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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서울城郭) - 북악산(北岳山)

메탈 2009. 3. 29. 08:45

종    목 : 사적  제10호 
명    칭 : 서울성곽(서울城郭)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467,922.6㎡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외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서울특별시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시작은 한성대입구에있는 혜화문이다.

혜화문 (惠化門)
조선시대 도성에 설치된 동북방 성문. 1397년(태조 5)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지을 때, 동서남북 4대문과 그 사이에 4소문을 세웠는데, 소문 가운데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본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으나 1511년(중종 6) 혜화문으로 고쳐졌고,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하였다. 양주(楊州)·포천(抱川)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성문 모양은 아래쪽에 아치형 출입구가 있고, 그 위에 누각을 올린 전형적인 성문 형태였다. 1928년 도시확장으로 헐리고,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위치는 지금의 혜화동 교차로 근처이다.

 

 

창경궁의 정문을 홍화문이라 지으면서 중종 6년에 혜화문으로 개칭했다. 혜화문은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어 북대문의 역할까지 하던 문으로 동북 지역의 사람들과 여진족들이 주로 통행하던 문으로 사용되었다.


1928년에 일제에 의해 문루가 헐리고, 1939년에는 석문까지 없어졌다. 1970년대에 도성을 복원할 때 복원되었으나 1992년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도로 한쪽 끝에 위치하고 되었다. 혜화문은 성벽 동북쪽으로는 성벽이 마을 쪽으로 보존되어 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민간의 담장으로 사용되고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는 등 예전의 위세는 사라졌다. - 백과사전

 

성곽이 얼마간 이어지다가 개인주택 담장으로 이용된다.

 

 

길이있어 끊어지며, 그 다음은 개인주택 담장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성곽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조선초에 세운모습이다.

 

 

두산빌라 담장을 끝으로 성곽은 없어지고...와룔공원까지 한참 걸어야헀다.

 

 

와룡공원 입구에서 성곽이 다시 이어진다. 이제부터 북악산구간이다.

 

 

바깥쪽모습.

 

 

시대별로 그리고 복원한것이 어지럽게 섞여있다.

 

 

 

 

봄을 알리는 시그널이다.

 

 

 

 

 

 

성곽 안쪽모습으로, 여장길을 따라간다. 서울성곽은 거의가 이런식이다.

 

 

큰 S자를 그리며 이어지는 성곽.

 

 

 

 

암문인데 옛부터 있었는지, 아니면 주민의 편의를 위해 요즘 만들었는지 알수가 없다.

밖으로 나가본다.

 

 

1700년대 조선 숙종때 기준으로 복원한것 같다.

 

 

 

 

 

 

다시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군 부대가있어 다시 밖으로 나가야했다.

 

 

약 5m이상은 되어보인다.

 

 

쌓은 시대가 다름을 알수있는 성곽이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사다리. 잠시 밖의 성곽을 따라가본다.

 

 

 

 

 

 

 

 

서울성곽은 이렇듯 여러시대를 함께 느낄수있는것이 특징이자 매력이다. 거기에 복원한것까지..

 

 

 

 

길이없어 말바위 쉼터 계단으로 다시 돌아간다. 

 

 

계단을 오르자..

 

 

성곽이 곡장으로 이어진다.

곡장(曲墻)-능묘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치성의 역할이다.

 

사각형을 치성이라하고, 반원을 곡성이라하는데...북악산에서는 곡장이라한다.

 

 

안쪽은 깨끗한 여장 길이다.

 

 

여기서는 이길 외에는 절대 못가게끔 사복입은 군인들이 감시한다.

물론 사진도 못 찍게한다.

 

 

말바위쉼터다.

여기서 주민증제시하고 신고서쓰고 패찰받아 목에걸고 입산해야한다.

 

 

옆의 군부대는 이와같이 깨끗하게 가려놓았다.

 

 

숙정문이 보이고..숙정문 위쪽으로 이어지는 성곽.

 

 

이 코스는 2007년에 개방되어서인지 성곽상태가 무척 깨끗하다.

 

 

옛모습 그대로인 여장도 보였다.

 

 

다양한 시대를 보여주는 성곽.

 

 

숙정문(肅靖門) 이다.

삼청터널 위에 자리한 숙정문은 남대문·동대문·서대문과 함께 서울성곽 4대문의 하나로 속칭북문(北門)이었다. 서울의 정북에 위치한 이 문은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는데 무슨까닭인지 숙정문(肅靖門)으로 개칭되어 중종(中宗) 이후의 실록에는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과 함께 양주(楊州)와 고양(高陽)으로 왕래하는 통로로 이용되기도 한 이 문은 서울성곽의 다른 문과 같이 태조 5년(1396)에 창건되었다. 이문은 연산군 10년(1504)에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동쪽인 지금 자리로 이건하였는데 이때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로 된 석문(石門)만 세우고 문루(門樓)는 세우지 않은 듯하다. 1975년 서울특별시에서 무너진 문루를 복원하려고 할 때 석문만 있었느냐 아니면 문루도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차례 토론을 거쳐, 태조 때 문루가 건축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이를 복원한 뒤 숙정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조선 초의 기록을 보면 풍수설과 음양설에 따라 숙정문을 닫아 두었거나 열어 놓기도 하였다. 그 예로 태종 13년(1413) 6월에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풍수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地脈)을 손상시킨다는 상서(上書)가 있자, 마침내 이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였다.

 

 

그 후 태종 16년(1416)에는 기우절목(祈雨節目)을 만들어 가뭄이 심하면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았으며, 비가 많이 내리면 숙정문을 닫고 남대문을 열게 하였다. 즉 가뭄이 심하면 먼저 종묘·사직과 명산(名山)·대천(大川)에 기우제를 지내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남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어 놓는다. 그리고 시장(市場)을 옮기고 보신각의 종을 치는 대신 쟁(錚)을 치게 하였다. 이는 북은 음(陰)이요, 남은 양(陽)인 까닭에 가물면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설에서 나온 것이다. 예종 때의 기록에도 몹시 가물면 종로의 시장을 구리개(현 을지로 입구)로 옮기고, 남대문을 닫은 다음 북문, 즉 숙정문을 열게한 뒤에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숙정문을 열어 놓으면 서울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 지므로 항상 문을 닫아 두게 되었다고 소개 하였다. 이것도 숙정문이 음방(陰方)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이 있었던 것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보면 상원(上元 : 음력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의 재액을 면할수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고 하였다. 이는 숙정문 부근의 자연풍경이 아름다워 도성의 사녀(士女)들이 자주 이곳을 찾아와 놀던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오래도록 비가 오면 숭례, 흥인, 돈의, 숙정문에 나가서 비 개이기를 비는 제사인 영제를 지냈다.

 

조선시대 선조 때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보면 숙정문 밖 한 바위 틈에서 액체가 흘러 나오는데 맑을 때는 마치 막걸리빛 같고 진할 때는 떡과 같아서 사람들이 다투어 먹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숙정문 밖의 쌀바위(米岩) 전설이 남아있다. 이 전설에 의하면 옛날 하루 세차례씩 1되 가량의 쌀이 나왔는데 나뭇군 노인이 욕심이 생겨 이 바위에 지키고 앉아 쌀이 나오는 대로 자루에 담아 가득 채우기를 한 달 가량 계속 했더니 쌀 대신 끈적끈적한 물이 나왔다 는 것이다. 

 

 

숙정문 정면이다.

 

 

 

 

 

 

홍예문.

 

 

바깥쪽 성곽.  사진은 숙정문 일대에서만 찍을수 있었다.

 

 

다시 지정된 안쪽길을 따라간다.

 

 

바깥쪽은 마치 비무장 지대같다. 이러니 성곽이 아주 깨끗하지...

 

 

지나온 성곽.

 

 

 

 

다시 안쪽길이다.

 

 

곡장이다. 태조나 세종때 쌓은 모습같다.

툭 튀어나온 치성으로 보면 되겠다.

 

 

곡장에서 바라본 성곽.

북악산정상에서 급경사를 이루며 내려감을 알수있다.

 

 

곡장 안쪽모습.

 

 

바깥쪽 성곽모습.

 

 

북악산 성곽과 오른쪽에 인왕산 성곽이다.

 

 

곡장을 뒤로하고...

 

 

군 시설때문에 암문을통해 밖으로 나가야했다. 

청풍암문이라 하는것으로 봐서 원래부터 있던 암문같다.

 

 

바깥쪽성곽도 높고 상태가 좋았다.

 

 

 

 

 

 

 

 

다시 안쪽 청운대로 들어가기전에...

 

 

바깥보는것도 이게 마지막이다.

 

 

안쪽으로 들어오니 청운대다.

 

 

청운대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성곽.

 

 

북악산에서 바라본 지나온성곽.

 

 

곡장이 잘 보인다.

 

 

북악산 정상. 백악산으로도 불리운다.

광화문 뒤의 삼각형 산 정상이 바로 여기다.

 

 

인왕산의 성곽이 훤히 보이고...

 

 

북한산이다.

 

 

여기서 성곽은 급경사를 이루며 창의문으로 이어진다.

 

 

 

 

이곳도 지정된 안쪽길로만 가야하고, 사진도 못 찍는다.

 

 

 

 

옛 여장을 보며 창의문으로 다가섰다.

 

 

창의문 (彰義門)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청운동(淸雲洞)에 있는 조선시대 성문(城門). 서울 성곽의 4소문(四小門) 가운데 하나로, 북문 또는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한다. 1396년(태조 5)에 도성 8문의 하나로 창건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이후 창의문의 위치가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지리설적 해석 때문에 폐쇄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국가적 공역(工役) 등 긴요한 경우에 한하여 성문을 열었다. 현재의 문루(門樓)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 16)에 중건한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능양군(陵陽君;인조)을 비롯한 의군(義軍)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으로 들어가 반정에 성공하였다고 하며, 누문 다락 안에는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1958년 크게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숭례문·흥인지문(興仁之門)의 석축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작은 규모로 쌓고 그 위에 세운 단층 문루이며, 가구(架構)방식은 평주(平柱)의 주두(柱頭) 위에 바로 대들보를 얹고 그 위에 다시 화반형(華盤形) 부재를 놓아 마룻보와 중도리의 짜임을 받쳤다. 천장은 서까래를 모두 노출시킨 연등천장[椽背天障(연배천장)]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홍예문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창의문 바깥족 성곽.

 

 

 

 

서울성곽 북악산 답사를 마친다.

비록 개방됐다고는 하나 너무도 제약이 심하고, 갈수있는길은 오직 지정된길뿐이라 전체적인 모습을 다양하게 볼수가 없었다.

그나마 개방되었다는것에 만족을 해야하는지, 사진조차 맘대로 찍을수 없다는것에 문제제기를 해야하는지.. 판단이 잘 안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