 63m이며 방 네 칸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 1실에는 오시리스신을 본떠 만든 람세스 2세의 상과 전쟁 그림 등이 있고, 제 2실과 3실에는 종교 의식을 그린 벽화가 있으며, 제 4실에는 신격화한 람세스 자신과 세 수호신의 상이 있다.
페즈 메디나
Medina of Fez
위치 : 모로코의 북쪽 지역
건축기간 : 789년이후 현재까지
건축배경 : 이드리스 1세가 건설한 도시
건축시기 : 789년이후 현재까지
메디나(Medina)는 ‘도시’란 뜻으로, 모로코가 프랑스에 의해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도시적인 삶의 중심지를 의미했다. 마치 미로와 같이 복잡한 골목길과 노천 시장들, 그리고 공동체의 공간들로 구성된 메디나에는 모로코 특유의 독특한 냄새가 배어 있다.
모로코의 메디나 가운데서, 현재 약 백만 명의 주민들이 살고있는 페즈 메디나는 역사적인 가치가 풍부한 종교와 문화, 예술, 그리고 상업의 중심지다. 뛰어난 건축적 면모와 함께, 모로코에서 가장 경이로운 메디나로 알려진 이곳은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중세 도시를 대표하며 스페인-아랍 문명의 진수를 이루고 있다.
중세의 고혹적이고 독특한 도시 구조를 거의 변형 없이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페즈는 그 도시 전제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킬리만자로
Mt. Kilimanjaro
위치 : 아프리카의 탄자니아
킬리만자로(5,895m)는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부근에 위치한 아프리카의 최고봉이자 세계 최고의 화산이기도 하다. 스와힐리어로 ‘빛나는 산’ 혹은 ‘하얀 산’이란 뜻의 킬리만자로는 적도 부근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문자 그대로 정상이 항상 만년설로 덮여있다. 1848년 독일인 선교사 레프만(J. Rebman)과 크라프(L. Krap)가 이 산의 모양을 알아냈다고 하는데, 그 이후 1889년 역시 독일인인 지리학자 한스 마이어(H. Mayer)가 최초로 키보(Kibo)봉 등정에 성공했다.
킬리만자로의 중심부에는 키보봉 외에 마웬지봉(Mawenzi), 시라봉(Shira) 등 3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시라봉은 격렬한 화산 폭발로 정상이 내려앉았고 이후의 침식 작용으로 더욱 깎여져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로 오래된 마웬지봉의 정상 역시 침식 작용이 심해 깎아지른 벼랑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여러 차례의 화산 폭발로 가장 늦게 형성된 키로봉의 정상은 칼데라로서 가운데가 움푹 파인 분지 모양을 하고 있다. 직경이 2km에 달하는 이 칼데라에서 폭발이 계속해서 일어나 제 2의 화산추가 형성됐는데, 그 분화구의 폭이 약 900m이다. 또다시 이 분화구 속에 제 3의 폭발로 생겨난 화산재 언덕이 있다.
페트라
Petra
위치 :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서남쪽
건축기간 :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후 106년까지
건축배경 : 유목민 나바테안이 만든 도시
건축시기 : BC 6세기 경
영국의 시인 딘 버존(Dean Burgeon)이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붉은 도시’라고 예찬한 페트라는, 실제로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고대의 신비로운 도시이다. 페트라는 나바테안(Nabataeran)이라 불리는 고대 유목민족이 서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해와 기원전 6세기에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사막 한가운데서 암석 지대를 발견한 이들이 그곳에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이 도시를 원래 나바테안들은 ‘렉무(Rek Mu)'라 불렀는데, 그들이 역사에서 사라진 이후 그리스인들이 ‘페트라'라고 그리스어로 고쳐 불렀지만, ‘렉무’ 역시 ‘페트라’처럼 요르단말로 ‘바위’란 의미를 갖고 있다.
106년 페트라는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당하고,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여전히 번성을 누렸다. 실크로드의 길목이란 지리상의 위치로 인해 수많은 대상들이 여행 중에 이곳을 거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로마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중심지를 옮기면서 세계의 동과 서를 이었던 실크로드의 축을 페트라에서 북쪽의 다마스쿠스로 변경시키게 된다. 자연스럽게 이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그후 여러 세기 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던 중, 1812년 요한 루드비히 부르크하르트(Johann Ludwig Burckhardt)라는 스위스의 한 젊은 탐험가에 의해 오랫동안 잊혀졌던 신비의 도시가 다시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성서고고학 연구소인 도미니칸 수도사의 발굴을 시작으로(1896년 최초로 보고서 출간됨), 무덤과 건물, 성 입구의 문과 로마식 극장 등 페트라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성소피아 사원
Hagia Sophia
위치 : 터키의 이스탄불
건축기간 : 서기 532-536
건축배경 : 그리스도 정교회 성전 건축
건축시기 :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안 황제
‘하나님의 지혜’란 뜻의 성 소피아 사원은 사실 4세기에 이미 그리스도교를 최초로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Konstantinos) 황제와 그 후계자였던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에 의해 두 번이나 건설되었지만 두 번 모두 반란에 의해 파손되었다. 그것을 유스티니아누스(Iustinianus) 황제가 새로운 설계에 근거하여 애초의 사원보다 큰 규모로 재건한 것이 오늘날 남아있는 성 소피아 사원이다.
수학자이자 건축가였던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루스가 설계를 맡아 로마와 아테네 같은 고대 도시들로부터 가져온 기둥과 대리석, 그리고 화려한 돌들을 건축에 사용했다. 약 100여명의 감독관 아래 1만 여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당시로선 꽤 단기간인 5년 10개월만에 완성되었다. 537년 12월에 거행된 헌당식에서 건물의 웅장함에 감동한 황제가 “오!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를 이겼도다”라고 외치며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이맘모스크
Imam Mosque
위치 : 이란의 옛 수도 에스파한(Esfahan)
건축기간 : 1611년-1629년
건축배경 : 왕권 강화
건축시기 : 사파비드(Safavid) 왕조시대
이맘 사원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낙쉐자한 광장(Naqshe Jahan, 현재는 이맘 광장으로 불림) 남쪽에 세워진 이란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예전엔 ‘왕의 사원'이라고 불려졌다 하는데, 카바(Kaba), 즉 메카(Mecca)를 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정교하고 화려한 타일 모자이크와, 다양한 모티프, 아름답고 이국적인 글씨 문양 등의 장식과 함께 완벽한 색상의 사용으로 유명하다. 건물의 웅장한 정문을 42m 높이의 터키식 첨탑이 양쪽에서 보좌하고 있다. 입구의 천장은 이란 특유의 아름다운 종유석들로 장식돼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모스크의 문들은 금과 은의 층으로 덮여져 있고, 나스탈릭(Nastaliq) 글씨체로 쓰여진 몇 개의 시 구절이 장식되어 있다. 통로를 통해 사원 안으로 들어가면 네 개의 이반(ivan)과 아카이드를 만나게 된다. 모든 벽들은 역시 7가지 색상의 모자이크로 덮여있다. 그리고 52m가 되는 높은 돔이 세워져 있는데, 그 원개는 무려 12m나 떨어진 두 층의 덮개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돔 중앙 아래에서 매우 신기하고 아름다운 에코를 자아낸다.
로도스 거상
Colossus of Rhodes
위치 : 그리스의 지중해 로드(Rhodes) 섬
건축기간 : 기원전 293년-282년
건축배경 : 시민 단결의 상징
건축시기 : 고대 그리스
기원전 408년 로드를 비롯한 4개의 도시가 로드를 수도로 하는 하나의 국가를 만들고자 연합했었다. 로드는 상업적으로 풍요로운 도시였고, 주 동맹국이었던 이집트의 프톨레미 1세(Ptolemy I Soter)와도 경제적으로 견고한 관계를 유지했다. 기원전 305년 프톨레미와 적대적이었던 마세도니아의(Macedonia) 안티고니스(Antigonids)는 로드와 이집트의 동맹을 깨려는 의도로 로드를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기원전 304년 평화조약이 채결됨에 따라 안타고니스인들은 값비싼 전쟁 장비들을 내버려둔 채 그곳을 떠나야했다. 로드인들은 그들의 단결을 자축하기 위해서 그 장비들을 팔아 엄청난 규모로 태양의 신인 헬리오스(Helios) 조각상을 세웠다고 한다.
콜로수스의 제작 기간은 12년이 소요되었는데, 기원전 282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226년 강력한 지진이 로드를 강타할 때까지 수십년 간 항구의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고 한다. 지진으로 로드시는 막대한 피해를 보았고, 콜로수스의 가장 약한 부분이었던 무릎이 깨지고 만 것이다. 곧이어 로드시민들은 프톨레미 3세로부터 복구에 드는 비용을 대겠다는 제의를 받게 되지만, 그 재건을 금하라는 신탁이 내렸다고 한다. 콜로수스 조각상은 부서진 채로 그렇게 폐허에서 천 년간이나 놓여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기원후 654년 아랍인들이 로드를 침략한 후 콜로수스의 잔해들을 모아서 시리아(Syria)로부터 온 한 유대인에게 그것을 팔아 넘겼다. 일설에 의하면, 콜로수스의 부서진 조각들은 900구의 낙타의 등에 실려 시리아로 운반되었을 것이라 한다.
테오티와칸
Teotihuacan
위치 : 멕시코 시티의 북동쪽 50km
건축기간 : 기원전 약 9,000년 이전으로 추정
건축배경 : 올멕(Olmec) 문명 멸망 후 생겨난 도시
건축시기 : BC 200년경 ~ AD 650년경
테오티와칸은 멕시코의 가장 신비로운 문화에 속한다. 그 이유는 스페인의 침공 이전에 이미 이곳을 살던 사람들이 사라져버렸고, 그들은 자신의 문화에 대한 어떤 자료도 남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650년 사이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테오티와칸은 중앙 아메리카 문명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문화를 이룩했다고 한다. 아메리카 최초의 메트로폴리탄을 형성했었고, 문명의 전성기에 그 인구가 12만 5천 가량에 달했지만 7세기 중반 갑자기 폐허가 되고 말았다.
약 23.5㎢의 땅에 펼쳐진 테오티와칸 유적은 격자형으로 설계된 계획 도시로 2천여 개의 구조물들을 갖추고 있다. 특히 60m가 넘는 피라미드가 압도적인데, 이 도시의 웅장함으로 인해 후대인들은 이 유적을 ‘신들의 도시’라 불렀다고 한다.
마추피추
Machu Picchu
위치 : 페루의 안데스 산맥
건축기간 :
건축배경 : 잉카제국이 건설한 도시
건축시기 : 1460-1470년대로 추정
케추아어로 ‘늙은 봉우리’란 뜻의 마추픽추는 옛 페루의 수도 쿠스코(Cuzco)에서 탄생한 잉카제국이 역사 속에서 사라져갔던 잉카문명 최후의 유적지이다. 안데스 산맥의 해발 2,350m 위치한 마추픽추는 아마존강의 원류인 우르밤바 강 위의 가파른 절벽에 건설되어 있어 산 아래에서는 도저히 그 정체를 확인할 수가 없다.
약 1,200명 가량의 잉카인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마추픽추는 커다란 층계와 높은 방호벽, 그리고 수로가 크게 북부와 남부 두 구역을 구분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농업지구가 있고 북쪽은 도시구역이다. 도시구역은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한 사원이나 왕궁, 탑 그리고 귀족계급을 위한 권위적이고 종교적인 건물이 주로 세워진 반면, 동쪽은 일반인을 위한 주거지로 계획되었다. 이 외에도 죄수들을 따로 수용했던 감옥이나 피라미드, 그리고 농사를 짓는 데 사용했을 태양시계 같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치첸이트사
Chichen Itza
위치 : 멕시코 유카탄(Yucatan)반도 메리다
건축기간 :
건축배경 : 후기 마야문명의 중심지
건축시기 : 기원후 7세기-14세기 초
치첸이트사는 메리다에서 약 120km 떨어진 곳에 남아있는 마야 문명의 유적지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다. 학설마다 그 연대 구분이 일치하고 있지 않지만 그 역사는 대체로 기원후 약 7세기부터 9세기 사이 마야인들에 의해 형성된 ‘고전적 마야’ 시기와 그 이후부터 14세기 사이의 ‘마야-톨텍(Maya-Toltec)’ 시기로 나뉠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마야인들은 기원 후 6세기 중반 경 치첸(Chichen은 마야어로 ‘우물의 입구’이란 뜻)의 두 우물(‘신성한 우물’과 ‘세속적인 우물’) 근처에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다른 대부분의 마야 문명의 중심지처럼, 치첸이트사 역시 종교적인 의식을 위한 장소였다. 그러다 10세기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치첸이트사는 한동안 버려졌다가 11세기초 다시 재건되어 마야 제국의 종교 중심지로 번성했다고 한다.
치첸이트사의 건축물은 크게 두가지 양식으로 변별되는데, 고전적인 마야건축과 그 이후의 톨텍 건축 스타일이 그것이다. 톨텍(Toltec)은 약 800년경 치첸이트사를 점령했던 호전적인 종족으로 마야족보다 훨씬 거칠고 인간을 산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보통 이들 톨텍족의 등장을 기점으로 이전의 ‘고전적인 마야 시기’와 이후의 ‘톨텍-마야 시기’의 건축 양식를 구분하고 있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Sydney Opera House
위치 : 호주의 시드니
건축기간 : 1957년-1973년
건축배경 : 국가를 대표하는 음악 공연장을 건축
건축시기 : 현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내세울만한 음악 공연장이 없었던 점을 고려해서, 1954년 뉴사우스웨일즈(New South Wales) 주정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국가를 대표할만한 건축물을 세우자는 프로젝트에 의해 탄생되었다. 그후, 1957년 전세계로부터 국제건축현상공모에 제출된 233개의 설계안 가운데, 덴마크의 건축가 엇존이 당선되었고, 그해 건축이 시작되어 14년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완성되었다. 조개 껍질을 연상시키는 오페라 하우스는 오늘날 시드니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유명하다. 현상 공모에서도 기존의 현대건축물 개념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새로운 형태로 주목을 끌었는데, 건축가는 어느 날 자신의 부인이 정성껏 깎아 놓은 접시 위의 오렌지 모양에서 그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기이한 건물 형태의 형태는 실제 건축에 있어 많은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드러내었고, 그로 인해 애당초 4년으로 계획했던 공사기간이 10년이나 연장되었으며 공사비 역시 약 20배 가량이나 더 투자되었다고 한다. 결국 오페라 하우스의 애초 기본 골격은 유지되긴 했지만 세 번의 재설계를 거쳐 상당히 축소된 디테일로 1973년 우여곡절 끝에 완공되었다.
록펠러 센터
Rockefeller Center
세계무역센터
World Trade Center
크라이슬러 빌딩
Chrysler Building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Empire State Building
국제연합 빌딩
United Nations Headquarters
타임스퀘어
Times Square
브루클린 브리지
Brooklyn Bridge
우주왕복선
Space Shuttle System
위치 : 워싱턴 D.C.
건축기간 : 1958년~현재
건축배경 : 우주탐사 및 개발
건축시기 : 제34대 Dwight Eisenhower 대통령
지구 궤도를 비행하는 비행체로 사람과 화물을 수송한 뒤 활공하여 지상에 착륙하도록 설계된 재사용이 가능한 유인우주선이다. 우주왕복선은 공식적으로 우주수송 시스템(Space Transportation System/STS)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우주왕복선은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개발했으며, 1981년 4월 12일 최초로 발사되었다.
우주왕복선을 이루는 3가지의 주요 구성부분으로는
① 승무원과 화물을 운반하는 날개 달린 궤도선(軌道船)
② 궤도선에 사용되는 액체수소(연료)와 액체산소(산화제)가 든 외부 탱크
③ 고체추진제를 사용하는 1쌍의 부착식 로켓 부스터가 있다.
이륙시의 총중량은 200만㎏, 높이는 56m이다. 발사될 때는 부착식 로켓 부스터와 궤도선의 주(主)기관이 함께 점화되며, 3,100만N(뉴턴)의 추진력이 발생된다. 이 부스터들은 이륙한 지 약 2분 뒤에 궤도선과 분리되는데, 회수하여 재사용하기 위해 낙하산에 매달아 지구로 떨어지게 한다. 궤도선은 외부 탱크의 추진제를 사용하여 궤도속도의 99%를 얻은 뒤 외부 탱크를 분리시키는데, 이것은 대기권으로 떨어지는 도중에 파괴된다.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
Grand Central Station
위치 : 미국 뉴욕시
건축기간 : 1913년
건축배경 : 철도 및 지하철역
건축시기 : 제27대 William Howard Taft 대통령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은 미국 뉴욕시의 파크 애비뉴 42번가에 있는 중앙역으로 뉴잉글랜드주(州)와 시카고, 서부 방면으로 가는 열차가 출발하는 시발점이다. 또한 전철과 지하철역도 함께 있어 아침저녁 출퇴근 시간에는 인파가 몰려 무척 혼잡하다. 현재는 역 주변에 세워진 팬암 빌딩(매트 라이프 빌딩)에 가려져 역의 건물은 잘 보이지 않지만, 뉴욕 시민들이 생활하는데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교통 중심 시설이다.
특히 역 건물의 중앙 천장에 그려진 별자리들은 여행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아름답다. 또한 역의 지붕 꼭대기에는 그리이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神)인 머큐리와 아테네 여신, 헤라클레스의 조각도 새겨져 있어 단순히 역사라고만 하기에는 아쉬울 만큼 예술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
Statue of Liberty
위치 : 뉴욕 리버티섬
건축기간 : 1875년-1886년
건축배경 : 미국과 프랑스 국민의 친목
건축시기 : 제18대 Ulysses S. Grant 대통령
미국 뉴욕 항 어퍼 만 리버티 섬에 있는 거대한 조각상이다.
공식 이름은 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 (‘세계를 밝히는 자유’).
미국과 프랑스 국민들 간의 친목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받침대를 포함해 전체 높이가 92m이고 높이 치켜든 오른손에 횃불을 쥐고 있으며,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이라는 날짜가 새겨져 있는 자유의 선언을 상징하는 서판을 들고 있다. 발코니까지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며 거기에서부터 전망대인 머리부분까지는 나선형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받침대 입구에 있는 현판에는 받침대를 지을 기금을 모으기 위해 에머 래저러스가 지은 '새로운 거상'(1883)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이 시에는 “…/횃불을 든 강대한 여인이 서 있으니/그 불꽃은 투옥된 번갯불, 그 이름은 추방자의 어머니/횃불 든 그 손은 전 세계로 환영의 빛을 보내며/부드러운 두 눈은 쌍둥이 도시에 의해 태어난, 공중에 다리를 걸친 항구를 향해 명령한다/오랜 대지여, 너의 화려했던 과거를 간직하라!/…”라 적혀 있다.
링컨 기념관
Lincoln Memorial
위치 : 워싱턴 D.C.
건축기간 : 1915~1922년
건축배경 :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 기념
건축시기 : 제28대 Woodrow Wilson 대통령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라함 링컨을 기념하고 ‘인간 정신이 갖고 있는 관용과 지조 및 정직의 미덕'을 기리기 위해 워싱턴 D. C.에 세운 기념관이다. 미국 수도인 워싱턴D.C.에 있는 300개가 넘는 기념관과 조각 중 미국인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기념관으로 정평이 나 있다.
건축가인 헨리 베이컨이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본떠 설계한 이 기념관은 콜로라도산(産) 대리석으로 만든 36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 36개 각 기둥의 높이는 무려 13.4m로 장중함이 절로 우러난다. 이 기둥은 링컨 시대에 미국 연방을 이루었던 36개 주를 상징한다.
조지아에서 가져온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 테네시에서 옮겨온 대리석 대좌에 앉혀놓은 거대한 링컨 좌상(높이 5.8m)은 조각가인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가 디자인하고 뉴욕의 피치릴리 형제가 조각한 작품이다. 링컨 좌상은 기념관 내부를 위압하면서 연못 너머 워싱턴 기념관과 국회의사당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미국 국회의사당
The Capitol
위치 : 워싱턴 D.C.
건축기간 : 1792~1863년
건축배경 : 국회 의사당
건축시기 : 제1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
미국은 국회 의사당은 ‘캐피톨(The Capitol)’이라고도 불린다. 미국 수도인 워싱턴D.C.의 캐피톨 언덕에 있는 국회 의사당은 높이 94m, 길이 약 250m의 큰 건물이다. 상원과 하원이 함께 쓰고, 중앙에 큰 홀이 있다. 해마다 수백만 명이 찾는 워싱턴D.C.의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 가운데 하나로 현대 건축의 백미로도 꼽힌다. 국회 의사당을 짓기 시작한 이후 완성될 때까지 여러 차례의 화재가 발생하여 수차례의 개축과 증축을 거쳐 1861년에서야 현재의 모양으로 완성되었다.
1792년 국회의사당 설계도 공모전에서 서인도제도 출신 의사인 윌리엄 손턴의 작품이 당선되었다. 1793년 9월 18일 조지 워싱턴이 초석(礎石)을 놓았다. 손턴이 건축공학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공모전에서 차점자였던 스티븐 헬럿이 공사를 감독했다. 그러나 헬럿이 손턴의 설계를 지나치게 많이 수정하려 했기 때문에 백악관을 설계했던 건축가인 제임스 호번이 새로운 감독관이 되었다. 북쪽 날개 부분이 가장 먼저 완공되었고, 1800년 11월 국회가 이곳에서 소집되었다.
백악관
White House
위치 : 워싱턴 D.C.
건축기간 : 1791년-1800년
건축배경 : 대통령의 관저
건축시기 : 제1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
워싱턴 D. C.의 펜실베이니아가(街) 1600번지에 위치한 미국 대통령의 관저이다. 백악관 건물을 포함해 모두 7만 2,000㎡에 달한다. 존 애덤스 대통령 이후의 모든 역대 미국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됐으며, 수도에서 가장 오래된 연방 건물이다. 1791년 대통령 관저를 설계하기 위한 공개 경쟁이 있었고, 아일랜드 출신의 미국인 건축가 제임스 호번이 500달러의 상금을 받고 설계권을 얻어냈다.
호번은 엷은 회색 사암(砂岩)으로 100개 이상의 방을 갖춘 3층의 구조물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1792년 10월13일 건물의 초석이 세워지고, 존 애덤스 대통령과 그의 부인 애비게일이 1800년 새로 건축된 건물의 최초 입주자가 됐다.
백악관은 1814년 영국군의 침입으로 불태워졌다가 호번의 지휘 아래 확장, 보수되어 1817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재입주했다. 1809년 이전부터 대통령 관저를 ‘백악관’이라 불렀는데, 이는 회백색 사암 건물이 주위의 빨간 벽돌 건물과 너무나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1902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White House’(백악관)를 건물의 공식명으로 정했다.
마운틴 러시모어 메모리얼
Mountain Rushmore Memorial
위치 : 미국 사우스 다코타주 블랙힐스
건축기간 : 1927년 8월~1941년 10월
건축배경 : 세상에서 가장 상징적인 근세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 것이라고 다짐한 보글럼의 바램으로 시작
건축시기 :
미대륙의 한 가운데에는 사우스 다코타주와 와이오밍 주에 걸쳐있는 자연의 위풍과 인간의 집념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미국역사의 한 페이지가 상징적으로 새겨져 있는 러시모어는 왼쪽부터 미국 초대 대통령으로 위대한 민주국가의 탄생을 위하여 헌신한 조지 워싱턴,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기안했고 루이지애나 지역을 구입해 국토를 넓힌 토머스 제퍼슨, 서부의 자연보호에 공헌이 컸고 파나마운하 구축 등 미국의 위치를 세계적으로 올려놓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그리고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승리로 미연방을 살렸고 모든 인간의 자유를 지킨 에이브러햄 링컨까지 네 위인의 초상이 조각되어있는데, 각각 미국의 건국, 성장, 보존, 발전을 의미한다. 거대한 바위에 머리에서 턱까지의 길이가 18m, 코길이 6m, 눈의 크기가 3m 씩이나 되어 90km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정도의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로 그 위풍을 과시하고 있다.
1927년 보글럼이 러시모어 산의 대리석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여 커다랗게 기본 틀을 잡았는데, 작업을 빨리 진행시키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로 바위를 크게 폭파하는 방법보다, 세밀한 부분일수록 조금씩 신중하게 폭파하는 작업을 통해 자칫 바위가 더 떨어져나가는 부분이 없도록 진행했다.
다음은 아시아 Zone
자금성
Forbidden City
위치 : 중국 베이징
건축기간 : 1407년-1420년
건축배경 : 명의 황권 강화를 위한 천도계획
건축시기 : 중국 명(明)나라 영락제
자금성’은 중국 명,청 양시대 24명의 황제가 거처하던 중국 봉건왕조의 마지막 왕궁이다. 590년의 역사를 지닌 이 고궁은 중국에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가장 완전한 형태이며, 중국 최대의 박물관이기도 하다.
이 고궁은 궁실만 모두 9,000여 칸이며, 면적은 72만㎡에 이른다. 애초 설계한 것의 반밖에 못 지었다고 하니 당초 구상이 얼마나 장대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왕궁 주위에는 높이가 3m인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왕궁 장벽 밖에는 넓이 52m의 성을 보호하는 하천(호성하)이 둘러서 흐르고 있어 하나의 성채가 완벽한 경계를 이룬 요새를 이루고 있다.
자금성의 건축 배경에는 당시 영락제를 보좌했던 한 스님의 꿈에서 비롯되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어느날 밤 스님은 천제가 살고 있는 ‘천상의 도시’를 꿈꾸고 나서 이와 똑같은 수도를 만들것을 황제에게 진언했다. 천명을 받아 천하를 통치한다는 명분에 의해 영락제는 지상에 세계의 중심으로서 ‘천제의 도시’를 재현할 것을 마음먹게 되었던 것이다. 자금성의 첫 글자 자(紫)란 ‘자미(紫微)'에서 나온 말로 천자를 상징하는 별자리의 하나이고, ’금성(禁城)‘이란 왕성을 뜻하므로, 자금성은 곧 ’천자의 궁성‘이란 뜻이다.
만리장성
Great Wall of China
위치 : 중국
건축기간 : BC 3세기~AD 16세기
건축배경 : 북방의 오랑캐족을 막기위한 성벽
건축시기 : 춘추전국시대~명(明)시대
오늘날 세계 7대 불가사의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만리장성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동쪽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 자위관(嘉關)에 이르는 지도상의 총 연장 거리만도 약 2,700km에 이르며, 실제는 약 6,400km에 걸쳐 동서로 뻗어있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으로 손꼽힌다.
만리장성의 기원은 춘추전국시대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시대의 제(齊)에서 비롯되어 전국시대의 연(燕),조(趙),위(魏),초(楚) 등 여러 나라가 각각 장성을 구축하였다. 기원전 221년 춘추전국을 통일한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7년후인 기원전 214년에 서쪽의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서 황허강 서쪽을 북상하여 인산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뻗어 랴오둥(遼東)의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대 장성을 구축함으로써 실질적인 만리장성의 첫 토대를 건축했다. 이전까지 연,조 등이 북변에 구축했던 성을 증축,개축하여 이룩한 대 사업이었다.
롱먼석굴
Long Men Caves
위치 : 중국 뤄양(洛陽)
건축기간 : 5세기말~9세기
건축배경 : 북위(北魏) 왕조의 한화(漢化) 정책
건축시기 : 북위(北魏)~송(宋)시대
‘윈강석굴’ ‘둔황석굴’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히는 ‘룽먼석굴’은 뤄양(洛陽) 남쪽 교외 약 14km 지점에 있다. 석굴이 있는 이췌산(伊闕山)은 이허(伊河)를 사이에 두고 서산과 동산으로 갈라지며, 석회암의 암벽에 다수의 크고 작은 동굴을 뚫어놓았는데, 동굴 안에는 저마다 엄청난 수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그 수만 해도 동굴 1,352개, 감(龕?불상을 모시는 장) 750개, 석탑 39개, 불상 9만 7,306체, 글자가 새겨진 제기(題記)나 비각이 3,600점이나 된다. 가위 세계적인 불교예술의 보고인 것이다.
뤄양은 역사의 고도로서, 중국의 역사에서 시안(西安, 옛 장안) 다음으로 많은 왕조가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다. 뤄양이 이렇게 번성했던 것은 중원의 중심지라는 지정학적 위치에 힘입은 바 크다. 중국 대륙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 중앙인데다 육운과 수운의 연결점이기도 했다. 뤄양의 숱한 문화 유산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룽먼석굴인 것이다.
이곳에 석굴을 처음 파기 시작한 것은 북아시아 유목민의 한 부류인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북위(北魏) 왕조. 493년 북위가 다퉁에서 뤄양으로 천도한 다음부터 석굴을 만들기 시작, 수?당에 이르는 4세기에 걸쳐 룽먼석굴을 완성했다. 그들은 강북 전체를 통일하자 확대된 영토를 어떻게 다스리는 것이 효율적인 것인가를 궁리하다 자신의 문자와 성(姓), 복식 등을 버리고 모든 것을 다수세력인 한민족의 것으로 바꾸는 한화(漢化)정책을 폈다. 그것도 모자라서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기 위해 불교를 받아들였다. 룽먼석굴의 건설도 이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타지마할
Taj Mahal
위치 :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아그라성
건축기간 : 1630년-1648년
건축배경 : 왕비의 죽음을 애도
건축시기 : 무굴제국
인도의 자랑인 ‘타지마할’은 우타르프라데시주(州) 아그라 교외 아그라성(城) 동쪽 약 2 km, 자무나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만들어진 궁전형식의 묘묘(墓廟)이다.
타지마할이란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으로,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5대 황제 샤 자한이 자신의 4번째 왕비 무 무타즈 마할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이 여인의 무덤이지만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궁전이라는 의미의 '마할'을 붙였다.
타지마할의 건립 배경에는 샤 자한과 그의 왕비 무 무타즈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14번째 아기를 낳다가 죽자, 너무나도 슬픈 나머지 무려 22년에 걸쳐서 그녀를 애도하는 아름다운 죽음의 궁전인 타지마할을 아무나강가에 만들게 한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의 집권 30년 중 22년을 이 건축에 바친 황제 샤 자한은 타지마할을 짓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타지마할이 건너다 보이는 아무나강 맞은 편에 검은색 대리석으로 자신의 무덤을 만들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또한 황제는 이 궁전을 완성한 후 다시는 그런 아름다운 건축물이 지어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건설에 참여했던 장인들의 손목을 모두 잘라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기간동안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많은 재력을 낭비하고 인력을 동원하자 백성의 원성이 높아만 갔고, 이 틈을 노린 아들 아우랑제브가 아버지를 몰아내고 나라를 빼앗는 패륜적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 두 사람의 비극적 사랑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다.
앙코르와트 사원
Angkor Wat
위치 : 캄보디아 앙코르
건축기간 : 12세기 중반
건축배경 : 왕의 사후 사원 건립
건축시기 : 앙코르 왕조
‘캄보디아의 영원한 등불’로 불리고 있는 ‘앙코르 와트’는 그 정교한 예술성과 웅장미에 있어서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을 능가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앙코르’는 왕도(王都)를 뜻하고 ‘와트’는 사원을 뜻한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과 유명한 왕족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神)과 합일(合一)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왕은 자기와 합일하게 될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유적은 앙코르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수리아바르만 2세가 바라문교(婆羅門敎) 주신(主神)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하여 건립한 바라문교 사원이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바라문교의 신상(神像)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오늘날 불교사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건물?장식?부조 등 모든 면에서 바라문교 사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구마모토 성
Kumamoto Castle
위치 : 일본 쿠마모토현
건축기간 : 1601년-1607년
건축배경 : 봉건영주의 통치 수단
건축시기 : 일본 남북조시대
일본은 봉건영주에 의한 통치와, 무가(武家) 사회의 상징으로 축성술과 더불어 군사적 목적에 의해 성이 발달하였다. 망루처럼 높게 솟아있는 것을 ‘천수각’이라고 하며, 이것이 있는 본성의 건물을 ‘혼마루’(本丸)라 하여 성 전체의 중심을 이룬다. 여기에 성주가 살고, 병기와 많은 군비가 갖추어져 있다. 주변의 아성들은 ‘니노마루’(二の丸), ‘산노마루’(三の丸)라고 하여 역시 수비를 담당했다. 성둘레에 해자를 둘러 적의 공격을 차단하는 요새의 형태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들은 메이지 유신 직후 봉건시대의 잔재로 인식되어 대부분 파괴되었다. ‘히메지성’, ‘오사카성’과 더불어 일본 3대 명성 중의 하나로 꼽히는 ‘쿠마모토성’ 역시 마찬가지의 운명을 맞았다.
이 성은 임진왜란때 우리나라를 침공했던 장군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에 의해 1607년 축성된 것이다. 쿠마모토성은 우아한 곡선의 돌담과 함께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한 아름다운 성이면서도 가장 튼튼하게 만들어진 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887년 세이난 전쟁 때 거의 대부분이 소실되어 지금의 모습은 1960년에 복원된 것이다.
7년간에 걸쳐 완성된 성곽의 넓이는 약 76㎡, 그 주위가 약 5.3㎞에 달하도록 웅대하게 지어졌는데, 이 성 안에는 성주의 권력을 상징하는 가장 높은 건물 천수각이 둘, 성루가 49개나 있었다고 한다.
히메지 성
Himeji Castle
위치 :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
건축기간 : 1600년-1609년
건축배경 : 도쿠가와 시대로의 전환기
건축시기 :일본 남북조시대
효고현 히메지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히메지성은 일본이 자랑하는 최고의 역사적 건축물이다. 지난 1993년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히메지성은 16세기 일본 성 건축물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뛰어난 방어 및 보호 시설을 갖춘 83개의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어 당시 쇼군시대의 일본의 지방 분권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해발 약 45m인 히메야마산에 자리잡고 있는 이 성은 흰색의 회반죽 성벽 때문에 ‘시라사기성’(白鷺城?해오라기성)이라고도 불린다. 이 성을 최초 축조한 지역 군주 노리무라 아카마추에 의해서 1333년에 3층 건물로 만들어졌다. 이후 1581년에 일본의 통치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개축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웅장한 모습은 1600~1609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위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에 의해 완성되었다.
임진왜란(1591~1598)의 실패 이후 갑작스레 병사한 도요토미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추종 세력을 물리치면서 도요토미 측근 성들의 주인이 모두 도쿠가와의 소유로 바뀐 것이다. 이때 이케다가 장인 도쿠가와로부터 히메지 성을 개축, 5층의 본건물과 3개의 다른 건물들을 만들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성주인 그가 이 공사를 마무리하는 데만 무려 8년이 걸렸다. 이 성에 현존하는 80개 건물들 대부분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케다가 성을 새롭게 건축한 이유는 16세기 포르투갈로부터 화승총(대포)이 전래되었기 때문이다. 즉 화력이 더 센 대포가 등장함에 따라 성벽의 두께도 더 두껍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공격용 사격장도 만들어야만 했던 것. 일본의 많은 성들이 백색 회반죽을 사용한 이유는 방화의 이유 때문이다. 일본의 성들은 대개가 돌이 아닌 나무로 만들어져 있어 항상 화재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던 탓이다. 이 성 역시 이런 까닭으로 성 내의 모든 자재에 흰색의 회반죽 칠이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다.
황룡사9층 목탑
9-Story Wooden Pagoda Hwangryongsa
위치 : 한국 경주시
건축기간 : 645년
건축배경 : 삼국통일의 정신적 기반확립
건축시기 : 삼국시대 신라 선덕여왕
불교 문화의 융성을 정신적 근간으로 삼아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는 그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는 가운데서도 특히 자랑하는 3대 보물이 있었다. 진평왕의 옥대와 황룡사의 장육존불, 그리고 황룡사 9층목탑이 그것이다.
황룡사는 불심이 깊은 신라 제 24대 진흥왕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 원래는 궁궐 남쪽인 반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 했으나, 그 자리에 황룡이 나타나자 이를 심상치 않게 여겨 신궁 공사를 중지하고 황룡을 위해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553년(진흥황 14년)에 처음 공사를 시작한 이래 9층목탑이 완성되는 645년(선덕여왕 14년)까지 무려 92년 간에 걸쳐 건립된 신라 최대의 국찰(國刹)이었다.
경복궁
Kungbokgung Palace
위치 : 서울
건축기간 : 1394~1395년
건축배경 : 조선왕조의 궁궐
건축시기 : 조선왕조 개국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한양성(지금의 서울)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궁궐의 조성에 착수했다. 1394년(태조 3년) 9월 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 두고 청성백 심덕부(沈德符), 좌복야 김주(金湊), 전정당문학 이염(李恬), 중추원학사 이직(李稷)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북악산(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임좌병향(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다. 주야로 작업을 진행한 끝에 이듬해인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경복궁은 조선 시대에 지어진 5개의 궁 가운데 으뜸이 되는 정궁이다. 경복궁의 전체적인 모습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 직사각형의 윤곽으로 둘러싸여 있고 정남에 광화문, 정북에 신무문(神武門), 동에 건춘문(建春門), 서에 영추문(迎秋門)을 각각 세웠다. 근정전(勤政殿)은 수조지소(受朝之所)로서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남북이 길고 동서축이 짧은 직사각형 터전에 조성하였으며, 보평청(報平廳)의 남쪽에 위치한다.
이렇게 아인스월드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토,일은 야간 9시까지 개장한다는데, 카다록을 보니 야경도 멋져보인다. 시간내서 다시한번 오기로하며 답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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