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271호
명 칭 : 경희궁지(慶熙宮址)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 101,221.5㎡
지 정 일 : 1980.09.16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126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서울역사박물관, 종로구
서궐(西闕)경희궁의 전신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경덕궁은 본래 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이 곳에 왕기가 서린다는 말을 듣고 광해군이 왕기를 없앤다는 뜻으로 광해군 9년(1617) 6월에 궁전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인경궁과 함께 공사가 진행된 관계로 재력의 소모가 막대하여 공사가 뜻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광해군은 궁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왕 15년 3월계해 반정(癸亥反正)으로 폐위되고 말았는데, 그 뒤 경덕궁은 인조가 인목대비를 받들어 일시 이 곳에 이어한 일이 있었고 그 후에는 역대 왕들이 수시로 이 궁에 거처한 일이 있었으므로 경덕궁은 왕궁의 하나로 손꼽힐 수있게 되었다. 그 후 영조 36년(1760)에 경덕의 궁명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동음이라 하여 이를 피하여 경희궁(慶熙宮)으로 고쳤다. 순조 29년(1829) 10월 경희궁은 화재로 인하여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순조 31년(1831)에 다시 중건 되었고 철종 10년(1859)부터 11년 사이에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다. 그 후 고종 초년 경복궁을 중건하고 법궁을 이어하자 경희궁은 빈 궁궐로 남게 된다. 관청의 필요에 따라 창고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시설은 유지되고 궁궐로서의 외양은 지키고 있었다. 광무 5년인 1901년에서 1904년 사이에는 당시 고종이 임어 하고 있던 경운궁과 연결하기위해 운교가 연결되기도 한 것으로 보아 경희궁은 광무연간까지 궁궐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고 있었다.
근세에 이르러 일제가 침략해 와서 한일합방이 체결될 무렵 경희궁은 숭정전(崇政殿), 회상전(會祥殿), 흥정당(興政堂), 흥화문(興化門) , 황학정(黃鶴亭)만이 남아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들어온 뒤로 숭정전(崇政殿)은 1926년 남산 산록에 이치(移置)되어 조계사(曹谿寺)의 본당으로 사용되었고, 흥정당(興政堂)은 1928년 광운사(光雲寺)로 이건하였으며, 황학정(黃鶴亭)은 1923년 사직단 뒤로 옮겨졌다. 흥화문(興化門)은 1932년 이토오히로부미를 위하여 짓던 절, 박문사(博文寺)의 북문으로 쓰였으며 최근까지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경희궁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경희궁 자리에는 1910년 일본인 자제를 교육하는 경성중학교(옛 서울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 일제는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을 경희궁 근처로 잡고 통감부 중학교를 경희궁 터에 세우고 지형도 높은 곳은 깍고 낮은 곳은 메꿔 버리는 등 그 만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들의 만행은 1922년 6월에는 경희궁의 동편에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부지로 25,500평을 떼어냈고 1927년에서 1928년에는 경희궁 남쪽 도로를 확장하면서 일부를 도로로 편입시킨다. 거기에 건물들은 대부분 매각 시켜 버리고 만다. 중학교 교실로 사용되던 숭정전(경희궁의 정전)은 1926년 3월 일본불교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에 매각 이건 되었다. 대내 정전인 회상전은 1911년 임시소학교 교원양성소의 교실과 기숙사로 그리고 편전인 흥정당은 1915년 소학교 교실로 사용되다 1928년 용산의 광운사로 팔려나갔다. 이렇게 1920년대를 지나면서 경희궁의 건물들은 완벽하게 소멸되고 만다.
경희궁에는 부속건물로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학문, 황학정이 있었는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졌다. 나머지 건물은 1910년 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진 글이 남아있다. 공터 북쪽에 돌로 쌓은 축대의 길이는 약 100m로 건물로 오르는 계단에는 용머리조각과 구름무늬가 있어 주목된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이다.
1617년(광해군 9) 경희궁을 창건할 때 세운 대궐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우진각지붕을 씌운 단층 기와건물이다. 평면은 4개의 기둥을 4줄로 배열하였으며 중앙칸의 고주(高柱) 사이에 중앙문과 협문을 두었고 문인방 위에는 전방(箭枋)을 설치하였다.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두었으며 그 위에 공포(拱包)를 구성하였다. 건물 내부의 가구(架構)는 보·마룻보·마룻도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우물천장으로 되어 있고 지붕마루에는 취두·용두·잡상 등이 장식되어 있다. 숭정전(崇政殿)·황학정(黃鶴亭)과 함께 경희궁의 건축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원래는 현 구세군건물에 위치하였으나 1932년 이토오히로부미를 위하여 짓던 절, 박문사(博文寺)의 북문으로 쓰였으며 최근까지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경희궁으로 옮겨왔다.
그러니까 이 흥화문은 원래위치도 아니고, 복원된것도아닌 새로지은 문이란 뜻이다.
이문이 여느궁궐의 정문과는 달리 2층이 아니라 단층인 까닭은, 정식왕국이 아니라 이궁(離宮)이었기 때문이다.
창덕궁과 창경궁,덕수궁도도 이궁이었지만, 경복궁이 불탄후론 정궁으로 쓰였었다.
경희궁 본래의 모습으로, 노란 타원안의 건물만이 현재 존재하고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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