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궁(宮),당(堂),루(樓),정(亭)

경희궁 (慶熙宮)

메탈 2008. 4. 28. 21:42

종    목 : 사적  제271호 
명    칭 : 경희궁지(慶熙宮址)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 101,221.5㎡ 
지 정 일 : 1980.09.16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126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서울역사박물관, 종로구

 

서궐(西闕)경희궁의 전신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경덕궁은 본래 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이 곳에 왕기가 서린다는 말을 듣고 광해군이 왕기를 없앤다는 뜻으로 광해군 9년(1617) 6월에 궁전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인경궁과 함께 공사가 진행된 관계로 재력의 소모가 막대하여 공사가 뜻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광해군은 궁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왕 15년 3월계해 반정(癸亥反正)으로 폐위되고 말았는데, 그 뒤 경덕궁은 인조가 인목대비를 받들어 일시 이 곳에 이어한 일이 있었고 그 후에는 역대 왕들이 수시로 이 궁에 거처한 일이 있었으므로 경덕궁은 왕궁의 하나로 손꼽힐 수있게 되었다. 그 후 영조 36년(1760)에 경덕의 궁명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동음이라 하여 이를 피하여 경희궁(慶熙宮)으로 고쳤다. 순조 29년(1829) 10월 경희궁은 화재로 인하여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순조 31년(1831)에 다시 중건 되었고 철종 10년(1859)부터 11년 사이에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다. 그 후 고종 초년 경복궁을 중건하고 법궁을 이어하자 경희궁은 빈 궁궐로 남게 된다. 관청의 필요에 따라 창고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시설은 유지되고 궁궐로서의 외양은 지키고 있었다. 광무 5년인 1901년에서 1904년 사이에는 당시 고종이 임어 하고 있던 경운궁과 연결하기위해 운교가 연결되기도 한 것으로 보아 경희궁은 광무연간까지 궁궐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고 있었다.

 

근세에 이르러 일제가 침략해 와서 한일합방이 체결될 무렵 경희궁은 숭정전(崇政殿), 회상전(會祥殿),  흥정당(興政堂),  흥화문(興化門) , 황학정(黃鶴亭)만이 남아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들어온 뒤로 숭정전(崇政殿)은 1926년 남산 산록에 이치(移置)되어 조계사(曹谿寺)의 본당으로 사용되었고, 흥정당(興政堂)은 1928년 광운사(光雲寺)로 이건하였으며, 황학정(黃鶴亭)은 1923년 사직단 뒤로 옮겨졌다. 흥화문(興化門)은 1932년 이토오히로부미를 위하여 짓던 절, 박문사(博文寺)의 북문으로 쓰였으며 최근까지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경희궁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경희궁 자리에는 1910년 일본인 자제를 교육하는 경성중학교(옛 서울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 일제는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을 경희궁 근처로 잡고 통감부 중학교를 경희궁 터에 세우고 지형도 높은 곳은 깍고 낮은 곳은 메꿔 버리는 등 그 만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들의 만행은 1922년 6월에는 경희궁의 동편에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부지로 25,500평을 떼어냈고 1927년에서 1928년에는 경희궁 남쪽 도로를 확장하면서 일부를 도로로 편입시킨다. 거기에 건물들은 대부분 매각 시켜 버리고 만다. 중학교 교실로 사용되던 숭정전(경희궁의 정전)은 1926년 3월 일본불교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에 매각 이건 되었다. 대내 정전인 회상전은 1911년 임시소학교 교원양성소의 교실과 기숙사로 그리고 편전인 흥정당은 1915년 소학교 교실로 사용되다 1928년 용산의 광운사로 팔려나갔다. 이렇게 1920년대를 지나면서 경희궁의 건물들은 완벽하게 소멸되고 만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경희궁에는 부속건물로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학문, 황학정이 있었는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졌다. 나머지 건물은 1910년 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진 글이 남아있다. 공터 북쪽에 돌로 쌓은 축대의 길이는 약 100m로 건물로 오르는 계단에는 용머리조각과 구름무늬가 있어 주목된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이다.

1617년(광해군 9) 경희궁을 창건할 때 세운 대궐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우진각지붕을 씌운 단층 기와건물이다. 평면은 4개의 기둥을 4줄로 배열하였으며 중앙칸의 고주(高柱) 사이에 중앙문과 협문을 두었고 문인방 위에는 전방(箭枋)을 설치하였다.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두었으며 그 위에 공포(拱包)를 구성하였다. 건물 내부의 가구(架構)는 보·마룻보·마룻도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우물천장으로 되어 있고 지붕마루에는 취두·용두·잡상 등이 장식되어 있다. 숭정전(崇政殿)·황학정(黃鶴亭)과 함께 경희궁의 건축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원래는 현 구세군건물에 위치하였으나 1932년 이토오히로부미를 위하여 짓던 절, 박문사(博文寺)의 북문으로 쓰였으며 최근까지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경희궁으로 옮겨왔다.

 

 

그러니까 이 흥화문은 원래위치도 아니고, 복원된것도아닌 새로지은 문이란 뜻이다.

이문이 여느궁궐의 정문과는 달리 2층이 아니라 단층인 까닭은, 정식왕국이 아니라 이궁(離宮)이었기 때문이다.

창덕궁과 창경궁,덕수궁도도 이궁이었지만, 경복궁이 불탄후론 정궁으로 쓰였었다.

 

 

흥화문을 들어서니 숭정문(崇政門)이다. 

 

숭정문안으로 숭정전(崇政殿)이 보인다.

 

복원되어서 무척 깔끔하다.

그만큼 아픈역사를 간직한곳 이기도 하다.

 

이렇듯 깨끗한것이 오히려 부담스럽다.

 

 

숭정전(崇政殿)이 보인다.

 

숭정전 (崇政殿)

이 건물은 경희궁의 정전(正殿)으로서 광해군 8년(1616)경에 건립되었다. 숭정전은 임금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고 정령(政令)을 반포하던 곳인 만큼 남향으로 놓였으며, 경희궁 내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게 지어진 장엄한 건물이었다. 건물주변에 4개의 출입문이 조성되어 있었다. 남에 숭정문(崇政門), 동남에 건명문(建明門), 동에 여춘문(麗春門), 서에 의추문(宜秋門)이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후전(後殿)인 자정전(資政殿)의 정문인 자정문(資政門)이 있었다. 주위에는 사방에 행각(行閣)을 두르고 앞뜰에는 돌을 깔고 품계석(品階石)을 세웠다. 2중 기단(基壇) 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춧돌을 앞면6개, 옆면5개 배열하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 가로 5칸, 세로 4칸 규모로 평면을 구성하였다. 순조 29년(1829) 경희궁의 대화재 때에도 숭정전은 피해를 면했다. 일제 강점기인 1926년 3월 지금의 동국대학교 자리로 이건(移建) 되었으며, 1976년 9월 동국대학교 안 정문 옆으로 이전되어 정각원(正覺院)이란 현판을 걸었다. 숭정전은 17세기의 궁궐 목조 건축 전형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창경궁의 명정전(明政殿)과 함께 조선중기의 목조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품계석과 삼도가 궁전임을 말해준다.

 

 

 

이 봉황이 새겨진돌 이야말로 역사를 말해준다...

 

숭정전의 집무실.

 

숭정전에서 바라본 숭전문.

삼도와 품계석이 가지런하다.

 

숭정전뒤에는 자정문이다.

자정문안으로 자정전이 보인다.

 

자정전(資政殿)

이 곳은 경희궁의 편전(便殿)으로서 1617~20년(광해군 9~12)에 건립되었다.

편전이란 국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경희궁에는 자정정 이외에 흥정당(興政堂)도 정사를 논하거나 경연을 여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자정전은 편전으로 지어졌지만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는 빈전(殯殿)으로 사용되었으며, 선왕들의 어진(御眞:초상화)이나 위폐가 임시로 보관되기도 하였다.

자정전은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지만 서울시의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을 통해 확인된 위치에 현재와 같이 복원되었다.

 

행각으로 둘러싸인 자정전.

복원된것이지만 조선 5대궁답게 위용이 있다.

 

자정문을 둘러싸고있는 건물들이다.

깨끗하게 복원된것으로 만족해야했다.

 

 

 

 

 

 

 

 

 

태령전(泰岺殿)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이다.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 곳을 중수하여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흔적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던 태령전을 서울시에서는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서암.

경희궁 터에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이용한 시설들도 많이 있었는데, 현재는 서암과 영렬천만이 그 흔적을 말해준다.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이다. 바위샘이라는 뜻을 갖는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샘이 그 속에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이 바위는 임금님 바위라는 뜻의 ‘왕암(王巖)’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곳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瑞巖)’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바위에 깎아 놓은 물길이 옛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드므 - 법전이 위치하고 있는 월대 위에 각 모서리에는 쇠솥처럼 생긴 것이 있다. 이것은 드므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궁궐의 건물들은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화재 발생시 주로 대화재가 일어나므로 불을 끌수 있는 소방수를 갖다 놓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정도 물을 갖고는 화재를 진압 할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의식용이다.

불귀신은 자기 얼굴이 얼마나 흉측하고 무서운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불귀신이 불장난을 치기 위해 법전으로 달려 오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게 되는데, 평소에 자기 얼굴을 모르고 있던 불귀신이 자기 얼굴에 놀라 도망간다고 한다.

 

 

 

조선왕조의 쇠락을 그대로보여주는 경희궁.

그 비극을 간직한채 쓸쓸히 서있는 경희궁을 나선다.

 

흥화문 밖의 도로가, 그나마 그당시의 분위기를 표현해주는듯하고...

 

금천교다.

원래 흥화문안에 있던것인데, 그위치가 그대로남아있었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들어서면 궁내의 전각에 들어서기 전에 흐르던 금천에 놓여진 돌다리이다. 난간의 돌짐승들이나 홍예 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은 대궐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궐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상징성을 띠는 것이다. 1619년(광해군 11)에 건립되었던 것을 일제가 매몰시켰지만, 서울시에서는 2001년 발굴을 통하여 발견된 옛 석조물을 바탕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구세군건물앞에있는 흥화문 표석.

 

밤의 모습도 나에게는 쓸쓸히 비춰진다.

 

조선의 5대궁의 하나인 경희궁.

하지만 경희궁은 그 존재를 알아보기가 어려울정도로 파괴되어 그 존재가 가장 약하다.

그나마 복원된것으로 그때의 모습을 느낄수밖에 없는것을, 기뻐해야하나, 슬퍼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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