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고양 북한산성 (北漢山城)1 : 대서문-동장대

메탈 2008. 6. 16. 22:24

종    목 : 사적  제162호 
명    칭 : 북한산성(北漢山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543,795㎡ 
지 정 일 : 1968.12.05 
소 재 지 :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1외 서울 은평구,성북구,강 
시    대 : 삼국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서울시, 고양시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때 한성의 관망을 위해 도성을 축조하고, 그 방어 효과를 높이기 위해 삼각산에 산성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북한산성이란 이름은 ≪삼국사기≫에 백제 개로왕(蓋鹵王) 5년(132)에 이미 나타나고, 신라는 이곳의 비봉(碑峰)에 진흥왕(眞興王)이 순수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진평왕(眞平王) 25년(603)에는 고구려 장군 고승(高勝)이 북한산성을 포위 공격하자 왕이 1만명의 군사로 구원한 기록이 있고, 661년에는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함께 북한산성을 20여일간 포위 공격하자 성주이던 동타천(冬陀川)이 성안의 주민 2, 800명과 함께 필사의 결전으로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북한산성은 오늘날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북한산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한산성(漢山城) 즉 한산 지역의 북쪽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한편 11세기 초 거란의침입이 있자 고려 현종(顯宗)은 고려 태조의 재궁(梓宮)을 삼각산에 옮겨왔다. 고종(高宗)19년(1232)에는 삼각산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으며, 우왕(禑王) 13년(1387)에는 삼각산에 중흥산성(重興山城)을 쌓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의 외곽 산성을 마련하자는 축성론(築城論)이 일어나 효종 10년(1659) 송시열(宋時烈)에게 명하여 수축하게 하고, 숙종37년(1711))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해 4월에 착수한 이 공사는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3군문이 담당하였고, 그 아래 각 군문에는 책임 감독관으로 낭청(郞廳)을 두었으며, 또 그 아래에 내책응(內策應)·외책응(外策應)·독책장(督策將)을 두었다. 공사별로 부석패장(浮石牌將), 축성패장(築城牌將), 수구패장(水口牌將), 운석패장(運石牌將), 치도패장(治道牌將)과 이장변수(泥匠邊首), 야장변수(冶匠邊首), 석수변수(石手邊首), 목수변수(木手邊首) 등으로 공사를 감독하도록 하였다. 축성에 필요한 노동력은 3군문의 군사는 물론 서울의 주민과 승려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 모역군(募役軍)과 각종 공장(工匠)이 동원되었다. 서울의 주민은 경상가(卿相家) 이하 각 호(戶)를 대·중·소로 구분하여 대호는 3명, 중호는 2명, 소호는 1명씩 식량을 지참하고 취역에 나섰으며, 모역군은 한 달에 쌀 9두와 면포 2필씩이 지급되었다. 이때 이룩된 것이 오늘날의 북한산성이다.

 

약 6개월에 걸쳐서 완성을 보게 된 북한산성의 성기(城基)는 보현봉·만경대·백운대·원효봉·대서문·의상봉·증취봉·나한봉 등을 연결하는 선으로 길이는 모두 7, 620보, 즉 21리 60보가된다. 그 중에서 수문(水門) 북변에서 용암(龍岩)까지의 2, 292보는 훈련도감이, 용암 남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 821보는 금위영에서, 수문 북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507보는 어영청에서 각각 담당하여 쌓았다. 성문은 모두 13개로 수문 북변에서 용암까지 사이에 수문(높이16척, 폭 50척), 북문(높이 11척, 폭 10척), 서암문(西暗門, 높이 7척, 폭 7척), 백운봉암문(높이 6척 3촌)이 있고, 용암 북변에서 보현봉까지 사이에 용암봉암문(높이 6척 5푼, 폭 7척 5푼), 대동문(大東門, 높이 9척, 폭 10척), 보국문(輔國門, 높이 6척 6촌, 폭 6척 5촌),대성문(大成門, 높이 13척, 폭 14척)이 있으며, 수문 남변에서 보현봉까지 사이에 대서문(大西門, 높이 11척, 폭 13척), 청수동암문(높이 7척, 폭 7척), 부왕동암문(높이 9척, 폭 8척), 가사당암문(높이 7척, 폭 7척), 대남문(大南門, 높이 11척, 폭 11척)이 있었다.

 

축성이 끝난 후 숙종 38년(1712) 10월에 이르러서는 북한산성의 주관부서로 경리청(經理廳)을 설치하고, 여기에 도제조와 제조관을 두었다. 행궁(行宮)의 수호ㆍ관리는 관성장(管城將)이 맡았으며, 수성장병(守城將兵)으로는 대성문ㆍ동문ㆍ 서문에 수문장 각 1인과 갑사둔(甲士屯), 점암둔(點岩屯)에 둔장 각 1인을 배치하였고, 수첩군관(守堞軍官)은 266인, 별파진(別破陣) 200인, 아병(牙兵) 635인이 항상 거주하였다. 그 후 영조 23년(1747)에는 총융청(摠戎廳)으로 하여금 관리토록 하였고, 이듬해에는 상원봉(上元峰) 아래에 130칸의 행궁과 140칸의 군창(軍倉)을 지었다. 성내에는 승군(僧軍)을 위한 136칸의 중흥사(重興寺)가승군 총섭(摠攝)이 있는 곳이었고, 이 밖에도 11개의 사찰과 2개의 암자가 있었다. 성안에는 8개소의 창고가 있었으며, 99개소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 성 안의 면적은 200여만평으로, 성벽은 아직도 잘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 성곽의 여장은 허물어졌으나, 현재 대서문이 남아 있고 장대지(將臺址)·우물터·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시설의 일부가 남아 있다. 1990년부터 훼손된 동장대·대남문·대성문·대동문·보국문과 성곽들을 보수·복원하여 거의 완공 단계에 있다.

 

산성입구에서 포장도로를 따라올라가니 대서문이다. 08시. 

 

오늘의 코스는 대서문에서 의상봉-용출봉-용혈봉-증취봉-나월,나한봉-문수봉-대남문-대동문-보국문-대동문 그리고

동장대-용암문-위문-북문-원효봉-시구문으로 능선을따라 12성문을 돌 계획이다.

 

동국여도의 북한산성.

 

대서문 -  의상봉(義相峯) 서북쪽 해발 150m 높이의 낮은 구릉지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서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인 동시에 북한산성의 정문(正門)이다. 지금의 문루(門樓)는 1958년에 당시 경기도 지사였던 최헌길이라는 분의 주도로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대서문 문루에 올라, 바로 성곽을 타고 오른다.

 

바깥쪽은 높아서 내려갈수가 없었다.

 

허물어진곳이 있어 내려가봤더니, 여장은 무너졌지만 성곽은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가파른 언덕을 성곽이 따라올라간다.

 

의상봉 암벽까지 이런상태로 성곽이 연결되어 있었다.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오른다.

 

뒤돌아보니 아래에 출발점인,대서문 지붕이 보이고....

 

의상봉 거대암벽밑까지 성곽이 이어져있다.

 

의상봉에 오르니, 백운대와 만경대가 아침역광아래 보인다. 그 사이에 위문이있다.  09시.

 

망원렌즈 당겨보니, 산성계곡사이로 중성문이 보인다.

아쉽게도 오늘일정에 중성문은 제외다.

 

가야할 용출봉과 용혈봉,증취봉, 그뒤로 희미하게 문수봉이 보이고...가뫼님은 어느새 저기까지...

 

망원렌즈 당기니 가사당 암문이 보인다.

 

의상봉에서 조금내려오니, 성곽이 다시 시작된다.

 

여장만 무너졌을뿐, 성곽자체는 양호한 편이다.

 

 

드디어 가사당 암문이다.

의상봉(義相峯)과 용출봉(龍出峯) 사이 산능선 해발 488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서 부근 산성안에 국녕사(國寧寺)가 있다고 하여 국녕문(國寧門) 또는 국령사암문(國靈寺暗門)으로도 불리웠다.

※ 암문(暗門)이란 노출을 꺼리는 출입통로로 출입문위에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출입 할 수 있도록 만든 문이다. 성안에 필요한 병기 및 식량등을 운반하고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극비리에 구원을 요청하거나 적을 역습할 때 이 통로를 사용한다. 참고로 현재 북한산성에는 모두 7개의 암문(暗門)이 남아있다.

 

여닫이 문을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의상봉에서 내려온 성곽. 5-6단정도 높이로 사람키는 넘는다.

 

바깥쪽 모습이다. 여장만 새롭다.

 

암문위에서 바라본 용출봉.

 

무너진 여장위로 길이다.

 

가파른 용출봉을 오른다.

 

백운대와 만경대.

 

반대편으로 동장대다.

 

용출봉에 오르니 의상봉과 그밑에 가사당암문이 보이고....

 

 

앞쪽엔 용혈봉과 증취봉, 그너머로 나월,나한봉..그리고 문수봉...

 

용출봉에서 용혈봉까지 낮은곳엔 어김없이 성곽이 시작된다.

 

커다란 자연암봉이 끝나는곳부터는 성곽이다.

 

 

용혈봉서 가뫼님과...용출봉을 배경으로...

 

뒤로는 지나온 의상봉과 용출봉.

 

증취봉까지도 자연암봉이 끝나는곳엔 성곽이 이어진다.

 

 

여장은 무너졌어도...

 

바깥쪽에서보면, 계곡을 메운 성곽이다. 무척 높았다.

 

간혹 여장도 보이는데, 이건 지나가던 사람들이 세운것 같다. 엉성하기 짝이없다.

 

증취봉은 정상부터 성곽이 이어진다.

 

성곽이 가파르게 내려간다.

 

바깥쪽에서보니 성곽이 그리높지는 않으나, 잘 보존되어있었다.

 

 

부암동암문 근처에서는 높이가 높다.

 

안쪽모습.

 

부암동암문이다.10시 45분.

나월봉(蘿月峯)과 증취봉(甑炊峯) 사이 산 능선 해발 521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의 7개 암문(暗門)중 가장 규모가 크고 정식 홍예(虹霓)는 아니지만 위쪽 성돌을 둥글게 파서 홍예문(虹霓門)처럼 만든 아름다운 성문이다. 최근까지 성문 우측에 '소남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듯이 이 암문(暗門)은 처음에는 소남문(小南門)으로 불리웠던 것으로 추정되며 근처에 원각사(圓覺寺)가 있었기 때문에 원각사암문(圓覺寺暗門)이라고도 불리우기도 했다. 그리고 부왕동(扶旺洞)이란 이름은 성안 동쪽에 있는 부왕사(扶旺寺)로 내려 가는 계곡 일대를 일컫던 이름으로 보인다.

 

 

 

 

나월봉의 가파른곳까지 성곽이 이어진다.

 

 

거대 자연암반을 제외하면 성곽은 끊이지를 않는다.

 

정교하게 쌓인 성곽이다.

 

 

나월봉에 오르니.인수봉이 가운데 보인다.

 

니월봉에서 나한봉까지 성곽이 이어지고...

 

 

나한봉에 이르니 715m무명봉이 보이고, 그뒤로 문수봉이다.

 

무명봉까지도 성곽이 잘 이어져있었다.

 

 

 

무명봉에서 바라본 지나온 능선들.

 

무명봉에서 청수동암문까지 성곽이 이어진다.

 

 

청수동암문. 12시.

문수봉(文殊峯)과 나한봉(羅漢峯) 사이 해발 694m 에 위치한 성문으로 산성주능선과 의상능선 그리고 비봉능선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있다.

 

 

청수동암문은 아예 자연화강암을 깎아만들었다.

 

 

문수봉암봉에 이어진 성곽.

 

문수봉에서 바라본...황매산의 황포돗대바위.

 

대남문 너머로, 잘 복원된 성곽이 보인다.

 

대남문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남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처음 축조 당시는 문수봉암문(文殊峯暗門)으로 불리웠던 성문이다. 해발 715m 의 보현봉(普賢峯)과 해발 727m 의 문수봉(文殊峯)이라는 두 거봉을 잇는 해발 663m 능선 한가운데 안부(鞍部)에 위치 해 있다.

 

밖에서 본 모습.12시 15분.

 

잘 다듬어진 여장을 따라 언덕을 오른다.

 

언덕을 넘자, 또다른 세계다.

 

언덕 아래 대성문.

보현봉(普賢峯)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성 능선 해발 625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서 가장 큰 문이다. 원래 처음에는 소동문(小東門)으로 불리우는 작은 암문(暗門)이었으나 성문 위치가 문 북쪽 기슭 행궁(行宮)이 있는 곳에서 이곳을 통과하여 제봉과 보토현(輔土峴-현재 북악터널 위쪽)을 경유하여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편리한 코스에 위치하고 있어서 임금이 이문을 출입하게 됨으로써 뒤에 성문을 더욱 성대하게 개축하여 임금이 출입하는 성문으로 위용을 갖추고 이름도 대성문(大城門)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안쪽모습이고...

 

 

바깥쪽모습.

 

 

뒤돌아보니 성곽라인이 멋지다.

 

형제봉과 북악산.

 

이어서 보국문이다.

정확한 본래 이름은 동암문(東暗門)으로 대동문과 대성문 사이의 해발 567m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 아래에 보국사(輔國寺)가 있었다고 하여 지금은 보국문(輔國門)이라 불리우고 있다.

 

안쪽모습.

 

 

보국문옆에있는 옹성.

 

옹성너머로 칼바위다. 정릉으로 이어지는길이다.

 

옹성바깥쪽은 높지가않다.

아마도 이곳높이가 높아서 그런가보다.

 

이곳은 안과 밖의 높이가 거의 같앗다.

 

 

그러다 대동문으로 내려가면서, 자연스레 바깥쪽이 높아진다.

 

대동문이다.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동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우이동 진달래능선이 끝나는 해발 54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의 문은 1993년에 문루(門樓)를 갖추는 등 화려하게 복원되었다.

 

 

대동문에서 동장대로 오른다.

 

동장대와 만경대 그리고 인수봉.

 

이곳은 외벽이 높았다.

 

동장대. 2시 10분.

 

원래 3개의 장대가 있었다는데, 현재는 동장대만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