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청도읍성 (淸道邑城)

메탈 2009. 8. 10. 17:02

종 목 : 시도기념물 제103호 (청도군) 
명 칭 : 청도읍성(淸道邑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6,570㎡
지 정 일 : 1995.01.14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동삼리,동천리 
시 대 
소 유 자 : 청도군
관 리 자 : 청도군
상 세 문 의 : 경상북도 청도군 문화관광과 054-370-6062

 

청도읍성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지은 성으로, 산성과 평지성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읍지』의 기록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1570보(1880m)이고, 높이는 5자 5촌(1.7m)이었다고 하나, 일제시대 때 읍성 철거정책에 따라 대부분이 헐리었고, 지금은 성벽의 바닥과 일부만이 남아있다. 성의 평면형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동·서·북쪽에 문터가 남아 있다.

 

청도읍성은 고려 때부터 있었으며, 당시에는 돌과 흙을 섞어 쌓은 것이었는데, 조선 선조 23년(1590)에 돌로 고쳐쌓아 선조 25년(1592)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 문화재청

 

주차장에 차를세웠다. 

 

안내도를 보면 다음과같다.

차를주차시킨곳은 1번 동문지 바로 옆이고, 복원된 성곽은 동문지에서 2번 북문까지다.

그리고 객사 도주관의 방향이 잘못 그려져있었다.

 

조선시대 여지도.

향교의위치가 지금과 다르다.

 

해동지도도 마찬가지.

 

동문지옆의 복원된 성곽앞에 놓여진 각종 비석들.

 

 

 

동문지에는 길이있어 끊겨진 상태다.

 

옛성곽을 살려 복원한 동쪽성곽.

 

동문지에서 끊긴 성곽.

 

성안쪽으로 내탁공법으로 되어있었다.

 

동문지흔적.

 

북벽과 동벽만나는곳의 치성.

 

치성에서 바라본 북벽.

 

북벽앞에는 연못이 있는데, 해자의 역할을 했을까?

 

치성뒤에 북원된 북문이보인다.

 

 

북문과 옹성.

 

옹성이다.

 

 

옹성에서 바라본 북문.

 

안쪽모습이다.

 

복원은 여기까지고, 도로때문에 끊겨있는 상태다.

 

나머지부분은 과수원으로 사용되고있어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옹성과 북문.

 

북문앞의 연못. 해자의 역할을 했을까?

 

북문 옹성 정면.

 

 

투박하고 단단한 모습이다.

 

옹성안에서 바라본 북문 공북루다.

 

다시 북쪽성곽을 따라간다. 

 

뒤돌아본 동문.

 

연못의 연꽃.

 

 

저 치성을 돌아서면 동벽이다.

 

동벽.

 

그리고 동문지.

 

동문 옹성의 흔적이다.

 

동쪽성곽은 기단부만 남아있는 상태다.

 

동문지와 옹벽의흔적. 앞의 연못은 해자의 흔적인지?

 

동쪽성곽.

 

도로때문에 끊겼다.

 

 

 

여기까지가 동쪽성곽이고, 남쪽과 서쪽은 과수원으로 사용되어, 잡목이많아 찾지못했다.

 

객사 도주관앞에오니읍성 안내도다.

 

도주관(道州館)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212호 (청도군) 
명 칭 : 도주관(道州館)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 1동
지 정 일 : 1985.12.30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15-10 
시 대 
소 유 자 : 청도군
관 리 자 : 청도군
상 세 문 의 : 경상북도 청도군 문화관광과 054-370-6062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청도군을 ‘도주’라고도 부른다. 객사 안에는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을 상징하는 위패에 절하는 곳인 정청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사신이 묵고 갈 수 있는 숙박시설로 되어있다.

 

1670년 경인 조선 현종 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정청은 화양면사무소로 사용되면서 바닥과 벽이 바뀌었다. 그러나 건물의 나머지는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관아터에는 지방업무, 민사소송을 보던 동헌이 남아 있으며, 이 건물 앞에는 역대 군수들의 선한 정치를 기린 비가 서있다. 또한 고종(재위 1863∼1907) 때 대원군이 외세침략에 대해 거부하는 의지를 새긴 척화비도 있다.

 

객사입구 

 

옆으로 들어갈수 있었다.

 

 

도주관 전경. 왼쪽은 새로지었다.

 

 

 

새로지은 건물.

 

 

 

옛건물.

 

 

 

청도척화비(淸道斥和碑) 

종 목 : 문화재자료 제109호 (청도군) 
명 칭 : 청도척화비(淸道斥和碑) 
분 류 :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 1기
지 정 일 : 1985.08.05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15-10 
시 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청도군
상 세 문 의 : 경상북도 청도군 문화관광과 054-370-6062

 

척화비란 조선 고종 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의 중요한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로, 이 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긴 돌을 이어 붙인 네모난 구역안에 서 있는 비는 머릿돌은 얹지 않은 간결한 구조이다. 비문에는 “서양오랑캐가 침략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으나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라는 강한 경고문구가 적혀 있다.

 

척화비는 고종 8년(1871)에 전국에 동시에 세운 것으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된 후 세계 각 나라들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이처럼 몇 기의 비들이 곳곳에 남아 그 속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청도향교(淸道鄕校)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207호 (청도군) 
명 칭 : 청도향교(淸道鄕校) 
분 류 :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향교 
수량/면적 : 8동
지 정 일 : 1985.10.15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 48 
시 대 
소 유 자 : 경북향교재단
관 리 자 : 청도향교
상 세 문 의 : 경상북도 청도군 문화관광과 054-370-6062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 선조 1년(1568)에 고평동에 세웠던 것을 영조 10년(1734)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 지었다. 화양향교라고도 부른다.

향교 내의 건물로는 사당 출입문인 내삼문, 사당인 대성전과 동·서무,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서재 등이 있다. 그런데 건물 배치 중 일반적으로 명륜당이 앞에 있고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가 아니라 대성전과 명륜당이 좌우에 놓여 있어 특이하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제사만 지내고 있다.

청도향교는 특이한 건물 배치를 가진 유서 깊은 향교이다.

 

 

문으로 들어가니 삼문이 보인다.

 

대성전이다.

보통은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과 강학을 하는 명륜당은 앞뒤에 일렬로 놓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향교에서는 대성전과 명륜당이 좌우에 놓여 있어서 독특한 배치를 하고 있으며 설총, 안유, 이황, 이이, 최치원, 이언적 등 유현 16분을 배향 하고 있다.

 

 

좌우로 동,서무

 

옆에는 명륜당으로 들어가는 누각이다.

 

사락루란 현판이다.

 

사락루로 들어가는 입구.

 

 

 

그 안에 명륜당이다.

 

좌우로 동,서재

 

최근에지은 건물로 관리사무소로 사용중이다.

 

청도읍성은 주위에 석빙고를 비롯하여 관아,객사,향교등이있고, 차로 10 여분거리에 와인터널까지있어 반나절이면 모두 둘러볼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