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전시장

아인스월드(AINSWORLD) 1

오솔 길 2010. 2. 19. 21:37

아인스월드는 수도권 근거리에 위치한 부천 상동 영상문화단지에서 2003년 11월 15일, 본격적인 에듀파크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34점의 문화유산과 유네스코 10대 문화유산 9점, 현대 7대 불가사의 6점 등 세계 25개국109점의 유명건축물들이 1/25 로 축소, 전시되어 있는 미니어처 테마파크이며 미국 허리우드 영화 제작사인 원더웍스(WonderWorks)사가 직접 제작하였습니다. - 아인스월드 홈피에서...

 

http://www.aiinsworld.com/

 

부천에있다는데 처음 가본다.

안내지도를보면 다음과같다. 

영국,프랑스,유럽,러시아,아프리카,서아시아,라틴아메리카,오세아니나,미국,아시아등의 지역별로 구분되어있다.

 

가운데 연못을 한바퀴도는 모습이다.

사진처럼 미니츄어의 문화와 역사물이다.

 

먼저 영국Zone 

 

타워브리지
Tower Bridge

 

위치 : 영국 런던
건축기간 : 1886년-1894년
건축배경 : 대교(大橋)
건축시기 : 빅토리아 여왕

 

1886년 공사가 시작되어 8년만인 1894년에 완성된 영국 템즈강의 명물 ‘타워브리지’. 그 쓰임새는 단순한 일반 대교(大橋)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수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마치 하나의 아름다운 성(城)을 연상케 할 정도로 웅장하다. 강물 위로 배가 지나가게 되면 수압을 이용해 다리가 들어올려지게 되고 한번 열릴 때 총 3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배가 중요한 교통기관이었던 시절에는 하루에도 40-50회 가량 열렸지만 지금은 일주일에 2-3회 정도에 그치고 있어 운이 닿지 않으면 이런 이색적인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

총길이 270m, 총중량 1100톤에 달하는 타워브리지는 대영제국의 힘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에 건립되어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빅토리아풍과 고딕풍이 합쳐진 세련된 멋을 보여주고 있다. 타워브리지는 특히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밤이 되면 주변의 조명이 브리지 전체를 화려하게 꾸며준다. 템즈강의 은은한 물결과 그 위의 타워브리지, 그리고 런던탑 등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추억을 남긴다. 탑 내부로 들어가면 역사적 자료들과 함께 다리의 구조에 관한 여려가지 사료가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 있다.

타워 브리지는 완공 이후 지금까지 100년이 넘는 시기 동안 단 한번도 고장난 적이 없다. 영국 토목기술자와 건축가들의 놀라운 기술력과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타워브리지는 1980년대 이후 전체가 박물관화 되어 있는데 이를 위해서 기계공학, 토목공학은 물론이고 구조기술, 전기 엔지니어링, 실내 인테리어, 조각 등 예술과 기술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었다. 공학자 존 울프 배리, 조각가 호라스 존슨 경이 대표적인 참여자들이며 주탑부는 강철 프레임에 외관을 벽돌로 장식한 것이 특이한 점이다.

 

 

 

 

웨스트민스턴 사원
Westminster Abbey

 

위치 : 영국 런던
건축기간 : 8세기-13세기
건축배경 :  왕실 직속 교회
건축시기 : 헨리3세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서쪽(West)에 있는 대사원(Minster)’이란 의미이다.
8세기 경에 처음으로 세워졌으며 그 후 11세기 참회왕 에드워드, 13세기 헨리 3세에 의해 각각 개축이 됐다. 원래는 노르망디 양식이 강한 건물이었으나 헨리 3세가 고딕양식으로 다시 변형시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내부에는 긴 스테인드글래스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어 화려한 멋을 더해준다. 길이 1백56m, 너비 61m, 그리고 높이 31m의 크기이다.

1066년 정복왕 윌리엄 공이 이곳에서 왕위대관식을 한 이래 많은 역대 왕들의 대관식이 이뤄진 장소로 유명하다. 프랑스에서 온 노르만 출신인 윌리엄은 자신이 잉글랜드 왕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모두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웨스트민스트 사원을 대관식 장소로 선택했다.

원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지금의 국회 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궁’과 한쌍을 이루고 있던 건물. 웨스트민스터 궁은 16세기까지 왕이 거처한 궁궐이었으며 바로 길 건너 위치해 있는 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원래 왕실 직속의 특수 교회였다. 그래서 공식 명칭은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성 피타교회’이지만 흔히 사람들은 그냥 ‘애비(Abbey)’ 라고 부른다.

 

 

 

 

 

빅벤
Big Ben

 

위치 : 영국 국회의사당 건물
건축기간 : 1859년
건축배경 : 시계
건축시기 : 빅토리아 여왕

 

국회의사당 시계탑인 ‘빅벤’은 대영제국의 영광이 가장 화려하게 꽃피던 빅토리아 여왕시대인 1856년에 완공되었다. ‘빅벤’이라는 이름은 ‘큰 종’이라는 뜻에서 크다의 ‘Big’과 시계탑의 설계자였던 벤자민 홀(Benjamin Hall)의 앞 글자인 ‘Ben’을 합쳐서 만들어졌다. 이 말은 애초에는 시계탑 안에 있는 거대한 종을 일컬었지만 지금은 그냥 시계탑, 시계, 벨을 통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빅벤은 세계 2차 대전의 전화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 남아 영국인들에게는 ‘희망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1941년, 전쟁의 폭격으로 영국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사당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하지만 빅벤은 폭격을 당하지 않고 여전히 매 시간마다 거대한 종소리를 울리며 그 위용을 나타냈다. 그나마 영국의 마지막 자존심을 빅벤이 지켜준 셈이다.

시계탑의 전체 높이는 106m에 이른다. 시계 상판의 넓이가 7m, 시침의 길이는 2.9m, 분침의 길이는 4.2m이고, 시간을 알리는 종의 무게는 13.5톤에 달한다. 시계의 사면으로 각각 312개 조각의 유리판 속에 시계판 4개가 있고 시침은 총기주조용 강철로, 분침은 구리로 각각 만들어졌으며 시계판의 각 글자는 500cm이다. 런던의 명물이라고 하는 이층버스 두 대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이다. 

 


 

 

버킹엄 궁전
Buckingham Palace

 

위치 : 영국 런던
건축기간 : 1703년-1946년
건축배경 : 여왕의 상주 궁전
건축시기 : 윌리엄 3세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서남쪽에 위치한 버킹엄 궁전은 영국 입헌군주 정치의 출발점이자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1703년 건축되었을 때는 애초 셰필드 공작의 저택으로 이용되어 왔다. 1761년 조지 3세가 이를 구입한 이후 왕실 건물로 편입되었으며 건축가 J. 내시에 의해 개축됐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여러 왕궁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내시는 대리석을 사용해 아치형의 입구를 만듦으로써 인상적인 건물로 변모시켰다. 하지만 조지 3세는 예산을 초과하는 바람에 자리를 박탈당하고 이곳을 사용하지는 못하게 됐다. 19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한 이후 여왕이 상주하는 궁전이 되기 시작했다. 그 후 계속적인 증개축이 시행되었는데, 1946년 E.블로어, 1913년 A.웨브가 동쪽 옆면을 증개축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2만2000 평방미터의 호수를 비롯해 17만 4000평방미터의 대정원, 다수의 미술품을 소장한 미술관, 도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버킹엄 궁전은 1993년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으며 램브란트, 루벤스, 카나레또 등의 작품과 함께 왕실 소장품을 전시하는 ‘픽쳐 갤러리’(Picture Gallery)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영국 국회의사당
House of Parliament

위치 : 영국 런던 
건축기간 : 1840년-1888년
건축배경 : 궁전
건축시기 : 윌리엄 왕


영국 국회의사당은 ‘의회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전 세계에 심어놓은 민주주의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국회의사당의 정식이름은 ‘웨스트민스터 사원(The Palace of Westminster)’인데 그 기원은 1066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프랑스 북부에 있던 노르만족은 잉글랜드를 침입하여 무력으로 정복했고, 이때 왕이 된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시대인 1090년에 완성됐다. 템즈강을 바라보면서 웅장하게 지어진 이 건물은 1500년대 초반까지 헨리8세의 왕궁으로 사용되어져 왔고 정치인들을 심판하는 법정으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당시 목조건물이었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1843년 사소한 실수로 인해 화재가 발생, 전체 사원의 3분의 2가 없어졌다. 지금의 건물은 디자인 공모전을 통해서 채택된 수학자이자 유명한 건축가인 찰스 배리 경(Sir Charles Barry)의 설계로 1840년에 착공된 후 48년만인 1888년 완공된 것이다. 요크셔지방의 돌을 직접 실어와서 지어졌으며 우아한 고딕양식으로 재탄생,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특히 이 국회의사당은 건축 양식으로 표현할 때 ‘고딕 리바이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즉, 예전 중세 시대에 풍미했던 고딕풍을 현대에 와서 다시 ‘리바이벌(재현)’했다는 의미이다. 빅토리아 왕조시대 최초의 대규모 건축물로 기록되고 있다.

 

 

   

스톤헨지
Stonehenge

위치 : 영국 윌트셔주 솔즈베리 평원
건축기간 : 기원전 3100년-1100년경
건축배경 : 기상 관측으로 추정
건축시기 : 선사시대


영국 런던에서 남서쪽으로 130km 떨어진 솔즈베리 평원에는 ‘스톤헨지’라고 불리는 거대한 석조물이 있다. 기원전 3100년 무렵부터 1100년경 사이에 약 5단계의 공정을 거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조물은 그 용도가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수직으로 우뚝 서 있는 2개의 돌 위에 1개의 돌이 수평으로 얹혀져 있어 아치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각각의 돌들은 높이가 7m, 무게는 45톤에 달한다. 바깥쪽에는 동심원 형태의 고리가 있고 안쪽에는 말발굽 형태의 돌이 세워져 있는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지난 4천년간 비바람에 의해 일부 닳아지고 금도 갔으나 지금도 옛날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돌들은 하나같이 인공적으로 깎이고 계획적으로 배치된 것으로서 선사시대 건물로는 유일하다. 한가지 불가사의한 것은 인근에서는 그러한 돌들을 구할 수 없었다는 점. 자그마치 350km나 떨어진 프리셀리 산맥으로부터 옮겨온 것인데 어떻게 이동이 가능했는지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스톤헨지를 정밀하게 분석하면 그 내부에는 다양한 기하학적 질서를 찾을 수 있다. 6각형과 12각형은 물론이고 스톤헨지 자체의 모습은 4개의 정삼각형이 돌아가면서 문과 기둥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한다. 특히 12라는 숫자는 자연과 계절의 변화를 설명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숫자이고 6은 약수들의 합이 자신과 같아지기에 고대인들은 ‘완전수’라고 믿었다. 이러한 과학성 때문에 스톤헨지의 용도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제시되고 있다.

 

 

다음은 프랑스 Zone

에펠탑
Eiffel Tower

위치 : 파리 중심부 만국박람회장
건축기간 : 1887년-1889년
건축배경 : 프랑스혁명 1백주년 기념
건축시기 : 제3공화국


프랑스 파리의 만국 박람회장에 위치한 높이 984피트(약320m), 무게 7000톤의 에펠탑은 프랑스 혁명 1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시공자인 프랑스 공학자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이름을 따서 ‘에펠탑’으로 불리고 있다. 1887년부터 약 300여명의 철강기술자가 동원되어 2년 동안 공사를 했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변형을 거쳐왔다. 이제까지 이곳을 찾은 관광객은 연평균 6백만명으로 총 2억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파리지앤(파리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각종 행사를 이곳 근처에서 치루고 있을 정도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에펠탑은 애초에는 특별한 송수신 기능이 없게 만들어졌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55피트의 안테나가 덧붙여져 TV송신탑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탑의 높이는 건설 후 1930년까지 약 40년간 세계 최고의 높이를 자랑했다.

 

이 탑이 만들어지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우선 세느강 근처 땅은 모래가 섞인 연약한 지반이라는 점과 높이가 300m를 넘어가면 바람이 건물을 미는 힘인 횡력이 급격하게 높아진다는 점 때문에 난관에 부딪혔다. 하지만 이미 파나마 운하의 수문건설과 뉴욕 자유의 여신상 건설에 참여했던 에펠의 뛰어난 건축능력은 이런 한계점을 극복했고, 이 탑은 11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도 건재하다. 에펠탑은 건설 당시에도 파리 시민들의 숱한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다. 파리의 건물들이 보통 5~6층 높이인데 비해 에펠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자연과 조화되는 도시미’를 강조하던 파리 사람들이 ‘오만할 정도로’ 높은 에펠탑을 묵과하기도 힘들었다. 당대의 지식인들인 모파상, 에밀 졸라, 뒤마 등 3백여명이 탄원서를 제출할 정도로 반대는 격렬했다. 특히 에펠탑 건설에 가장 많은 반대를 했던 모파상은 에펠탑이 완공된 후 내부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이곳이 흉물스런 에펠탑을 보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는 파리의 유일한 곳’이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샤르트르 대성당
Cathedral of Chartres

위치 : 프랑스 샤르트르
건축기간 : 1194년-1220년
건축배경 : 중세 기독교 유적
건축시기 : 카페 왕조

 

파리에서 서남쪽으로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샤르트르(Chartres)라는 지역은 프랑스의 곡창지대인 보스 지방의 수도다. 이곳에는 ‘서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 유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샤르트르 성당’이 있다.

흔히 ‘프랑스 고딕양식의 총체’라고 불려지는 이 성당은 1194년 대화재로 전소되어 버린 바실리카 대성당의 토대에 신축되기 시작해 1220년에 완공되었다. 길이 130m, 높이 37m의 아치와 105m의 높은 탑, 그리고 약 2000평방미터에 걸쳐 있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색유리 조각으로 만든 그림이자 창문)가 성당의 위엄과 아름다움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특히 높은 건물과 첨탑, 수직으로 솟아있는 느낌을 주는 건물 외벽은 좁고 긴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와 함께 고딕성당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표현해주고 있다. 샤르트르 성당은 아미앵성당, 노트르담성당, 랭스성당 등과 함께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딕양식 건축물로 분류되고 있다. 북쪽 현관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들은 자유로운 몸과 긴장감 있는 얼굴 표정들로 인해 매우 매력적이다.

 

 

 

 

루브르 박물관
Louvre Museum

위치 : 프랑스 파리
건축기간 : 1190년 이후
건축배경 : 군사시설 및 궁전
건축시기 : 프랑수아 1세


루브르 박물관은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로 꼽히며 장장 20만점이라는 대량의 소장품 덕에 관람 기간만 일주일이 넘게 걸릴 정도라고 한다.

원래 루브르 박물관은 1190년 필리프 오귀스트가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군사시설이었지만 1300년대 프랑스 군주였던 샤를르 5세는 이를 저택으로 사용했다. 그 후 프랑수와 1세는 군사적인 냄새가 나는 권위적인 외형을 르네상스 양식으로 새롭게 변형시켰고 이후 300년에 걸쳐 궁전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 시기에 루브르 궁전은 끊임없는 개축과 증축을 한 뒤에 결국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루브르 궁전에는 원래 프랑수아 1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등 역대 왕들이 수집해놓은 미술품이 있었다. 루브르 궁전이 박물관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조성하면서 더 이상 루브르가 궁전의 역할을 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 나폴레옹 시대에 이곳을 일시적으로 박물관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전시물 정리가 제대로 되지 못해 왕실의 보석과 귀금속류가 도난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후인 1793년 국민의회가 왕실의 보물을 공개하기로 결정해 ‘루브르 박물관’이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얻었으며 그때부터 온전히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샤크레케르 대성당
Basilica of the Sacred Heart
위치 :  파리 몽마르뜨 언덕
건축기간 : 1876년-1919년
건축배경 : 성당

 
1876년에 건립이 시작되어 1919년에 완공된 샤크레케르 대성당은 건축가 우트리오(Utrillo)와 몽마르뜨에 살고 있던 1백여명에 가까운 예술가들이 합심해서 지은 성당이다.

 

파리의 대주교 기베르에 의해서 건축이 추진된 이 성당은 당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국민의 사기를 높이고 카톨릭의 숭고한 신앙심을 일깨울 목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지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프랑스인들은 자국 예술의 위대성을 자랑해 자존심을 회복한 것은 물론이고 신앙심을 더욱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건축비는 신자들에 의해서 충당되었는데, 그들의 기부금만 4천만 프랑에 달했다. 당시 모금은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하기 시작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애초에 이 성당은 온통 하얀색이었고 이러한 외양이 기존 파리의 건축물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많은 논란이 있기도 했다. 특히 인근의 개선문과 에펠탑 등과 그 건축 양식에서 닮은 부분이 없고 지나치게 이색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건축을 반대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파리를 찾는 관광객들이 꼭 한번은 들르는 유명한 건축물이 됐다. 특히 중앙의 3개의 돔은 매우 인상적이다.

 

 

 

노트르담 사원
Cathedral of Notre-Dame

위치 : 프랑스 파리
건축기간 : 1163년-1333년
건축배경 : 성당
건축시기 : 카페왕조, 부르봉 왕조

 

현재 노트르담 사원이 위치한 곳은 원래 고대 로마인들이 제사를 지내는 장소였다. 그후 4세기경에 카톨릭이 국교로 지정되면서 이곳에 성당이 만들어졌고 1163년 모리스 드 쉴리(Maurice de Sully)파리 주교에 의하여 본격적인 개축이 시작되면서 길이 130m, 폭 48m, 높이 35m의 전형적인 고딕양식 건물이 만들어 졌다. 많은 건축가와 기술자, 예술가들이 참여해 무려 170년 동안 건설됐다. 프랑스혁명 기간 중에 첨탑이 파괴되기도 했고 한때 포도주 창고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19세기 비올레르 뒤크(Viollet-le-Duc)에 의해 재건됐다.

 

원래 ‘노트르담(Notre-Dame)’이라는 말은 ‘우리의 귀부인’이라는 의미이며 성모마리아를 지칭한다. 정면에 보이는 두개의 종탑과 장미창이 있으며 입구에는 3개의 문이 있다. 정면에서 왼쪽 문이 ‘성모마리아의 문’, 가운데가 예수님과 12제자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최후의 심판의 문’, 그리고 우측에는 ‘성녀 안나의 문’이다. 이 문들 위에서는 이스라엘의 왕을 상징하는 28개의 입상이 나열되어 있으며 2층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가 천사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화려한 장관을 볼 수 있다. 좌우에는 각각 인류의 시초인 아담과 이브의 조각이 있다.

 

 

 

 

 

베르사유 궁전
Palace of Versailles

위치 : 프랑스 베르사유
건축기간 : 1643년(이후 50년간 증,개축)
건축배경 : 왕권강화
건축시기 : 루이 14세

 

프랑스 파리 남서쪽의 베르사유에 위치한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에서 16세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왕들의 관저로 쓰였던 ‘유럽 궁전의 진수’라고 할만하다. 절대왕정 시대인 당시에 군주는 매일같이 수백명의 귀족들을 불러모아 그들에게 관직과 명예직을 수여하면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보해 나갔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넓은 공간과 함께 자신의 위엄과 명예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권위 있는 건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근 50여년 동안 증축과 개축을 하면서 그 모습을 하나 하나 완성해 왔다. 1610년 루이 13세가 베르사유 궁전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소궁전을 짓는 것으로 시작되어 1643년 루이 14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본격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다. 당시 루이 르 보, 쥘르 아르두앵 망사르, 로베르 드 코트와 같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건축사들과 천재적인 조경사로 알려져 있는 앙드레 르 노트르가 이 작업에 합류했다. 이때부터 약 50년간 전체 길이 680m의 거대한 궁전을 짓기 위해 약 2만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퐁텐블로 성
Fontainebleau

위치 : 파리 동남쪽 퐁텐블로 숲
건축기간 : 1528년 이후 수세기
건축배경 : 왕족의 사냥 숙소 
건축시기 : 프랑수와 1세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70km 지점에 위치한 퐁텐블로 숲은 중세시대에서부터 사냥을 좋아하는 왕과 귀족들이 즐겨찾던 곳이다. 광대한 숲과 맑은 샘 등 수려한 경관이 매혹적이어서 왕들은 이곳에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

그 후 르네상스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프랑수아 1세가 자신의 사냥 숙소용으로 지은 궁전이 바로 오늘날 퐁텐블로 성의 원형이다. 당시 프랑수와 1세는 이탈리아의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을 초빙해 와 1528년 착공을 했다.
이후 루이 16세와 이후 역대 왕들에 의해 증,개축되어 바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수세기 동안 지어져 온 까닭에 중세부터 18세기 말까지의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재되어 있으며 오히려 이것이 색다른 매력으로 작용한다. 성은 16세기와 18세기 풍이며 탑은 12세기 형식이다.

 

이곳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름다운 정원이다. 당시 정원은 그 성을 평가하는 하나의 잣대였으므로 왕들은 경쟁적으로 정원꾸미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정원 역시 수세기를 거치면서 영국식과 프랑스식이 혼재되어 있다. 성의 첫인상은 상당히 소박해 보이는 것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오랜 역사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명 ‘퐁텐블로파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파리 왕족의 각종 유물들이 빼곡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다는 황녀의 금빛 침실이나 평민 출신에서 황제에 올랐었던 나폴레옹의 각종 유품들이 있다.

 

 

 

 

샹보르 성
Chateau de Chambord

위치 :  프랑스 루아르
건축기간 :  1519년-1534년 
건축배경 :  궁전

건축시기 : 프랑수와 1세-루이 14세

 

프랑스 루아르 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샹보르 성은 프랑수와 1세의 제위 시기인 1519년에 착공되어 15년 뒤인 루이 14세 때에 완공되었다. 이 성에는 무려 440여개의 방이 있어 그 웅장한 규모면에서 베르사유 궁전과 곧잘 비교되곤 한다. 총 5,500헥타르의 공간에 32km에 달하는 길고 긴 울타리를 가진 샹보르 성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식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루아르 계곡의 방대한 산림 속에 위치하고 있어 그 모습이 자연 경관과 더불어 가히 장관을 이루고 있다.

 

성의 외관은 프랑스의 전통을 중시하는 한편 르네상스 시대의 유행을 따라 좌우 대칭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중앙 돔 안에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거대한 계단이 있으며 이는 위대한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했다. 계단 끝에 프랑수아 1세의 방이 나타난다. 내부에는 금실로 수놓은 찬란한 침대 장식과 테라스에서만 볼 수 있는 수많은 종루와 탑, 그리고 굴뚝의 아름다운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한때 무도회와 연극이 상연되었던 둥근 천장의 근위실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프랑스의 유명한 희극작가 몰리에르가 그의 작품들을 처음 올리기도 한 곳이다. 성 내부 곳곳에는 프랑수아 1세의 상징인 도룡뇽 무늬가 새겨져 있어 관광객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

 

샹보르 성은 전체적으로 ‘중세적인 느낌’이 매우 강하도록 설계됐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사각의 벽돌과 크고 묵직한 둥근 탑 등 견고해 보이는 형태가 그것이다. 하지만 군사적인 목적은 아니었기에 실질적인 견고성보다는 지붕 꼭대기의 장식품들을 위해 전체적인 구조가 배열되었다. 샹보르 성은 왕들의 상시 거주 숙소는 아니었고 다만 인근 솔로뉴와 샹보르 숲에서 사냥을 즐길 때만 주로 이용했다. 그래서 1년에 고작 5주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민중들의 분노를 사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는 성난 군중에 의해 점령을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개선문
Arch of Triumph

위치 :  프랑스 파리 드골 광장
건축기간 : 1806년-1836년
건축배경 : 전쟁승리 기념
건축시기 : 나폴레옹 시대

 

개선문이란 보통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군과 병사들을 위로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지는 아치 형태의 건축물을 말한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많이 세워져 왔으며 현대의 개선문이라고 한다면 프랑스 파리의 드골 광장에 세워져 있는 ‘에투알 개선문’을 지칭한다.

1805년 오스터리츠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나폴레옹은 병사들에게 ‘너희들은 개선문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06년부터 J.F.샬그랭이 설계한 개선문의 건축이 시작됐다. 그러나 샬그랭이 얼마 있지 않아 사망하게 되고 나폴레옹 자신도 실각을 했기 때문에 공사는 중단되었고 그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 후 건축사 페르시에가 제출한 변경안을 토대로 건축이 이어졌고 30년만인 1836년에 겨우 완공됐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나폴레옹 자신도 사망한 이후였다.

 

높이 49m, 너비 45m의 에투알 개선문은 고대 로마 개선문의 양식을 따라 지어졌으며 프랑스 근세 고전주의의 걸작으로 꼽힌다. 근세 고전주의는 ‘조화와 명석함’을 추구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사조로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부활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진 예술의 한 경향이다.  

 

 

 

파리 오페라하우스
Paris Opera House

위치 :  프랑스 파리 
건축기간 :  1861년-1875년
건축배경 :  오페라 극장
건축시기 : 나폴레옹 3세

 

파리의 오페라 거리에 위치한 일명 ‘파리 오페라 하우스’는 1861년 샤를 가르니에의 설계로 공사가 시작되어 14년 후인 1875년에 완공됐다. 당시 ‘우아한 건물’이라는 컨셉을 내세워 디자인을 공모했으며 171개의 기획안이 경합을 거쳤다.

이 극장은 한번 오페라에 등장하는 출연자들이 무려 400명이 넘을 정도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1,991석의 객석은 제정시대의 양식을 띠고 있으며 천장에는 샤갈의 ‘꿈의 꽃다발’이 그려져 있어 예술적 감흥을 더욱 고조시킨다. 건물 전체를 대형 그림과 대리석 조각상으로 뒤덮고 있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극장 건물 자체가 하나의 관광 상품화되었고 따라서 공연이 없는 날에도 관광객들이 끊이질 않고 있다.

 

설계자인 가르니에는 20세기 프랑스 건축의 선두주자로 불리며 또다른 건축가인 오귀스트 페레와 함께 이 건물에 철근 콘크리트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의 넓은 대리석 계단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면 ‘퓨티어의 샘물’이라는 조그마한 구조물이 있고 손님용 원형홀로 이어진다. 관광객들은 객석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박스석에서 극장 내부를 구경할 수 있다. 웅장한 조각들이 장식하고 있는 로비를 지나 붉은 색 융단이 깔려있는 객석에서 공연을 감상하면 마치 19세기 귀족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유럽 Zone

벨베데레 궁전
Belvedere Palace

위치 : 오스트리아 비엔나

건축기간 : 오스트리아 비엔나
건축배경 : 궁전
건축시기 : 합스부르크 시대

 

벨베데레 궁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벨베데레’라는 건축 용어부터 이해해야 한다. 사전적인 의미는 ‘아름다운 경치’이며, 보통 ‘좋은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높은 곳에 세운 건축구조물’을 일컫는 말이다. 구체적인 건축기법으로는 ‘꼭대기에 지붕은 있지만 벽은 한쪽 면이나 여러 면이 트여있는 곳’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건물의 가장 위층에 지어지거나 독립적인 형태를 갖기도 한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실용화되기 시작했지만 야외가 트여있다는 점에서 날씨가 추운 북유럽 지역에서는 건축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벨베데레 궁전은 대표적인 바로크풍의 궁전 건축양식과 정원 형태를 갖추고 있다. 궁전이 지어진 시기는 1714년 부터 1722년 까지이며 그 계기는 1683년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터키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유럽 제일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됐다. 따라서 건축양식에 있어서도 힘과 권위를 내세우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특출한 예술적 감각을 타고난 건축가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Lucas von Hildebrant)는 벨베데레 궁전 설계를 통해 자신의 건축세계에 하나의 획을 그었다. 큰 정원으로 에워싸여진 채 서로 바라보고 있는 대칭형 벨베데레 형식의 벨베데레 궁전은 전통적 요소와 이국적 요소들, 그리고 18세기에 나타난 공간에의 새로운 접근 방법이 결합되어 건축되어졌다. 

 

 

노이슈반슈타인 성
Neuschwanstein

위치 : 독일 바이에른주(州)
건축기간 : 1869년- (미완성)
건축배경 : 궁전  
건축시기 : 바이에른왕 루드비히 2세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세계에서 가장 이국적이면서도 아름답고 또한 슬프면서도 미스테리한 사연까지 깃들여져 있는 신비의 성이다. 미국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공원인 디즈니랜드의 디즈니성이 바로 이 노이슈반슈타인성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하니 그 동화같은 낭만적 아름다움을 상상해볼 수 있다.

 

독일 바이에른에 위치한 이 성은 당시 왕이었던 루드비히 2세에 의해 1869년부터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은 17년 뒤인 1886년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이후 공사는 중단된 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바그너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루드비히 2세는 오페라 ‘로엔그린’ 중 백조의 전설이라는 것에 모티브를 얻어 성 전체를 디자인했고 그래서 ‘백조의 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그라다파밀리아 성당
Sagrada Familia Churh

위치 : 스페인 바르셀로나
건축기간 : 1882-현재
건축배경 : 성당
건축시기 :  건축중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기존 건축의 개념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파격적인 건물이다. 마치 거대한 옥수수 4개가 하늘로 치솟은 듯 보인다. 천재 건축가로 알려진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해 1882년부터 착공에 들어간 이 성당은 12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건축되고 있다. 앞으로도 200년은 더 건축을 할 예정이라고.

 

현재 완성된 것은 지하 예배당과 중앙 지하실 정도이다. 완성된 도면에 따르면 높이 100m 정도의 탑이 12개가 들어서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를 상징한다. 이외에 중앙에 세워지는 170m의 가장 큰 탑은 예수를 상징하고 탑과 탑을 이어주는 돔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고 있다. 또 별도의 돔 4개는 4명의 복음 성인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성스러운 가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까지는 전체 건축 시리즈에서 일부분에 불과하다. ‘나시미엔토(탄생)’라는 건축 주제에 이어 ‘글로리아(영광)’와 ‘파시온(수난)’ 부분은 아직 손도 대지 못했다. 향후 200년이라는 건축 시간이 더 소요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성당 지하에는 가우디의 스케치와 사진 등이 있다. 현재는 공사중이기 때문에 성당 내부에는 시멘트 포대와 공구가 여전히 흩어져 있다.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Basilica de San Pietro

위치 : 이탈리아 바티칸 시티
건축기간 : 1506년-1626년 
건축배경 : 종교적 신념
건축시기 : 율리우스 2세 

이탈리아 바티칸 시티에 위치한 성베드로 성당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바티칸 시티에는 예로부터 수없이 많은 보물이 존재해 왔는데, 그 중에서도 이 성당은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326년 콘스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세워졌으며 1506년 율리우스 2세의 명령에 의해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이 성당은 카톨릭의 총본산을 대변할만한 사원을 건립하자는 의견에 따라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총동원됐다. 당시 르네상스를 주름잡던 건축가들이 참여해 무려 1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공사를 했고 마침내 1626년 완공되었다.

 

특히 사원의 설계는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건축가 부라만테로 부터 시작되었다가 미켈란젤로에게로 이어졌으며, 그의 천부적인 재질과 감각이 잘 반영되고 있다. 특히 중앙에 솟은 아름다운 돔은 미켈란젤로의 걸작에 속한다. 로마 르네상스 건축의 정점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네로 황제에 의해 순교한 성베드로의 묘지 위에 세워졌다.

 

 

 

 

 

 
피사의 사탑
Tower of Pisa

위치 :  이탈리아 중서부
건축기간 : 1174년-1350년
건축배경 :  전쟁 승리 기념
건축시기 :  신성로마제국 오토 1세

 

한쪽으로 기울진 모습 때문에 더욱 유명한 ‘피사의 사탑’은 본래 피사 대성당의 부속건물이었다. 그러니까 피사 대성당은 성당 본건물과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불려지는 종탑 등 세가지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1174년에 착공되어 1350년에 완성된 피사의 사탑은 중세 도시 국가인 피사가 해전(海戰)에서 사라센 함대를 무찌르고 대승을 거둔 기념으로 세워졌다. 흰색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으며 꼭대기의 종루를 포함해 55.8m의 높이와 16m의 지름을 가진 8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게는 1만4,500톤. 탑 내부에는 나선형으로 된 294개의 계단이 있으며 종루에는 각각 다른 음색과 음계를 지닌 7개의 종이 있다. 그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지중해에서 발달한 토스카나풍과 중세 기독교 정신의 로마네스크 양식이 합쳐졌다. 이 양식은 매우 대담하면서도 종교적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밀라노 대성당
Milan Cathedral

위치 :  이탈리아 밀라노 
건축기간 : 1386년-1951년 
건축배경 :  종교적 신념
건축시기 : 영주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한 ‘밀라노 대성당’은 높이 157m, 너비 92m에 이르는 거대한 고딕양식의 성당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로 통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밀라노라는 도시 자체가 유럽의 동서남북을 잇는 요충지이자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 진출해 있는 ‘경제 수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밀라노가 자랑하는 두 가지가 바로 ‘세계 최첨단 유행’과 ‘밀라노 대성당’이다.

밀라노 대성당은 3천개가 넘는 거대한 조각군과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수백개의 유리 첨탑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장미창이 유난히 아름다운 것으로 정평이 높다. 첨탑의 경우 굉장히 화려해 보이기는 하지만 일부 통일감이 없고 번잡해 보인다는 점이 흠으로 지적되고 있기도 하다.

 

이 성당의 유래는 1386년 밀라노의 영주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대성당을 지을 것을 건의한데서 비롯되었고 이에 대주교 안토니오 디 사루초가가 기공식을 거행했다. 당시 영주와 대주교는 프랑스나 독일에 필적할 만한 거대하면서도 권위 있는 성당을 원했다. 따라서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외국 건축가들도 함께 참여시켰고 그래서 다소 이국적인 요소가 강조됐다. 현재 이탈리아 내에 있는 성당 중에 알프스 이북의 고딕적 요소가 가장 농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건축양식이 반영되다보니 건축가들 사이의 의견조정이 어려워 부대 공사가 모두 끝난 것은 1951년이었다.

 

 

 

 

 

 

콜로세움
Colosseum

위치 : 이탈리아 로마  
건축기간 :  서기 72년-80년
건축배경 :  오락시설
건축시기 :  베스파시아누스 황제~티투스 황제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콜로세움’은 거대한 투기장이자 오락시설이었다. ‘글라디아토르’라고 불리는 검투사들의 시합과 맹수들의 싸움 등이 선보이던 장소였다. 원래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기원후 72년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의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호수가 있던 자리에 착공해 8년 뒤인 80년에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에 의해 완공되었다. 당시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100일 동안 격투 경기가 열렸으며 약 5,000여 마리의 맹수가 도살되기도 했다. 당시 로마인들은 ‘콜로세움이 멸망할 때 로마도 멸망하며 세계도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당시 콜로세움이 자신들에게 주는 자긍심을 표현했다.

 

둘레 527m에 직경 188m(짧은 쪽 156m)의 크기를 가진 이 원형극장이 ‘콜로세움’이라는 명칭을 얻은 데에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하나는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콜로사레(Colossale)에서 유래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고 다른 하나는 근처에 세워진 네로의 조각상을 의미하는 콜로서스(Colossus)에서 파생됐다는 것이다. 타원형을 이루고 있는 웅장한 모습이나 아치가 장식하는 균형잡힌 모습들이 로마 건축 기술의 결정판이라고 할 만하다. 거대한 바위 축대 위에 세워졌으며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 위에 있었으니 이는 지진으로 인한 흔들림이 최대한 흡수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수용 인원은 4만5,000의 좌석과 5,000의 입석으로 총 5만명 정도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의 콜로세움 천장에는 ‘베라리움’이라고 불리는 천막지붕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어 채광과 환기구의 역할을 했다. 특히 지정된 입구로 들어가 관람을 원하는 층으로 올라가는 방식은 오늘날의 많은 경기장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Acropolis

위치 :  그리스 아테네
건축기간 :  기원전 447년-406년
건축배경 :  도시방어와 수호신인 아테네 여신을 기념
건축시기 : 고대 폴리스 시대

 

‘고대 그리스 문화의 대표적인 걸작’이라고 불리는 ‘아크로폴리스’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 유산 제 1호다. 고대 그리스는 도시 국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 도시 중심지에는 약간 높은 언덕이 있었는데, 이를 ‘폴리스’라고 불렀다. 이곳은 주변 지역을 감시하기에 알맞을 정도로 높았기에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거점이 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 국가 자체가 폴리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웠고 원래의 폴리스는 ‘높은’이라는 의미의 ‘아크로(akros)’라는 단어가 붙어 아크로폴리스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아크로폴리스는 각 도시 국가에 있는 언덕과 그 언덕에 위치한 방어벽과 신전을 모두 가르키는데, 오늘날에는 대표적으로 그리스 아티케 지방의 아테네에 있는 그것을 지칭한다. 또 아크로폴리스에는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을 짓고 여러 신들의 상징물을 만들어 당시 신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현재 아테네시의 아크로폴리스에는 성벽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프로필레아, 아테네 여신을 모신 신전인 파르테논와 에레크테이온, 승리의 여신 니케를 기념한 니케신전이 남아있다.

특히 중앙에 위치한 파르테논은 그리스 건축의 상징 그 자체이며 멀리서 보면 공중에 뜬 것처럼 느껴져 신기함을 자아낸다. 중간부분이 약간 부풀어져 있는 기둥 부분은 딱딱한 신전의 모습을 보다 풍요롭게 해주기도 한다. 또한 기하학의 법칙이 엄격하게 적용되기는 했지만 딱딱함과 획일성을 배제하는 건축기법을 사용해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카이저빌헬름 교회
Kaiser-Wilhelm-Gedachtniskirche

위치 :  독일 베를린 
건축기간 : 1891년-1895년 
건축배경 :  교회
건축시기 : 카이저 빌헬름 2세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에 위치한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1891년 건축이 시작되어 1895년에 완공되었다.

당시 통치자였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1889년에 사망한 아버지인 빌헬름 1세를 기념하기 위해서 이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프란츠 슈베크텐(Franz Schwechten)이 설계한 이 교회는 63m의 높이이며, 독일이 동서로 분단되어 있었을 때는 서베를린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빌헬름 2세는 20년 동안 재직하면서 무려 30개가 넘는 대형 교회를 짓도록 했는데, 이는 신자를 수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도시의 미관 때문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에 교회는 늘 텅텅 비어있는 경우가 많았었다. 특히 카이저 빌헬름 교회가 지어진 곳은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건축을 추진하던 당시 신하들이 많은 반대를 했지만 황제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또 교회 옆에는 광장을 지어 자신의 처인 황후의 이름을 따 ‘아우구스트 빅토리아’로 명명했다. 교회의 건축양식은 고딕풍이 변형된 ‘네오고딕’ 형식이다.

 

특이한 것은 현재는 이 교회가 부서진 채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 2차대전 중인 1949년 11월 23일 영국군으로부터 폭격을 맞은 것인데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복구하려고 했으나 시민들이 반대해 그대로 두었으며 현재는 종탑 부분만이 남아있다. 복구를 반대한 이유는 이른바 ‘전쟁의 참상을 알리자’라는 의미라고 한다.

 

 

 

 

성바실리 사원
St. Basil Cathedral

위치 :  러시아 모스크바
건축기간 : 1555년-1561년
건축배경 : 전쟁 승리 기념
건축시기 : 이반 대제

성바실리 사원은 ‘러시아 건축 최고의 걸작’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려한 외관과 독자적인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이반 대제가 2백년간 이곳에 군림한 몽골족 카잔한을 물리친 기념으로 1561년 완성했다. 외세를 물리친 기념으로 만들어진 만큼 당시 러시아 건축 기술을 총동원해 건설했다고 한다. 특히 인근의 또다른 건축물인 크레린 궁전이 이탈리아 건축가들에 의해 지어진 반면, 성바실리 사원은 러시아 건축가들이 전통적인 기법을 발휘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현란한 색채와 독특한 모양새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양한 탑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부조화 속의 조화’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곳은 건설 당시 바실리라는 수도사가 기거하다 1588년 사망해 북동쪽 별관에 묻혔다. 수도사 바실리는 생전에 이반 대제에게 종교적, 철학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의 죽음을 슬퍼한 이반대제가 그를 기리기 위해서 ‘성바실리 사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47m 높이의 팔각탑을 중심으로 네 개의 중간탑이 둘러싸고 그 사이에 다시 네 개의 작은 탑이 위치해 총 9개의 탑이 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외부에서는 그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탑은 8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각의 탑들은 또한 서로 다른 형상을 지닌 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바실리의 전체 탑은 각기 독특한 모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전체적으로는 ‘하나’라는 느낌이 강해 끊임없는 긴장감과 역동성을 보여주는 건축기법이 특이하다. 각 탑들은 계단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내부 벽면에는 이슬람 양식의 꽃과 기하학적 문양,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붉은광장
Red Square

위치 :  러시아 모스크바
건축기간 : 17세기 이후
건축배경 : 광장
건축시기 : 표트르 대제

흔히 ‘모스크바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붉은 광장’은 길이 695m, 폭 130m에 넓이 7만3,000평방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러시아어로는 ‘끄라스나야 쁠로샤지’라고 불리는데 원래는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곳 주변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붉은 색을 찾아볼 수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붉은 광장’의 유래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유력한 해석이 있다. 하나는 이곳에서 혁명기념일과 메이데이등 주요 행사가 열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붉은색 현수막을 들고 나왔고 또 인근 건물에도 이 붉은 현수막이 내걸렸기에 그때부터 붉은 광장으로 불렸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는 ‘끄라스나야’라는 말 자체가 ‘중요한’, ‘붉은’라는 의미도 함께 담겨져 있는데, 이곳이 점차 모스크바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면서 ‘붉은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곳 주변부를 살펴보면 이 광장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대통령 관저가 있는 크렘린 궁전, 국립역사박물관, 레닌의 묘, 성 바실리 사원, 러시아 호텔 등이 빙 둘러싸고 있는 이 광장은 가히 러시아의 정치와 문화, 관광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크렘린 궁전 안에는 15세기의 장대한 교회에서부터 현대적인 의회를 비롯해 사원과 병기고, 마차, 의복 등 러시아 황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전시관도 있다.

 

 

 

영국,프랑스,러시아등 유럽Zone을지나, 아프리카, 아시아쪽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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