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302호
명 칭 : 낙안읍성(樂安邑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지
수량/면적 : 223,108㎡
지 정 일 : 1983.06.14
소 재 지 :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서·남내리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공유,사유
관 리 자 : 순천시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쌓았고,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성을 쌓아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성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 생활풍속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낙안 읍성은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것들 중 하나이며,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문화재청
낙안읍성 동문 낙풍루(樂豊樓)다.
1834년(순조4) 성균관 진사 김호언이 사비 1,400량을 들여 중건하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일제 식민 통치 하에서 관리 소홀로 인하여 퇴락하여 없어졌으며 낙안읍성 복원 사업이 추진되면서 1987년에 복원 하였다. 봄을 상징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다.
입구에는 오래된 장승들이 서있고...
조선시대 여지도에있는 낙안읍성.
서문에도 문루가 있슴을 알수가있고, 개거식 문이었슴도 알수가있다.
1872 지방도에는 세곳의 문이 평거식으로 나타나있다.
스카이뷰
해자위의 돌다리에는 개모양의 석구가 서있다.
우리 나라에서 개를 수호신으로 하는 곳은 그리 흔하지 않다. 일본의 경우 절이나 신사 입구에 돌로 만든 개를 세우고 고마이누(고려개 高麗犬)라고 부르는데, 이는 고려가 일본에 불법(佛法)을 전하면서 같이 보급시킨 것이라고 한다. 낙안읍성 동문밖에 있는 석구상은 이를 뒷받침하여 주는 중요한 유물이라고 보겠다.
옛부터 개는 집을 지키고 잡귀 잡신의 물리치는 영물로 여겨 왔다. 이곳 낙안읍성 동문 밖 평석교(平石橋)앞의 석구상은 원래 세 마리 였다고 전하는데 현재는 두 마리밖에 없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한 마리는 멸악산(지금의 오봉산)이 험준하고 산세가 강하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고자 세웠다고 한다.
석구상은 삽살개로서 자세히 보면 익살스럽기 그지없으며, 꼬리를 치켜세우고 볼기짝이 빨갛도록 용을 쓰며 앉아 있는 모습이 한없이 귀엽기만 하다. 구전에 의하면 정유재란 때 지금의 오봉산(옛 멸악산) 아래서 많은 왜군이 죽어 갔다고 하는데, 그 원귀가 고을을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세웠다고도 한다.
해자.
해자는 성곽 주변에 땅을 파거나 자연적인 지형 지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기능을 가진 성곽 시설물의 하나이다. 적의 침입에 장애가 되는 하천이나 바다 등을 이용한 자연적인 해자와 인공적으로 호를 파거나 고랑을 낸 인공 해자로 나눈다.
우리 나라의 해자는 삼국 시대부터 산성과 도성 등에서 자연적인 해자를 위주로 널리 이용되었는데 자연 이용이 곤란한 지역은 인공적으로 설치하였다. 해자 설치는 성벽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넓고 길게 그리고 깊이 파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성곽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도 시설이 되는 곳이 있는데 성밖에 있는 해자는 방어력을 높이는 것 외에도 지반(地盤)을 다지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이곳 낙안 읍성의 해자 역시 자연적인 냇물을 이용하여 일부는 인공적으로 설치한 절충형이라고 볼 수 있다.
각형의 옹성이다.
성곽의 길이는 1,410m, 높이 4∼5m, 넓이 2∼3m로서 면적 41,018평으로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호환(虎患)이 잦아 폐쇄하였다고 전하여 오고있다. 동문은 낙풍루(樂豊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또는 진남루(鎭南樓)라고 하고 서문은 낙추문(樂秋門)으로서 성문 정면으로 ㄷ자형 옹성(瓮城)이 성문을 외워 감싸고 있다. 여장엔 활을 쏠 수 있도록 사방 1尺정도의 총안(銃眼)=사구(射口)가 있고 이 총안 역시 근총(近銃)과 원총(遠銃)으로 나누어 있다. 또 여장이 타구(朶口)로 나뉘어 있고 성곽을 따라가면凸 형의 성곽이 있는데 이는 치성(雉城)이라고 한다. 당초 6곳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4곳만 남아 있다. (일부 복원함) 이 치성은 초소(망루) 역할을 했던 곳으로 좌우로 침입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축조되었다.- 읍성홈페이지
여장과 총안.
치성과 성곽.
안쪽에서 보니 개거식 문이다.
문안쪽으로 큰 길이있는데 곧장가면 서문이다.
대체적으로 길 오른편은 관헌이고, 왼편은 민가다.
돌담장으로 이루어진 민가.
가게도 보이고...파는물건들은 요즘 물건이다.
아담한 초가집.
객사다.
임금의 위패가 모셔져있고, 출장나온 관리가 묵는곳이다.
금전산과 객사정문.
객사 옆으로 관헌이다.
민초들이 언제나 불쌍해보인다.
매로 다스리니 말이다.
관헌옆에는 현감이 묵는 내아.
내아 전경.
관아앞에 낙민루다.
안내문에 의하면 낙민루는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호남의 대표적인 명루로서 유명하였다고 하나 한국전쟁 당시 불에 타 소실된 것을 1986년에 기존의 초석 위에 겹처마 팔각집의 누각형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기존의 초석 위에 지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원래의 자리에 원래의 크기로 지어진 것같으나 지금은 낙안읍성 안에 훼한 마당에 그것도 동헌 앞에 지어져 찾는 이도 별로 없는 쓸쓸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여순 병란 당시 좌익들에 의해 지서가 소실되어 낙민루 에서 임시 경찰 업무를 수행하던 중 6. 25가 나자 공산군들이 낙민루를 불태우고 말았다.
서문옆에있는 건물에 낙안읍성 모형이있다.
옛모습을 한눈에 볼수가 있었다.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반대로 서문쪽에서 바라본 모습.
서쪽 성곽이다. 얼핏보면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계단이 있다.
낙안읍성은 이런 계단이 무척 많았다. 아마 민가가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세종류가 있는데 문 근처에는 넓은계단, 그리고 중간계단, 이처럼 좁은 계단이다.
성곽위의 모습. 북쪽에서 이어지는 성곽.
서문과 서쪽성곽.
발굴된 각종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서문낙추문과 옹성.
성곽 의 서쪽에 위치한 문으로 낙추문(樂秋門)이라고 하며, 빈계재를 넘어 화순, 광주, 나주 등지로 가는데 이문을 지나갔다고 한다. 이 문의 의미는 가을을 상징하고 풍요로운 수확을 의미한다고 한다. 1910년대에 퇴락 하여 없어졌으나 門은 복원하지 않고 옹성만 복원하였다.
오직 이곳 한곳이 바깥쪽으로 계단이 있었다. 왜 바깥쪽으로 계단이 있을까?
혹시 현재 민가로 사용되는 바깥쪽 건물이, 군인들 숙소나 초소로 사용된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바깥에 계단이 있을리가 없지않은가?
서문 안쪽모습. 계단이 넓다.
서문 너비가 무척 넓은데, 옛부터 이랬는지는 알수가 없다. 아마 차량이 드나들수있도롣 이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옹성 바깥쪽.
서문옆 서쪽 성곽.
화장실도 낙안읍성 컨셉에 충실했다.
안쪽 성곽. 이중으로 되어있었다.
다시 성곽으로 올라간다.
서문과 성벽.
남쪽으로 약간 올라간다.
계단이 이렇게도 놓여있다.
남쪽으로 이어진다.
왜 이렇게 파여있는지 알수가 없고...설명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이제부터 남쪽이다.
남문 쌍청루다.
평화스런 낙안읍성 모습.
성곽안의 마을모습.
1592년 조선은 이런모습이었을것이다. 그러다 도요토미의 18만 왜군이 갑자기 쳐들어왔을때, 만명도 안돼는 조선군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것도 전국에 흩어진 조선군 8천이었다.
뒤돌아 본 모습. 좁은계단이 밑에있다.
성 바깥쪽 민가모습. 돌 담장이 아담하다.
남문 쌍청루.
쌍청루 옹성.
성곽의 남문으로 쌍청루 또는 진남루라고도 하며 오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관리가 소홀하여 (1929년경) 퇴락하였으며 문에 사용되었던 방형 장 초석과 문지 도리 구멍이 있는 초석이 현재까지 남아 있었다. 건물 규모는 정면3간, 측면2간의 22.36평으로 루각식 굴 도리 5량 겹처마 팔작집으로 모로 단청하고 두짝의 문을 달고 양옆의 체성(體城)위에 기둥을 올려놓았다. 1987년 낙풍루와 함께 다시 복원되었다.
네크님이 동행해줘서 여간 다행이 아니다.
관심있는 분야에 같이간다는게 얼마나 즐거운지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옹성에서 바라본 남쪽성곽.
계단을 내려 밖으로 나가본다.
안쪽모습으로 개거식 문이다.
안에서 바라본 옹성.
남쪽성곽과 여장.
해자.
옹성모습이 단단해 보인다.
계단이 잘 안보이지만 양쪽으로 있다.
계단 위쪽.
금전산과 성안마을.
이제 동쪽으로 돌아간다. 치성은 동쪽에만 있는것이 인상적이다.
치성에서 바라본 동쪽성곽.
안쪽의 계단.
또 하나의 치성.
여기에도 계단이..
들어왔던 동문이다.
ㄷ 자형 옹성.
어느장독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주인은 알수가 있을까?
이치성에는 계단이 다르다.
치성에서 바라본 동쪽성곽.
동쪽끝의 치성. 안쪽에 계단이다.
양 옆으로 계단이다.
북쪽성곽 안의모습.
비스듬히 봐야 계단이 보인다.
성 바깥쪽의 해자.
북쪽 성곽.
중간넓이 계단.
오랜세월을 말해주는 객사뒤의 고목.
이곳은 나무때문에 성곽보수가 어려웠나보다.
성곽이 서쪽으로 돌아간다. 좁은 계단이 하나 놓여있다.
관아 뒤쪽.
두터운 성곽.
아까 올라왔던 서문옆 계단이다.
이제 마을로 내려섰다.
아담한 돌담장으로 이루어진 마을.
우물이다.
옥사.
옛날 이 고을에서 죄를 지은 죄수들을 격리 수용하였던 감옥으로 남문으로 가는 길목 왼쪽에 위치하고(동내리 368) 2002년 12월 복원하였으며 옥사 주변의 담장은 여늬 담장보다 높게(2.5m) 쌓여 있으며 대개 다른 고을의 경우 관아 옆에 옥사가 있기 마련인데 관아와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흉악범이 없지 않았나 여겨지며 객사의 축과 거의 일치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지사(地師)가 이와 일치되도록 터를 잡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지금처럼 변호의 개념이 없던시절이다.
때리면 다 분다...참으로 무식했던 시대고,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었다.
이곳도 우물터다.
마을을 지나 동문으로 나갔다.
동문옆 모습.
동문을 뒤로하고 낙안읍성 답사를 마친다.
2년전 왔을때보다 자세하게 볼수있어서 좋았고, 그때는 몰랐던 읍성의계단을 자세히 보니 인상이 깊었다.
낙안읍성 돌계단에는 정자나 누각에서 느낄수없는, 서민의 향기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성곽(서울城郭) - 북악산(北岳山) (0) | 2009.03.29 |
---|---|
연천의 산성 (山城) (0) | 2009.03.20 |
흥양현읍성 (興陽縣邑城) (0) | 2009.03.10 |
고흥 발포만호성 (鉢浦萬戶城) (0) | 2009.03.10 |
해남 이진진성 (梨津鎭城) (0) | 2009.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