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123호
명 칭 : 창경궁(昌慶宮)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 218,148㎡
지 정 일 : 1963.01.18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창경궁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1418년에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처음 지을 당시의 건물은 명정전·문정전의 정전과 수령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들의 침전이 있었으며, 양화당·여휘당·사성각 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궁궐중에서는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창덕궁과 함께 불에 탄 이후, 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다.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정전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홍화문(弘化門)
창경궁의 정문으로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동향이다. 조선 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광해군 8년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문을 지나면 옥천교다. 옥천교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溝) 위에 설치한 다리다. 조선 왕궁은 모두 명당수 위의 석교를 건너서 정전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졌다.1483년 조성되었다.
다리를 건너면 명전문.
이 문은 명정전을 둘러싼 월랑 중 명정전과 마주보고 있는 동월랑의 중앙부에 있으며, 창경궁의 외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명정문에서 바라본, 정문 홍화문의 뒷모습이다.
당당한 위용을 나타내고있다.
양쪽으로는 행각으로 둘러싸여있다.
행각내부로 보초나 장비또는 대기장소로 쓰인다.
행각문으로 나가면 뜰이다.
품계석과 삼도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 앞 내정에는 삼도 좌우로 품계석이 늘어서 있다. 중요한 의식 때 신하들은 조정에 모여 각자의 위체에 알맞은 자리에 서는데, 이때 신하들의 품계에 따라 기준점 구실을 하는 것이 바로 '품계석'이다.
임금을 중심으로 왼쪽 즉 동쪽에 있는 품계석은 문반이, 서쪽의 품계석은 무반이 서열에 따라 선다. 문반과 무반을 합쳐 양반이라 한다.
조정마당을 가로지르며 명정전에 이르는 삼도가 뻗어있는데, 삼도의 가장 넓고 높은 중간 부분이 어도로 임금님께서 이 길로 가마를 타고 지나갔다.
명정전
조선 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이 조성되고, 그 정전으로서 명정전이 세워졌다. 이때 명정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이었다. 이는 창경궁의 지세에 따른 것이다. 그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1616)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다른 궁의 정전과 같이 이중의 월대를 두어 그 위에 건물 기단을 마련하고, 큰 사각 주초 위에 원형의 운두 높은 주좌(柱座)를 조각하여 초석을 배열하였다.
행각이 궁을 둘러싸고있다.
빈양문
숭문당 북쪽에 연접되어 있는 이 문은 치조공간(외전)과 연조공간(내전)을 연결하는 통로의 개폐 기능을 갖는 문으로 명정전의 뒷면 중앙 어칸 앞으로 설치된 복도를 따라가다 이 문을 나서면 바로 내전으로 들어서게 되어
숭문당
이 건물은 조선 경종 때 건립되었으며, 순조 30년에 큰 불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崇文堂'의 현판과 '日監在玆'라 쓴 게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영조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영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酒宴)를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명정전 뒤편은 문정전,빈양문,숭문당으로 연결되어있어 복잡하다.
명정전에서 숭문당은 바로 옆이지만, 이처럼 지체높으신 왕을위해 복도식 누각이있다.
명정전안의 왕 집무실.
명정전에서 바라본 명전문.
품계석과 삼도가, 넓찍한 마당에 잘 나타나있다.
창경궁운 이처럼 행각으로 둘러싸여있으며 뒤쪽 명정전 뒤는 여러건물로 연결되어있다.
빈양문이다.
이문을 나서면 내전으로 나오게된다.
궁궐은 임금이 통치행위를 하는 공적인 공간과 임금와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사적인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공적인 공간으로서의 궁궐을 외전(外殿) 혹은 치조(治朝)라 하며 사적인 공간으로서의 궁궐을 내전(內殿)이라 한다.
1. 외전
정전과 편전이 외전의 대표다. 정전은 조하를 받는 곳이라 수하지소(受賀之所)라 하며, 편전은 일을 살피는 곳이라 시사지소(視事之所)라 한다. 관료들이 활동하던 궐내각사도 넓은 의미에서 외전에 포함된다. 빈청,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 등이 궐내각사에 해당된다.
창경궁의 외전은 정전인 명정전과 편전인 문정전, 숭문당을 말하며. 숭문당을 지나 빈양문(사진)이라는 문을 나서면 내전으로 이어진다.
2. 내전
임금이 머물며 잠을 자던 정침, 왕비의 생활공간인 중궁전, 임금의 모후나 할머니 등이 생활하던 대비전 및 후궁들이 머물던 공간 등이 내전에 속한다.
창경궁의 통명전, 환경전, 경춘전, 양화당, 영춘헌, 집복헌이 모두 내전에 해당된다.
창경궁은 창건 목적이 세 대비(정희,소혜,안순왕후)의 거처로써 지어졌으며, 또한 창덕궁이 정궁의 역할을 하였을 때 이궁으로써 보완의 역할을 하였기에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전이 발달하였다.
빈양문
소나무너머로 통명전과 양화당이 보인다.
함인정
이곳에는 원래 성종 15년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뒤로 환경전이보인다.
환경전
환경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다.
이 건물은 성종 1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다. 그 후 순조 30년(1830)의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그 3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곳은 창경궁의 한 내전으로 왕이 늘 거동하던 곳이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익종이 승하했을 때는 빈궁(殯宮)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경춘전
경춘전은 대비의 침전이다.
이 전각은 창경궁의 내전으로 성종 14년에 건립되었다. 그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에 재건하였으나, 순조 30년에 불탄 것을 그 3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경춘전과 환경전이다.
통명전과 양화당쪽으로 가본다.
통명전
통명전은 창경궁의 연조 공간으로 명정전 서북쪽에 있으며,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이다.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화재를 입었다.
숙종때는 장희빈이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묻어 인현황후를 저주하다 사약을 받았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에 중건된 것이다. 남향한 전면에는 월대를 두고 양모서리에는 청동제 드므를 놓고 그 북쪽에 외벌대 기단 한 단을 두어 건물을 세웠다.
연지
통명전 서온돌에서 내다본 연지의 모습.
연지는 샘물이 마당으로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인데, 샘물을 연못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성종 때 구리로 수통을 만들어 설치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사치스럽다는 신하들의 비판으로 구리수통을 철거하고 돌로 대치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통명전 옆에 양화당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 15년(1878) 철종비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세벌대의 장대석 기단 위에 각주(角柱)를 세우고 초익공계 포작(包作)을 짜았다. 기둥간에는 화반(花盤)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간결한 장식을 하였다.
양화당 옆에는 커다란 화강암이 있는데, 당시기술로는 파내지 못한것 같다.
그위에 계단을 놓았다.
영춘헌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集福軒)은 영춘헌의 서행각으로 초창 연대는 알 수 없다.
후궁의 거처였다.
집복헌
행각 바깥쪽으로, 창격궁은 행각으로 둘러져있다.
궁을 벗어나 성종 태실비로 향한다.
성종 태실비는 양화당의 동북쪽 구릉지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태실은 4각형의 지대석 위에 석종형(石鍾形)의 몸체를 놓고 8각형의 지붕돌을 얹었으며 상륜부(相輪部)는 보주로 장식하였다.
태실비는 태실 동쪽에 있는데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를 갖추고 있고 비신 앞면에는 "성종대왕 태실"이라 새겨져 있다. 이들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태를 묻은 곳인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에 있었던 것인데 1930년 5월 전국에 있는 조선 역대 임금의 태실을 대부분 서삼릉으로 이봉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성종은 세조 3년(1457) 덕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예종의 뒤를 이어 1469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뒤 25년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경국대전」의 반포 등 조선의 문물 제도를 완비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창경궁을 창건한 임금이기도 하다.
춘당지
춘당지는 1909년에 조성된 원지(苑池)이다. 두 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의 것이 1,107평방미터, 아래 것이 6,483평방미터이다. 연못 속의 섬(366평방미터)과 다리는 1984년에 조성한 것이다.
춘당지가 있는 이곳은 원래 연산군이 서총대(瑞총臺) 앞 대지를 파다가 중종반정으로 중단한 곳이다. 그 후 권농장(勸農場)의 논이 있었는데 연못으로 만들었다.
팔각칠층석탑
성종원년 1470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내전터
원래는 궁궐여성들을 위하여 여러 처소가있던 장소인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내전이 모두 사라졌다.
대온실
1909년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식물원이다. 건축 당시 한국 최대의 목조구조 식물원이었으며,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복원공사를 계기로 자생목본류를 중심으로 야생화와 함께 전시하고 있다. 현재 대온실은 2004년 2월 6일에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내전터가 산책로로 잘 만들어졌다.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궁에서 떨어질수록 수로가 좁고 다리도 간단했다.
외궁에서 떨어진곳의 돌다리
궁에 가까와질수록 다리규모가 커진다.
수로도 넓어지고...
행각에있는 다리다. 규모가 커졌다.
옥천교
과거 동물원과 유원지로 쓰였던 창경궁.
지금은 복원이 됐다고는 하지만, 그 많은세월을 말해줄수있는것이 나무말고는 무었이 있을까?
뒤에 선인문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곳이, 사도세자가 뒤주에 8일동안 갇혀 죽은 선인문 안뜰인가?
참으로 비정한 왕이고, 간사한 신하들이었다.
선인문 안쪽모습이다.
선인문을 끝으로, 조선시대 5대 궁궐의 하나인 창경궁답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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