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정(錦江亭)
종 목 : 문화재자료 제24호 (영월군)
명 칭 : 금강정(錦江亭)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면적 : 1동
지 정 일 : 1984.06.02
소 재 지 :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78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영월군
관 리 자 : 영월군
상 세 문 의 : 강원도 영월군 문화관광과 033-370-2100
금강정은 조선 세종 10년(1428) 김복항이 세웠다고 전해오나, 영월제영에 따르면 이자삼이 영월군수로 있을 당시 금강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신의 재산을 들여 정자를 짓고 금강정이라 하였다고 한다. 숙종 10년(1684)에 송시열이 이곳에 올라 금강정기를 썼다고 한다.
금강정의 규모는 앞면 4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금강정 정면이다.
앞쪽은 금강이 흐르고...
금강정 옆에 각종 비석이다.
관풍헌 및 자규루 (觀風軒 및 子規樓)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26호 (영월군)
명 칭 : 관풍헌 및 자규루 (觀風軒 및 子規樓)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면적 : 4동
지 정 일 : 1971.12.16
소 재 지 :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984-3및 984-1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영월군및보덕사
관 리 자 : 영월군
상 세 문 의 : 강원도 영월군 문화관광과 033-370-2100
관풍헌은 조선시대 지방의 업무를 처리하던 관청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는 조계종 보덕사에서 포교당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곳에서 약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규루라는 누각이 있다.
세조 2년(1456) 6월 28일,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홍수 때문에 이곳으로 옮겨와 머물던 중에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가지고 온 사약과 공생(貢生) 화득(禍得)의 교살에 의해 1457년 10월 24일 사사된 곳이라고 한다.
자규루는 단종(재위 1452∼1455)이 세조(재위 1455∼1468)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을 때 잠시 지내던 곳이다. 단종은 이 누각에 자주 올라가 자규시를 지었다고 한다. 자규란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운다고 하는 소쩍새를 가르키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견주어 지은 것이다. 원래는 세종 10년(1428) 군수 신권근에 의해 지어져 ‘매죽루’라 불리웠으나 단종의 자규시가 너무 슬퍼 누각이름을 매죽루에서 자규루로 바꿨다고 한다. 그 후 많이 퇴락해 민가가 들어섰는데, 정조 15년(1791)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이곳을 돌아다니다 그 터를 찾아 복원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며, 옆면에서 볼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관풍헌건물이다. 3채가 연결되어 있었다.
복원은 하였지만, 주변건물때문인지 그 역사에비해 초라해 보였다.
좌측건물.
가운데 약사전건물.
그리고 우측에 관풍헌이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된 관풍헌은 현재 보덕사의 약사전으로 이용되고 있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한국전쟁 이후 아무도 관리하지 않던 이 건물을 보덕사에서 맡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관풍헌’이라고 쓰여 있어야 할 곳에는‘약사전’이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 있고, 후대에 다시 만든 것으로 보이는 ‘관풍헌’ 편액은 오른쪽으로 빗겨나 있었다. 그 이전 시기인 일제 시대에는 영월 군청이 입주해 있었고, 그 뒤에는 영월중학교가 이 건물을 이용했다고 하니, 관풍헌이 이 자리를 잃은 것은 꽤 오래된 셈이다. 건물 모양새만은 일반 절집과 달리 조선초기의 객사(客舍) 형태, 즉 가운데에 중심 건물을 두고 양쪽으로 한 단씩 낮은 건물을 두는 형식을 그대로 취하고 있다.
소쩍새를 보며 시름을 달랬을 단종. 일견 남은 생을 조용히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역사의 소용돌이는 스스로 멈추지 않았다. 그의 넷째 작은아버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복위운동을 펼치다 발각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단종이 세조에게 밀려난 이후 경상도 순흥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금성대군은, 지역의 선비들을 모아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경상도 순흥은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과는 소백산맥 하나로 막혀 있을 뿐 거리가 지척이었다. 뿐만 아니라 적잖은 군사를 거느리는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까지 가담시킴으로써 복위 선포만 하면 민심을 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치밀하지 못했던 계획은 발각될 수밖에 없었고 이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몰고 왔다. 금성대군 자신뿐만 아니라 단종까지도.
길가에서 바라본 자규루.
안쪽으로 들어가니 뒤쪽에 매죽루란 현판이 걸려있었다.
정면의 자규루 현판.
<장릉지(莊陵誌)>는 소쩍새의 피 토할 정도의 울음소리에 자신의 애달픈 처지를 견준 단종의 <자규사(子規詞)>를 전하고 있다.
月白夜蜀魂 달 밝은 밤 두견새 울 때
含愁情依樓頭 시름 못 잊어 누대 머리에 기대어 앉았노라
爾悲我聞苦 네 울음소리가 하 슬퍼 내 듣기도 괴롭구나
無爾聲無我愁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잊으련만
寄語世上苦勞人 세상에 근심 많은 이들에게 이르노니
愼莫登春三月子規樓 부디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
관풍현과 자규루는 단종의 비애를 가득안은 곳이다.
영월군은 좀더 주위환경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그곳에 갔을때 들리는 얘기는, 주위의 상가를 영월군에서 매입해서 복원에 힘쓴다는 소리를 들었다.
매우 잘하는 일이다. 역사가 바로 미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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