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궁(宮),당(堂),루(樓),정(亭)

창덕궁 후원의 정자 (亭子)

메탈 2008. 11. 21. 19:46

창덕궁에 후원이 조성된 것은 태종 때에 이궁(離宮)으로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거의 비슷한 때에 비롯되었다. 이후로 창덕궁 후원은 점차 원역(苑域)을 넓혀 나가고 원내에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궁궐의 후원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으며 특히 왕이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한 세조조에 크게 궁장(宮墻)을 넓히고 새로운 연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후원은 한때 황폐를 면치 못하였으며 광해조(光海朝)에 들어와 다시 옛 모습을 찾게 되었고 인조 연간(年間)에 많은 정자들이 세워지고 옥류천(玉流川)을 새로이 파고 주변에 정자를 만들게 되어 조선왕조의 가장 규모가 크고 풍치가 가장 돋보이는 궁원으로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창덕궁 후원은 옛 기록에 후원(後苑) 외에 후원(後園) · 북원(北苑) · 북원(北園) · 금원(禁苑) 등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일제 때에는 비원(秘苑)이라고 불리었으나 왕조실록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불리어진 명칭이 후원이었다.[註] 따라서 이 곳은 근대에 비원이란 명칭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최근에 이르러 일반적으로 후원으로 칭하게 되었다.

 

창덕궁의 후원은 크게 네구역으로 나누어 볼수가있다.

부용지(芙蓉池), 애련지(愛蓮池), 반도지(半島池) 그리고 옥류천(玉流川) 이다.

 

우선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진선문과 뒤에 숙장문이다.

 

 

동궐도(東闕圖)

본궁인 경복궁 동쪽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것으로, 크기는 가로 576㎝, 세로 273㎝로 16첩 병풍으로 꾸며져 있다. 오른쪽 위에서 비껴 내려 보는 시각으로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두 궁의 전각과 다리, 담장은 물론 연꽃과 괴석 등 조경까지 실제와 같은 모습으로 선명하고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배경이 되는 산과 언덕에 대한 묘사는 중국 남종화의 준법을 따르고 있으나, 건물의 표현과 원근 처리에 있어서는 서양화 기법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또 다른 그림도 똑같은 형식과 기법, 크기를 하고 있으나 채색을 하고 검은 글씨로 건물의 명칭을 써 넣은 점이 다르다.
그림에 들어있는 건물들의 소실여부와 재건된 연대 등으로 짐작하여 순조 30년(1830) 이전에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두 점의 그림은 회화적 가치보다는 궁궐 건물 연구에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평면도인 궁궐지나 동궐도형보다 건물 배치나 전경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어 고증적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국보 제249호

 

숙장문을 지나 앞으로가면 후원가는 길이고, 먼저 부용지에 다다르게된다.

 

부용지(芙蓉池)

창덕궁 부용지 일대는 조선후기 궁궐 후원의 백미로 꼽힌다.
낙선재에서 중희당 터를 지나 북쪽으로 고개길을 넘어가면 부용지 일곽을 중심으로 드넓은 창덕궁 후원이 펼쳐진다.

현재 부용지 입구는 그 창덕궁 후원의 초입에 해당한다. 이곳에서부터 창덕궁 후원이 시작되며 후원의 곳곳에는 수많은 정자각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부용지를 중심으로 바라볼 때 북쪽에는 2층 규모의 웅장한 주합루가 높은 단위에 조성되어 있고, 남쪽에는 아담한 부용정이 부용지에 발을 담고 있다.

또한 서쪽에는 돌기단 위에 영화당이, 그 반대편에는 이곳 부용지의 유래를 말해주는 사정기비각과 서수 모양의 석루조가 보인다. <동궐도>에 의하면 1820년대 무렵의 부용지 일대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현재의 모습과 거의 흡사함을 알 수 있다.

부용지는 가로 29.4m 세로 34.5m 이며, 네모난 연못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인 우주관을 구현한 것이다.

부용지의 물은 땅에서 솟아오른다. 원래 부용지에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세조 때 이곳에서 4개의 우물을 찾았는데 이를 마니, 파리, 유리, 옥정이라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그후 숙종 16년(1690)에 네 우물을 정비하고 이를 기념하여 비를 세우고 사정기비각을 건립했다고 한다. 사정기비각 부근에 석루조를 만들어 물을 끌어오기도 했는데, 오얏꽃 문양을 양각한 것으로 봐서 현재의 석루조는 순종대에 이르러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용정 쪽 장대석에는 물을 박차고 오르는 물고기의 역동적인 모습이 양각되어 있다. 이 물고기를 통해 상징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는 '잉어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 용이 된다'는 등용문 설화의 상징이다. 이곳 영화당 앞마당에서는 실제 과거시험이 치뤄졌던 만큼, 과거에 급제해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잉어가 용이 되는 것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고기가 양각되어 있는 장대석 맞은편에 위치한 어수문은 곧 등용문에 비유된다. 어수문 문설주에 투각되어 있는 황룡과 청룡은 잉어가 등용문을 올라 용이 됨을 암시한다고 한다. 궁궐의 문설주에 용을 새겨넣는 장식하는 예가 없음을 볼 때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물고기와 물의 관계'로 비유되는 군신관계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신하들 역시 왕의 뜻 안에서 뜻을 펼치고 활약을 하라는 의미이다. 한편 영화당 상량문에서는 "어수(魚水)를 즐김은 명랑(明朗)한 신하를 만나 같은 덕은 구함"라고 쓰여 있다.

 

부용정(芙蓉亭)

<궁궐지>에 따르면 부용정은 숙종 33년(1707) 건립되었다. 당시의 이름은 택수재(澤水齋)였으나, 정조 16년(1792)에 현재의 부용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정조 19년(1795)에 정조임금이 이곳 부용정에 대신들과 그 가족들을 초청해 시를 읊고, 주연을 베풀면서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부용정 내부는 모두 마루로 되어 있으며, 부용지에 두 발을 담고 있는 형상으로 누마루를 뽑았다. 이곳의 마루가 제일 높게 조성되어 있어, 아마도 왕이 여기에 앉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용정과 부용지 일대는 한국의 전통 정원 가운데 승경이 매우 뛰어난 곳으로, 18세기 이후 궁궐 후원의 백미로 손꼽힌다.

밖에서 볼 때 부용지와 부용정 일대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지만, 부용정 안에 앉아 창문을 활짝 열면 부용지 일대의 자연풍광이 또한 병풍처럼 펼쳐지며 부용정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정면 3간, 측면 4간되는 "+"자형 평면을 기본으로 하여 이익공 형식에 겹처마이며, 합각을 형성한 팔작 지붕 모양이다.

 

 

 

 

 

 

주합루(宙合樓)
<궁궐지>에 의하면 규장각은 정조 즉위년(1776)에 이곳에 세워져 처음엔 어진을 봉안했다고 하며, 주합루는 규장각의 위층에 있고 주합루 현판은 정조의 어필이라고 적고 있다.
현재 부용지를 내려다 보며 웅장하게 지어져 있는 2층 건물에는 주합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주합루는 이층 누마루를 가르키는 것이고 1층은 규장각이다.

규장각은 정조가 탕평책을 추진하던 무렵 세운 기구이다. 숙종 때 왕실 족보 등을 보관하는 작은 건물이었으나 정조 때 이르러 그 규모도 커지고 기능과 역할이 확대된 것이다.

즉 규장각은 정조 당시 국내외 도서들을 모아 왕립 도서관의 역할은 물론, 인재를 등용해 국가정책 연구와 왕의 비서실 역할까지를 담당했던 기구로 발전시킨 것이다.

궁궐의 후원은 단지 휴식기능만 갖춘 것이 아니라 국정업무수행을 위한 생산적인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기에 이곳은 이토 히로부미가 연회장으로 활용하는 등 왜곡과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곳 규장각 소장 도서는 일제시기 경성제국대학으로 이전되었으나, 다행히 일본으로 반출되지 않고 현재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주합루, 규장각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수문을 지나야 한다. 어수문은 일주문 형태로 화려한 단청이 돋보인다. 신하들은 어수문 옆 작은 협문을 통해 들어갔으며, 왕은 이곳 어수문을 통해 규장각에 들어갔다.

<동궐도형>을 보면 어수문 양 옆으로 꽃나무 가지를 틀어 만든 '취병(翠屛)'을 아담한 담장 처럼 둘렀으나 지금은 찾아 볼 수 없고 어수문과 협문만 남아 있다.

정면 5간, 측면 4간 모두 기둥 밖으로 난간을 둘렀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에 겹쳐마 양식이다.

 

 

 

 

 

서향각(書香閣)
서향각은 주합루 서쪽에 위치해 있다. 서향각이란 전각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책을 보관하고 관리하던 규장각의 부속건물로 주로 쓰였다.
<궁궐지>에 의하면 한때 임금의 초상인 어진(御眞)을 이곳에 모시기도 했다고 한다. 서향각 현판 안쪽에 별도로 '친잠권민(親蠶權民)'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에서 '누에치기'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정면 8간, 측면 3간의 초익공집으로 겹처마이며 팔작지붕이다.

 

사정기비각. 

 

영화당(暎花堂)
부용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궁궐지>에 의하면 어느 해에 지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숙종 18년(1692) 퇴락한 것을 다시 고쳐서 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곳은 역대 왕들이 연회를 베풀기도 했지만, 군사훈련을 참관하거나 활쏘기도 행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당은 과거시험을 보던 과장으로 유명했다.

현재 영화당 앞 동남쪽 일대는 창경궁과 경계를 나누는 담장이 쳐져있지만 예전에는 탁 트인 넓은 공간이었다. 그 앞에 춘당지(春塘池)가 펼쳐져 있다.

현재의 춘당지는 물론 오늘날 창경궁 춘당지에 해당하지만, 일제때 왜곡변형되어 옛날의 춘당지 모습과는 사뭇 다름을 <동궐도>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춘당대는 춘당지와 인접해 지금의 영화당 앞 화장실과 매점이 있는 넓은 마당 일대를 말한다. 이곳 춘당대에서 왕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과거시험이 행해졌던 것이다.

완판본 춘향전(春香傳)에서도 이도령이 장원급제할 때 과제가 '춘당춘색고금동(春塘春色古今同)'으로 제시되고 있어, 영화당 앞 춘당대의 과거시험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지금의 춘당대에 서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춘당대의 봄빛은 예나 지금이나 같건만 춘당대는 창경궁을 경계로 담장에 막혀있고, 춘당지의 모습 또한 더 이상 옛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궁궐지>에 의하면 영화당 현판은 정조의 어필이었다고 한다. 또한 선조, 효종, 현종, 숙종의 어필들이 모두 이곳 영화당에 편액으로 걸려있었다고 한다. 영화당은 정면 5간, 측면 3간 이익공 형식에 팔작 기와지붕이다.

 

 

 

 

 

 

부용지를 뒤로하고 조금 이동하면 불로문이 나오고 애련정이다. 

 

 

애련정(愛蓮亭)
불로문을 지나 연경당을 향하다 보면 우측에 커다란 사각형의 연못이 보이고, 그곳에 두 발을 담고 있는 아담한 정자가 하나 보인다. 바로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이다.
<궁궐지>에 의하면 숙종 18년(1692)에 애련정을 지었다고 한다. 애련정은 작지만 매우 간결하고 격식있게 지어졌다.

애련정은 낙양창을 두었는데 애련정의 난간 마루에 걸터앉아 이 낙양창을 액자삼아 애련지와 창덕궁 후원을 바라보면, 마치 화려한 낙양창에 담긴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는 듯 하다.

애련정의 낙양창이 창덕궁 후원의 자연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애련지 서쪽 연경당에서 물을 끌어오는 입수구도 일품이다.

넓은 판돌을 우묵하게 만들어 낙수물을 떨어뜨리게끔 하여 마치 작은 폭포를 연상케 해 그 정취를 한껏 더하고 있다.

<동궐도>에 의하면 애련정 옆에 어수당이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빈터만 남아 있다. 애련정과 관련해서는 숙종의 '어제기'와 정조가 지은 '애련정시(愛蓮亭詩)'가 전하고 있다.

애련정은 정면 1간, 측면 1간 이익공 겹처마에 사모지붕으로 되어있다.

 

금마문 옆 담장을 지나면 한 장의 돌로 만든 문에 전서체로 불로문(不老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통바위를 깎아서 만든 불로문.

이 불로문은 <동궐도>에도 그 모습이 똑같이 나와있지만 주변 풍경은 예전의 모습과 사뭇다르다.

<궁궐지>에 의하면 원래 불로문 앞에는 불로지(不老池)라는 연못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다.

불로문은 커다란 판석을 통째로 'ㄷ' 자 모양으로 깍고 다듬어서 세워놓는데 불로문 문짝은 없어졌지만 돌쩌귀를 박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이 문을 통과하면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불노장생의 뜻을 담고 있어 도교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불로문 안으로 들어서면 의두합과 기오헌이다.

기오헌(奇傲軒)
영화당을 뒤로하고 후원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금마문(金馬門)이 나온다. 금마문을 들어서면 단청을 하지 않은 두 채의 작고 소박한 건물들을 볼 수 있다.
그중 한 채가 기오헌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다. 순조 년간인 1820년대 무렵에 제작된 <동궐도>를 보면 현재의 모습과 똑같은 이 두 채의 건물이 서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각각의 명칭이 이안재와 운림거로 표기되어 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이곳은 순조 27년(1827) 고쳐짓고 의두합(倚斗閤)이라 했다고 한다.

현재는 기오헌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는 이 건물이 순조년간과 헌종년간을 거쳐 이안재에서 의두합으로 이름을 바꿔 왔던 것이다. 현재의 기오헌은 순조의 왕세자 효명세자가 독서를 하던 곳이다.

기오란 뜻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한 구절에서 따왔으며, 효명세자가 지은 '의두각십경시(倚斗閣十景詩)'가 전해오고 있다. 기오헌 뒤편 가파른 언덕을 올라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주합루 뒤편 제월광풍관에 이른다.

누마루 한 칸을 뽑은 기오헌의 좌향은 북쪽이며, 정면 4간,측면 3간의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농수정 (濃繡亭)
정면, 측면 각 1칸의 단층 사모기와지붕을 한 익공(翼工)집 정자이다. 연경당(演慶堂) 뒷문의 오른쪽 동산에 위치하였다.
장대석(長臺石) 기단(基壇) 위에 사다리꼴 초석 위에 방주(方柱)가 서 있고 주간 사면에는 벽이 없이 완자무늬 사분합이 달렸다. 가구(架構)는 애련정과 같으면 정자기둥 밖으로 쪽마루를 깔고 법수(法首)가 있는 조그만 난간을 돌렸다. 앞면과 측면은 출입을 위하여 난간을 끊어 석계(石階)와 통하도록 하였다. 지붕 정상에 절병통을 두었으며 원래부터 시채(施彩)는 없었던 듯하다. 정자의 전면으로는 작은 마당을 두고 돌난간을 설치하였는데 그 아래의 경사지는 바로 선향제(善香齊)의 후면이 된다. 이 부분은 무사석(武砂石)의 작은 돌로 화계(花階)를 꾸미고 그 사이에 돌계단을 설치하였다.  

 

 

 

 

큰길을따라 안으로 더 들어가면 반도지가 나온다.

 

관람정(觀纜亭)과 반도지(半島池)
1827년 무렵 제작된 <동궐도>를 살펴보면 이곳 관람정과 반도지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현재의 반도지 일대에 네모난 2개의 연못과 가운데 조그만 섬을 조영한 둥근 연못 1개가 그려져 있을 뿐이다. 물론 관람정과 같은 정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1908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형>에는 현재의 모습과 동일한 형태로 되어 있는 관람정과 반도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현재의 관람정과 반도지 일대는 고종연간에 다시 조성되고 건립된 것으로 추측될 따름이다. 관람정의 형태는 매우 특이하다. 부채꼴 모양의 평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람정 주변의 반도지 또한 호리병 모양의 곡수지로 형성되어 있어 특이하다. 이는 얼핏 한반도 모양을 뒤집어 놓은 것 같아 반도지라고도 불리운다.

그러나 반도지의 모습을 그저 전통적인 정원양식 중 특이한 예로만 바라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더 많다. 반도지의 모습이 한반도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일제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던 조성시기의 정황으로 볼 때, 옛날 고구려 등 광대한 만주일대의 민족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 축소된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일제의 숨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정원 양식에 반도지와 같은 곡수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반도 모양을 한 곡수지 형태는 처음이라는 점에서 이 부분은 더욱 그렇다.

부채꼴 모양을 한 관람정 또한 일찍이 건축양식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재까지는 유일한 형태다.

때문에 대부분의 건축학자와 조경전문가, 그리고 역사학자들은 일제의 영향력이 증대되던 당시에 이곳 반도지와 관람정이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관람정과 반도지의 아름다운 풍경 그 이면에는 이처럼 석연치 않은 구석들이 많다는 것이다. 한편 1908년무렵 마지막으로 편찬된 <궁궐지>에 의하면 관람정을 '선자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부채꼴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관람정은 6개의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고 그중 4개의 기둥이 반도지에 발을 담그고 있다. 바닥은 널마루를 깔고 지붕은 홑처마에 우진각 지붕으로 되어 있다.

 

관람정과 존덕정이 보인다.

 

 

관람정 뒤로 승재정이 보이고...

 

 

 

존덕정(尊德亭)
관람정을 지나 홍예를 두르고 하엽동자를 두어 격식있게 지어진 작은 돌다리를 건너면 오른편에 육각형 모양의 겹지붕으로 된 존덕정이 보인다.
헌종년간에 편찬된 <궁궐지>에 의하면 존덕정 옆에 반월지가 있었고, 인조 22년(1644)에 건립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원래 육면정으로 불렀으나 나중에 존덕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아울러 그 남쪽에는 일영대를 두어 시각을 재었다는 기록도 보여 해시계를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숙종이 존덕정과 관련한 친필 시 등을 존덕정에 걸기도 했으며, 선조와 인조의 어필 등이 이곳 존덕정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헌종연간의 존덕정 현판은 현종의 어필이었다고 한다. 존덕정의 내부는 매우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되어 있다.

육모정의 가운데는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황룡과 청룡이 희롱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이 정자의 격식이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존덕정 북쪽 창방에는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제목의 글이 나무에 빽빽하게 적혀 있다. 글을 요약해 소개하면 '이 세상의 모든 냇물들이 밝은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의 달은 오직 하나 뿐이다. 그 달은 곧 내 자신이고 냇물은 너희들이다. 따라서 너희들이 내 뜻대로 따르는 것이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에 맞는 것' 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 글을 지은 사람은 '만천명월주인옹' 곧 정조임을 알 수 있다. 정조의 자신감 넘치는 국정운영과 강력한 왕권을 펼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인 것이다.

정조는 이와 같은 글을 짓고 신하들에게 받아 쓰게 한 후 나무판에 새겨 곳곳에 걸어두었는데 그 중 하나가 여기에 걸려 있는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존덕정은 <동궐도>에도 유사하게 그려져 있어 현재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짐작케 해준다. 존덕정의 주초석 2개가 존덕정 옆 연못에 발을 담고 있는데, 이 연못의 물이 아래쪽 반도지로 흘러들게 되어 있다.

존덕정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겹처마형식으로 되어 있다.

 

 

 

 

폄우사
폄우사의 건립연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곳 폄우사에서 느끼는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정조의 '폄우사사영(폄우사四詠)'이 <궁궐지>를 통해 전해지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1800년 이전에 이미 폄우사가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궁궐지>에 따르면 정조가 죽고 그의 손자이며, 훗날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가 정조의 '폄우사사영'을 읽고 이에 경의하며 다시 시를 지어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20년대에 제작된 <동궐도>에 보면 지금과 똑같은 모습의 폄우사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현재의 모습과 한 가지 다른 점은 폄우사 정면 1칸에 직각으로 담장을 두어 맞배지붕 형식의 세 칸 짜리 건물과 이어져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폄우사는 건물의 이름에서 보여지듯이 활쏘기를 연마하며 군자의 덕을 닦던 곳으로 여겨진다.

낮은 장대석 외벌 기단 위에 정면 3간 측면 1간의 홑처마에 초익공 양식이며 맞배지붕에 풍판을 쳤다. 동쪽 1간은 낮은 누마루를 깔고 나머지 두간은 온돌로 되어있다.

 

 

승재정(勝在亭)
폄우사에서 남쪽으로 올라가면 약간 가파른 언덕에 정자가 있는데 이것이 승재정이 있다.
승재정은 연경당 뒷편 농수정과 꼭같은 모습으로 매우 격식 있게 지어졌다.

이곳에서 내려보면 관람정 일대가 모두 눈에 들어온다. 두벌의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1간 측면1간의 익공양식에 겹처마이며 사모지붕이다.

 

 

 

가을의 끝자락을 느끼며 옥류천으로 향한다.

 

옥류천에서 얕은 오르막을 오르다보면 언덕위에 정자가 또하나 보인다. 

 

취규정이다.

 

취규정(聚奎亭)
존덕정 일대를 지나 후원의 깊숙한 북쪽 옥류천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옥류천으로 내려가는 길가에 취규정이 놓여 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인조 18년(1640)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또한 <동궐도>에도 마찬가지로 지금의 모습과 꼭 같은 취규정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정면 3간 측면1간의 익공양식의 홑처마에 단층 팔작지붕이다.

 

 

취규정 주위의 풍경.

 

 

취규정에서 아래로 내려선다. 

 

옥류천(玉流川)
<궁궐지>에 의하면 이곳 옥류천은 인조 14년(1636) 가을에 돌을 뚫어 샘물을 끌어들여 바위 둘레를 돌아 정자 앞에 떨어뜨려 폭포로 삼았다고 한다.
현재 옥류천 바위에는 옥류천(玉流川)이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인조의 어필이다.

또 바위에는 오언절구의 시가 적혀 있는데 이는 숙종이 지은 시를 1670년에 새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폭포수 삼 백 척을 날아 흘러(飛流三百尺) / 아득히 구천에서 내려오누나(遙落九天來) / 보고 있노라니 문득 흰 무지개가 일어나고(看是白虹起) / 일만 골짜기에 우뢰 소리 가득하다(○成萬壑雷)"

<동궐도>에도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옥류천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 넣었다.

재미있는 것은 옥류천 바위에 새겨진 숙종의 시 또한 <동궐도>에 세필(細筆)로 써놓아 그 느낌과 감흥을 기록화 속에서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옥류천의 정자들이다. 

 

취한정(翠寒亭)
취규정을 뒤로하고 길가 오른편 아래쪽으로 나 있는 작은 길을 따라 내려가면 이곳이 곧 옥류천 일대다.
이곳 옥류천 일대에는 여러 정자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 첫 번째 만나는 정자가 바로 취한정이다.

<궁궐지>에 의하면 건립연대를 알 수 없으며, 소요정 동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곳 역시 숙종이 지은 '취한정제영'이라는 시가 전해지며, 이것에 감응한 정조의 시가 또한 전해지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1720년 이전에 취한정이 이미 건립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동궐도>에서도 옥류천 주변의 취한정을 볼 수 있는데 규모는 같지만 지금처럼 3칸이 모두 마루구조로 뚫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 왼쪽 1칸은 창호를 내고 벽체로 마감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면3간 측면 1간으로 홑처마의 팔작지붕이다.

 

 

 

뒤에서 바라본 취한정. 

 

옥류천 바위뒤로 청의정이고, 태극정, 소요정 순으로 보인다.

 

 

소요정(消遙亭)
취한정을 지나 옥류천 바로 앞에서 옥류천을 바라 볼 수 있도록 지어 놓은 정자가 바로 소요정이다.
소요정 옆으로는 옥류천에서 내린 물줄기가 흐른다. <궁궐지>에 의하면 인조 14년(1636)에 건립하였으며, 처음에는 탄서정(歎逝亭)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보인다.

소요정은 창덕궁의 정자들 중에서 비교적 소박한 축에 속하지만, 소요정 만큼 역대 국왕들이 가장 아끼며 즐겨 찾던 정자도 없었던 것 같다. <궁궐지>에 따르면 소요정과 관련된 역대 왕들의 시가 전하는데 숙종, 정조, 순조 임금 등이 각각 시를 남겼다고 한다.

또한 <소요정기>에 의하면 '옥류천 일대의 승경이 모두 소요정에 모아졌다'며 소요정의 승경을 극찬하기도 했다.

소요정에서는 왕이 신하들과 어울려 주연을 베풀어 유상곡수를 즐기며 소요정의 정취를 극찬하기도 했다고 한다. 성종, 선조, 인조의 어필로 된 글귀 등을 이곳에 걸기도 했다고 한다.

정면 1간,측면 1간의 사모정으로 익공양식이며 홑처마에 사모지붕이다.

 

 

 

옥류천 바위

소요암(逍遙巖)이다.

바위에 둥근 물길과 폭포를 내어 감상을 하는곳이다.

소요암에는 인조의 玉流川이라는 어필 위에 숙종의 오언절구시가 새겨져 있다.

 

飛流三百尺  폭포는 삼백척인데
遙落九天來  멀리 구천에서 내리네
看是白虹起  보고 있으면 흰 무지개 일고
飜成萬壑雷  골짜기마다 우뢰소리 가득하네

 

 

태극정(太極亭)
청의정 맞은 편에 있는 정자가 태극정이다. <궁궐지>에 의하면 인조 14년(1636)에 건립했으며, 옛 이름은 운영정(雲影亭)이었는데 태극정으로 바뀌었다고 적고 있다. 정조가 '태극정시(太極亭詩)'를 남겨 태극정의 정취를 노래했으며, 선조의 어필로 된 글귀를 걸었다고 한다.

현재는 평지 위에 세벌의 장대석 기단을 쌓고 다시 안쪽으로 외벌의 기단을 쌓아 이곳에 태극정을 지었만, <동궐도>에 보면 태극정 옆에 연못이 조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의 주변 모습과는 조금 달랐던 것이다. 연경당의 농수정, 승재정과 유사한 형태의 정자형태로 되어 있지만 초석이나, 기둥, 난간 등이 낮아 상대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진다.

정면 1간 측면 1간의 익공형식에 겹처마 사모지붕이다.

 

 

 

청의정(淸漪亭)
옥류천 주변의 정자 중에서 유일하게 초가지붕으로 만들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청의정이다.
<궁궐지>에 의하면 청의정은 인조 14년(1636)에 건립했다고 한다.

또한 정조가 친히 '청의정시'를 지어 청의정에서 느낀 아름다운 정취를 노래했으며, 선조의 어필로 글귀를 써 걸기도 했다고 한다.

청의정 주변에는 서너평 가량의 작은 논을 둘러쳐 있는데, 여기서 벼를 심고 그 볏짚으로 지붕을 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궐도>를 보면 이보다 조금 큰 규모로 논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청의정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면 특이한 물건을 발견할 수 있는데, 땅에 박혀 있는 팔각형의 작은 석물이다. 팔각형의 석물 가운데는 둥근 홈이 파져 있고 검게 그을려 있어, 이곳에 차(茶)를 끓여 마시기 위해 차 주전자를 올려 놓은 일종의 화로가 아닌가 추정된다.

 

 

 

 

농산정(籠山亭)
농산정은 옥류천 주변의 정자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구성도 특이하다.
평면도를 보면 방 2칸, 마루 2칸, 부엌 1칸의 5칸 건물로 행랑채와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다.

이는 왕이 신하들과 옥류천에 들러 주연을 베풀 때 다과와 음식 등을 마련하던 용도로 쓰인 것이 아닌가 추정케 한다.

한편 <동궐도>에도 농산정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있는데 농산정 입구에 꽃나무 가지 등으로 담장을 쌓은 취병을 두른 모습이 지금과 다르다.

또한 특이한 것은 취병으로 입구에 아치형 홍예를 둘러 퍽 운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는 취병으로 만든 담장과 입구 등이 모두 남아 있지 않다.

낮은 외별대 기단 위에 정면 5간 측면 1간의 맞배지붕이며 전면과 후면에 각각 툇마루를 달았다.

 

 

수북히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걸어기다 보면, 또하나의 정자를 발견할수있다. 

 

청심정이다.

 

청심정(淸心亭)
청심정은 폄우사 북쪽과 취규정 남쪽 사이 숲 속에 자리하고 있어 일반인들이 좀처럼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다.
현재는 취규정 옆으로 난 숲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찾을 수 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청심정은 숙종 14년(1688)에 천수정(淺愁亭)의 옛터에 건립되었다고 하다.

또한 청심정 바로 앞 뜰에는 빙옥지(氷玉池)라는 못을 팠으며, 남쪽으로 태청문(太淸門)을 두었으며, 동쪽에는 협곡수가 있어 홍예교를 놓아 통로로 삼고 왕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청심정 주변의 모든 것들은 없어지고 빙옥지의 흔적만 일부 남아 있다. 즉 청심정 앞에는 돌로 만든 수조와 돌거북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돌 거북의 등에는 '어필 빙옥지(御筆 氷玉池)'라고 쓰여 있어, 왕의 어필을 돌에 새겨 넣었음을 알 수 있다. 청심정 역시 이곳에서 자연을 완상하고 예찬했던 역대 왕들의 시가 전하는데 숙종, 정조, 순조 등이 그들이다.

청심정의 서쪽에는 빙천이 있고, 이곳의 물은 다른 곳의 물과 합수되어 연경당 장락문 앞으로 흐른다고 한다.

외벌대의 장대석 위에 정면 1간 측면 1간의 홑처마에 사모지붕으로 되어 있다.

 

 

 

 

가을의 끝자락이나마 붙잡은것 같아 다행이다.

 

 

능허정 하나만은 들리지 못했다.

능허정은 자유관람에서만 가볼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