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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화석정 (花石亭)

메탈 2008. 5. 11. 10:50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61호 (파주시) 
명    칭 : 화석정(花石亭)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면적 : 1동 
지 정 일 : 1974.09.26 
소 재 지 : 경기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100-1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파주시
상 세 문 의 : 경기도 파주시 문화관광과 031-940-4352 

 

율곡 이이(1536∼1584)가 자주 들러 시를 짓고 명상을 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으로,임진강이 굽어보이는 강가의 벼랑 위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세종 25년(1443)에 율곡의 5대 조부인 이명신이 처음 지었으며, 성종 9년(1478)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없어진 후 80여 년 동안 터만 남아있다가, 현종 14년(1673)에 율곡의 후손들이 다시 지었으나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졌다.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다시 짓고 1973년 정부의 유적정화사업 때 건물에 색을 다시 칠하고 주위를 정리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건물이다.

정자 안에는 ‘화석정중건상량문’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바로 밑을 흐르는 임진강을 굽어볼 수 있고, 난간에 기대어 보면 서울의 삼각산과 개성의 오관산이 아득하게 보인다.

 

 

 

 

 

 

본래 화석정은 이율곡의 5대조인 강평공 이명신이 세워 대대로 사용되어 왔던 정자였다. 이율곡은 여섯 살때 외가인 강릉에서 이곳 친가로 올라와서 이곳 화석정에서 수양을 했다고 전한다. 그가 여덟살에 지었다는 시가 지금도 화석정 안에 편액으로 걸려있다.


이처럼 한 가문의 소유물에 불과했던 화석정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율곡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팔년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문이다.
선조가 궁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갈 당시에 어가가 임진강 나루에 도착하니 뱃길을 잡을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인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이 때 피난길을 인도하던 문신 이항복이 미리 기름칠을 해두었던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 명령했으며 불타는 화석정을 등불로 삼아 임금과 백관, 호위 군졸을 태운 배는 무사히 강을 건너 피난할 수 있었다.
이 사실에 대해 율곡이 미리 왜놈의 침략을 예견하고 화석정에 기름칠을 해 두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화석정은 그 뒤 80년여 년이 지나 1673년(현종14) 이후지(李厚址) 등 율곡의 후손들에 의해 복원되었으나, 또 한번 6·25 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가 1963년 파주 유림들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화석정의 현판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쓴 글이다.

화석정 오른쪽에는 500년이 훌쩍 넘었을 법한 큰 느티나무가 정자에 그늘을 드리워주고 있다. 이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율곡선생님의 5대조 이명신이 심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화석정에 걸려있는 율곡의 시
林亭秋已晩 (임정추이만) / 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遠水連天碧 (원수연천벽) /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山吐孤輪月 (산토고륜월) / 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塞鴻何處去 (색홍하처거) /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숲 속 정자엔 가을 이미 깊은데 시인의 회포를 달랠 길 없도다.
저 멀리 강물은 하늘 맞닿아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타는 듯 붉도다.

먼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네.
아아,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처량한 울음소리 저녁구름 속에 그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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