愛 蓮 亭 (애련정)
지정일자 : 1997. 8. 1
소 재 지 : 이천시 안흥동 404
소 유 자 : 이천시
관 리 자 : 이천시
재 료 : 목 조
시 대 : 조선시대
新增東國與地勝覽에 수록한 임원준의 <愛蓮亭記>에 의하면 애련정은 성종 5년(1474) 이천 부사로 부임한 이세보(李世珤)가 세웠다고 되어 있다.
처음에 관아 동쪽에 있는 이천 객관 남쪽에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그가 부임할 당시에는 돌보지 않아서 기울어져 있었다.
이세보는 이 정자를 수리하여 전보다 더 크게 세웠는데, 낮지도 않고 그리 높지도 않으며, 사치스럽지도 않다고 하였다.
정자아래쪽은 자연습지였는데 사각형의 연못(方沼)을 파고 연꽃을 가운데 심었다고 하였다.
영의정이던 신숙주(申淑舟)에게 작명을 부탁하여 애련(愛蓮)이란 이름을 얻었다.
중종 4년(1509)경에 부사 이순언(李純彦)이 애련정을 크게 증축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문집을 살펴 보면 김안국(金安國), 월산대군(月山大君), 서거정(徐居正), 그외 조위(曺偉), 강경서(姜景敍), 김진상(金鎭商)등이 애련정을 소재로 한 시가 남아있다.
여주 세종대왕 능에 참배하고 돌아가던 길에 역대의 국왕들이 이 곳을 방문하였다.
실록에는 중종이 이 곳에서 양로연을 베푼 기록이 있고, 숙종과 영조, 정조가 방문한 기록도 있다. 또한 [與地圖書]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안흥지(安興池)는 둘레가 1250척(약388m)으로 부(府) 동쪽 5리 지점에 안흥리 제언이 있다고 하였으며, 규모가 크긴 하지만 조금 작은 다른 제언들은 전혀 기록하지 않고 지도마다 안흥지만 표기한 것은 아무래도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애련정은 1907년 일본인에 의해 소실되었으나, 1998년에 이천시가 복원했다. 단청이 아름다운 애련정과 안흥지의 주변 경관이 잘 어울린다.
안흥지끝에 각종 비석이 보인다.
한편 중종·숙종·영조·정조 네 임금이 여주 능행길에 올랐다가 이천행궁에 유숙하면서 애련정에 올라 경치를 감상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중종23년(1544)10월, 임금이 능행을 끝내고 이천행궁에 머물 때, 애련정에서 노인잔치를 베풀고 글 제목을 내려 시를 짓도록 했다고 한다. 『정조실록』에는 임금이 행궁에서 애련정을 바라보면서 당시 경기관찰사였던 정창성(鄭昌聖)과 죽 받은 대화가 나온다. 그런데 이 군신간의 대화내용을 보면 정자가 세워진지 이미 300여 년이란 세월이 지난 뒤인데도, 정조가 애련정에 대한 소문을 이미 잘 알고 있고, 월산대군이 지은 애련정시의 내용까지도 기억하고 잇었다는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고장의 명물이었던 애련정이 언제 없어지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정조조인 18세기 후반까지도 뚜렷하게 건재했던 사실이 입증되기 때문에, 이 시기보다도 한참 세월이 지난 뒤인 한말 혼란기로 추정되고 있다. 정자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기록도 현재까지는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애련정기」에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고, 그리 사치하지도 검소하지도 않다'고 했기에, 유별난 형태는 아닌 수수하고 일반적인 모습의 정자였으리라고 추정 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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