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서른살이 되던 해에 고려가 멸망하자, 선비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70여명의 고려 유신(遺臣)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버렸다.
두문동의 고려 유신들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풀 뿌리와 나무 껍질로 연명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고 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갖은 방법으로 이들을 설득했으나 끝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는데, 흔히 말하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결국 태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협박하기에 이르고,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고려 유신들은 충절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등지고 백성을 외면하는 것 역시 배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황희가 조선 조정에 홀로 출사(出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성계의 간청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입구다.
이문을 들어가면 방촌영당, 반구정,앙지대등이 있다.
방촌영당
종 목 : 시도기념물 제29호 (파주시)
명 칭 : 황희선생영당지(黃喜先生影堂址)
분 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사우
수량/면적 : 일원
지 정 일 : 1976.08.27
소 재 지 : 경기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산127
시 대 : 조선
소 유 자 : 사유
관 리 자 : 황어연
상 세 문 의 : 경기도 파주시 문화관광과 031-940-4352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청백리의 대표격인 황희(1363∼1452)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영당이 있던 곳이다.
황희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했으며, 세종(재위 1418∼1450)대에는 영의정이 되어 왕을 도와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삶을 통한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문종 2년(1452) 황희가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세조 1년(1455)에 유림들이 그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영당을 짓고 영정을 모셨다.
이 영당은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62년에 후손들이 복원한 것으로,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에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다. 내부에는 중앙에 영정을 모셨으며, 전퇴(건물의 앞쪽에 다른 기둥을 세워서 달아 만든 칸)는 개방되어 있다. 건물 주위로는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입구에는 솟을삼문이 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 경모제가 영당 바로옆에 있었다.
단청이 없어 소박하다.
경모제앞에 반구정과 앙지대가 있었다.
반구정(伴鷗亭)
종 목 : 문화재자료 제12호 (파주시)
명 칭 : 반구정(伴鷗亭)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면적 : 1동
지 정 일 : 1983.09.19
소 재 지 : 경기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190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황어연
관 리 자 : 황어연
상 세 문 의 : 경기도 파주시 문화관광과 031-940-4352
반구정이 있는 문산읍 사목리로 방촌이 만년에 갈매기를 벗 삼아 보내던 곳이고, 반구정(伴鷗亭)은 임진강 가의 기암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어, 아래로는 임진강의 푸른 물이 굽이쳐 흐르고, 곁에는 송림이 울창하여 예부터 갈매기가 많이 모여 들었다 한다. 편액(扁額)이 처마 밑에 걸려 있는데, 이름하여 '伴鷗亭', 곧 '갈매기와 짝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정자 이름도 멋지거니와 글씨 또한 멋이 넘치는 명필이다.
황희는 86세에 벼슬에서 물러난 뒤 이 곳에다 정자를 세워 낙하정(洛河亭)이라 이름하고, 강물 위에 날아다니는 흰 갈매기를 벗 삼고 시를 읊으면서 여생을 보냈다 하며, 사후에 없어진 것을 4백년이 지난 뒤에 후손이 다시 세우고 그 뜻을 따서 '반구정'이라 이름 짓고 중수, 보존하여 오다가, 6.25사변 때 불에 타서 없어진 것을 1967년 6월 사방 4간 규모로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한다. 이곳의 밑에는 파란 임진강이 굽이쳐 유유히 흐르는데, 날씨가 좋으면 강 건너 북쪽으로 멀리 개성의 송악산이 눈 앞에 다가선다고 한다.
앙지대(仰止臺)
앙지대는 반구정이 있던 원래 위치에 세워진 정자다. 1915년 반구정을 현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현위치에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라고 이름하였다.
앙지문 상랑문에 '오직 선(善)만을 보배로 여기고 딴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이 앙지대라는 이름은 시경의 호인(好仁)아라는 뜻으로 취했다" 라고 적고 있다.
앙지대는 육각지붕인데, 반구정은 사각지붕이다.
철조망에 막혀있는 임진강.
그나마 여기마저 통제되지않은것에 위안을 삼으며 반구정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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