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의 외곽 산성을 마련하자는 축성론(築城論)이 일어나 효종 10년(1659) 송시열(宋時烈)에게 명하여 수축하게 하고, 숙종37년(1711))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해 4월에 착수한 이 공사는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3군문이 담당하였고, 그 아래 각 군문에는 책임 감독관으로 낭청(郞廳)을 두었으며, 또 그 아래에 내책응(內策應)·외책응(外策應)·독책장(督策將)을 두었다. 공사별로 부석패장(浮石牌將), 축성패장(築城牌將), 수구패장(水口牌將), 운석패장(運石牌將), 치도패장(治道牌將)과 이장변수(泥匠邊首), 야장변수(冶匠邊首), 석수변수(石手邊首), 목수변수(木手邊首) 등으로 공사를 감독하도록 하였다. 축성에 필요한 노동력은 3군문의 군사는 물론 서울의 주민과 승려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 모역군(募役軍)과 각종 공장(工匠)이 동원되었다. 서울의 주민은 경상가(卿相家) 이하 각 호(戶)를 대·중·소로 구분하여 대호는 3명, 중호는 2명, 소호는 1명씩 식량을 지참하고 취역에 나섰으며, 모역군은 한 달에 쌀 9두와 면포 2필씩이 지급되었다. 이때 이룩된 것이 오늘날의 북한산성이다.
약 6개월에 걸쳐서 완성을 보게 된 북한산성의 성기(城基)는 보현봉·만경대·백운대·원효봉·대서문·의상봉·증취봉·나한봉 등을 연결하는 선으로 길이는 모두 7, 620보, 즉 21리 60보가된다. 그 중에서 수문(水門) 북변에서 용암(龍岩)까지의 2, 292보는 훈련도감이, 용암 남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 821보는 금위영에서, 수문 북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507보는 어영청에서 각각 담당하여 쌓았다. 성문은 모두 13개로 수문 북변에서 용암까지 사이에 수문(높이16척, 폭 50척), 북문(높이 11척, 폭 10척), 서암문(西暗門, 높이 7척, 폭 7척), 백운봉암문(높이 6척 3촌)이 있고, 용암 북변에서 보현봉까지 사이에 용암봉암문(높이 6척 5푼, 폭 7척 5푼), 대동문(大東門, 높이 9척, 폭 10척), 보국문(輔國門, 높이 6척 6촌, 폭 6척 5촌),대성문(大成門, 높이 13척, 폭 14척)이 있으며, 수문 남변에서 보현봉까지 사이에 대서문(大西門, 높이 11척, 폭 13척), 청수동암문(높이 7척, 폭 7척), 부왕동암문(높이 9척, 폭 8척), 가사당암문(높이 7척, 폭 7척), 대남문(大南門, 높이 11척, 폭 11척)이 있었다.
축성이 끝난 후 숙종 38년(1712) 10월에 이르러서는 북한산성의 주관부서로 경리청(經理廳)을 설치하고, 여기에 도제조와 제조관을 두었다. 행궁(行宮)의 수호ㆍ관리는 관성장(管城將)이 맡았으며, 수성장병(守城將兵)으로는 대성문ㆍ동문ㆍ 서문에 수문장 각 1인과 갑사둔(甲士屯), 점암둔(點岩屯)에 둔장 각 1인을 배치하였고, 수첩군관(守堞軍官)은 266인, 별파진(別破陣) 200인, 아병(牙兵) 635인이 항상 거주하였다. 그 후 영조 23년(1747)에는 총융청(摠戎廳)으로 하여금 관리토록 하였고, 이듬해에는 상원봉(上元峰) 아래에 130칸의 행궁과 140칸의 군창(軍倉)을 지었다. 성내에는 승군(僧軍)을 위한 136칸의 중흥사(重興寺)가승군 총섭(摠攝)이 있는 곳이었고, 이 밖에도 11개의 사찰과 2개의 암자가 있었다. 성안에는 8개소의 창고가 있었으며, 99개소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 성 안의 면적은 200여만평으로, 성벽은 아직도 잘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 성곽의 여장은 허물어졌으나, 현재 대서문이 남아 있고 장대지(將臺址)·우물터·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시설의 일부가 남아 있다. 1990년부터 훼손된 동장대·대남문·대성문·대동문·보국문과 성곽들을 보수·복원하여 거의 완공 단계에 있다.
단풍과 어우러진 북한산성을 빼놓을수 없어서 아침일찍 도선사로 향했다.
9시30분 주차장에서 위문으로 향한다. 아직 단풍이 눈에 보이네...
하루재.
취나드 B코스가 선명하다.
위문.
정확한 본래 이름은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으로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의 안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위문(衛門)이라 일컫고 있는데, 일제시대 때부터 그렇게 불리어 왔다고 한다.
백운대로 향하고...
이쪽은 만경대로 이어지는데, 여긴 장비없이 갈수가 없다.
안쪽.
만경대를 우회한다.
의상봉과 원효봉.
용암문에 다가간다.
용암문.
정확한 본래 이름은 용암봉암문(龍巖峰暗門)으로 무인대피소인 지금의 북한산장 부근 용암봉 기슭 해발 58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과거 이 일대의 수비를 담당하던 용암사(龍巖寺)가 부근에 있었다.
여기는 보수공사중이라 통제중이다. 할수없이 우회길로...
산장근처의 단풍.
드디어 성곽과 만난다.
곡장으로 이어지는 성곽.
곡장은 높은곳에 있다.
곡장에서 바라본 성곽.
동장대가 보이고...
성곽끝에 삼각산.
성곽을 따라간다. 옛성곽위에 여장이 새롭다.
보다시피 성곽높이는 그다지 높지않은데..산높이가 있어서 그럴것이다.
능선을따라 구불구불...
아늑한 성곽 능선길이다.
동장대다.
장대(將臺)란 성, 보(堡:작은 성), 둔(鎭 칠 둔), 수(戍:수루) 등의 동서에 쌓아 올린 장수의 지휘대인데, 북한산성에는 동장대(시단봉 위), 남장대(나한봉 동북쪽), 북장대(중성문서북)의 3개의 장대(將臺) 가 있고 지금은 그 중 크고,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동장대(東將臺)만 복원하여 놓았다.
다시 성곽을 따라간다.
바위가나오면 그 둘레에 성을 쌓았다.
이쪽위에서 바라보는 동장대와 삼각산이 멋진데, 막아놓았다.
우회하니 대동문에서 만난다.
대동문은 공사중.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동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우이동 진달래능선이 끝나는 해발 54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의 문은 1993년에 문루(門樓)를 갖추는 등 화려하게 복원되었다.
다시 능선을 따라가는 성곽.
가을속을 관통하는 성곽라인이다.
칼바위능선으로 가는길이있어, 성곽바깥쪽으로 나갈수 있다.
성곽이 그다지 높지않다.
치성의 모습.
보국문으로 이어지고...
급경사를 이루는 성곽.
보국문이다.
보국문에서 대동문으로 이어진다.
보국문에서 보이는 보현봉.
보국문.
정확한 본래 이름은 동암문(東暗門)으로 대동문과 대성문 사이의 해발 567m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 아래에 보국사(輔國寺)가 있었다고 하여 지금은 보국문(輔國門)이라 불리우고 있다.
다시 온 방향으로 돌아간다.
성곽안쪽 길도 좋다.
오늘 가을의 긑자락을 간신히 붙잡았다.
대동문 우회길.
동장대를 지나...
곡장도 지나고...
용암문 가는 길이다.
용암문.
가을의 마지막을 보는것 같다.
3시간 반의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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