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4호
명 칭 : 부여성흥산성(扶餘聖興山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51,398㎡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산1-1
시 대 : 백제
소 유 자 : 국유 및 사유
관 리 자 : 부여군
성흥산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石城)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백加)가 쌓았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으므로 가림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남문이다.
양쪽이 옹성의 형태를 이루고있다.
왼쪽옹성은 서쪽 성곽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동문으로 이어진다.
옹성위로 큰 느티나무가 서있다.
기단부는 옛것이지만 나머지는 새로 복원한것을 알수있다.
남벽. 서문으로 이어진다.
동문이 보인다.
성흥산성 느티나무. 꽤 유명한 나무다.
동문으로 가는도중에 왼편으로 우물이있다.
물은 말라있었다.
우물뒤로 유금필장군 사당이다.
그 뒤에 정자가 있는데, 요새만든 콘크리트 건물이다.
이곳에는 김종필씨의 영향력이 큰 모양이다.
다시내려와 동문으로 가는도중 뒤돌아본 남문의 느티나무,
동문이다.
안쪽모습.
밖의모습.
문이있던 자리.
다시 길을따라 서문쪽으로 향한다.
아쉽게도 성곽의 흔적은 볼수 없었다.
동문 옹성너머로 보이는 남문 느티나무.
그냥 오솔길 같다.
저 가운데있는것이 우물터다.
왜 백제성인데 나당연합군 우물이라 했을까? 그들이 이 우물을 팠나?
우물을 지나 작은 언덕을 넘는다.
언덕을 넘어 뒤돌아보니, 성곽의 흔적이 조금 있다.
게속 길을 따라간다.
밑으로 성곽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
다시 언덕을 오른다.
뒤 돌아본 모습.
언덕을 넘으니, 다시 언덕이 나오고...
성곽의 흔적은 거의 없었다.
지나온 길이다.
저 언덕을 넘으면 서문이다.
서문.
하니만 둥그런 흙언덕이외에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다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간다.
길 아래쪽에 보이는 성곽흔적.
이흔적이 남벽이다.
무너진 흙더미속에 간신히 보이는 성곽돌.
언덕을 오른다.
옛성곽돌위에 보수한 성곽.
언덕을 넘자 남문이 보인다.
이부분만 성곽이 유일하다.
남문 느티니무에 도착이다.
복원된 남벽.
충혼사를 바라보며 내려선다.
성흥산성은 이렇듯. 험준한 암벽을 뚫고 올라야한다.
스카이뷰
남문과 동문..그리고 복원된 남벽일부를 제외하면 산성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백제 동성왕 23년(501)이라고하는, 확실한 연대를 알수있는 성이기에 그 보존가치또한 크다고 할수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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