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북한산성 (北漢山城) : 원효봉 - 염초봉

오솔 길 2009. 4. 1. 09:57

 
명    칭 : 북한산성(北漢山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543,795㎡ 
지 정 일 : 1968.12.05 
소 재 지 :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1외 서울 은평구,성북구,강 
시    대 : 삼국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서울시, 고양시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때 한성의 관망을 위해 도성을 축조하고, 그 방어 효과를 높이기 위해 삼각산에 산성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의 외곽 산성을 마련하자는 축성론(築城論)이 일어나 효종 10년(1659) 송시열(宋時烈)에게 명하여 수축하게 하고, 숙종37년(1711))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해 4월에 착수한 이 공사는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3군문이 담당하였고, 그 아래 각 군문에는 책임 감독관으로 낭청(郞廳)을 두었으며, 또 그 아래에 내책응(內策應)·외책응(外策應)·독책장(督策將)을 두었다. 공사별로 부석패장(浮石牌將), 축성패장(築城牌將), 수구패장(水口牌將), 운석패장(運石牌將), 치도패장(治道牌將)과 이장변수(泥匠邊首), 야장변수(冶匠邊首), 석수변수(石手邊首), 목수변수(木手邊首) 등으로 공사를 감독하도록 하였다. 축성에 필요한 노동력은 3군문의 군사는 물론 서울의 주민과 승려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 모역군(募役軍)과 각종 공장(工匠)이 동원되었다. 서울의 주민은 경상가(卿相家) 이하 각 호(戶)를 대·중·소로 구분하여 대호는 3명, 중호는 2명, 소호는 1명씩 식량을 지참하고 취역에 나섰으며, 모역군은 한 달에 쌀 9두와 면포 2필씩이 지급되었다. 이때 이룩된 것이 오늘날의 북한산성이다.

 

염초봉릿지구간과 만경대릿지 구간의 성곽은 암릉구간이라 암벽장비없이 오를순 없다.

마침 염초봉가는일행이있어 동행하기로 하였다.

 

대서문에서 시구문가는 구간은 성곽이 잘 남아있다.

훼손된구간도 별로없고, 여장만 무너져있을뿐...  

 

 

 

시구문까지 잘 남아있는 산성벽.

 

시구문 안과 밖.

정확한 본래 이름은 서암문(西暗門)으로 대서문 북쪽, 수문(水門)에서 원효봉으로 오르는 해발 180m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성안에서 생긴 시신을 내보내던 문이라 하여 주민들에게 시구문(尸柩門)이라고 불리웠고 이 이름이 원래 성문이름인 서암문(西暗門)을 대신하여 고착화(?) 되어 현재도 성문에 '시구문'이라 쓴 현판이 걸려있다.

 

 

시구문에서 원효봉까지는 성곽이 잘 남아있고, 원효봉을지나 북문까지는 성곽이 복원되어 남아있다.

오늘갈곳은 북문을 지나 염초봉에서 벡운대까지 남아있는 성곽답사다.

 

원효봉까지 대슬랩을지나 직진한다.

 

대서문.

 

원효봉정상의 성곽.

좌측에 염초봉과 백운대가 하나로 겹쳐보이고, 중간이 만경대, 우측이 노적봉이다. 

 

복원된 성곽을 따라 내려선다.

 

북문이다.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북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원효봉(元曉峰)과 영취봉(靈鷲峰-현재 염초봉의 본래 이름) 사이의 해발 430m 지점 안부(鞍部)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 현재는 문루(門樓)가 폐기되어 없어진 상태로 남아 있다.

 

이중의 홍예문으로 되어있다.

지난번 답사때는 위문에서 계곡으로 내려와 북문에서 시구문으로 답사했었다.

 

이번답사는 반대로  염초봉 방향이다.

바깥쪽의 성곽상태도 좋았다.

 

안쪽 여장의 모습.

옛 모습은 아닌것 같다.

 

두터운 이중성벽으로 되어있는 북문 안쪽성곽이다.

 

성곽위쪽모습으로 여장만 무너져있는 상태다.

 

염초봉으로 이어지는 두터운 성곽.

 

 

뒤돌아본 모습으로 원효봉 성곽이다.

 

가파른구간은 성곽의 높이가 낮았다.

 

 

 

커다란 자연암반까지 이어진 성곽.

 

이 총안과 여장은 등산객들이 쌓았는지 정교해 보이지 않는다.

 

암반을 지나 성곽이 이어지는데, 지대가 높아서인지 성곽높이는 높지않았다.

 

이곳의 성곽은 지대가 높아서인지 정교함보다는, 돌을 집어던질수 있도록 간편하게 쌓은 모습이다.

 

 

이중 성벽구조.

 

여장과 총안.

 

 

이중구조의 성곽이 잘 남아있다.

 

 

원효봉에서부터 이어져온 성곽.

 

약 50m의 가파른 암봉.

가파른 거대암봉에는 성곽을 쌓을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뒤돌아본 원효봉.

이성곽모습은 여기아니면 볼수가 없다.

 

북문이다.

 

다시 수직암봉이다.

 

우리는 우회하여 올라갔다.

 

여기에도 성곽이..

 

여기에 성곽을 쌓을 필요가 있었을까?

 

성곽이 가파르게 오른다.

 

위에서 바라본 직벽구간 성곽.

 

 

멀리 의상능선과 뒤에 비봉능선이다.

 

염초봉정상과 뒤의 백운대.

이곳은 자연암반이라 성곽을 쌓을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염초봉 정상에서 바라본 원효봉 성곽모습.

 

숨은벅능선.

 

염초봉에서 하강이다.

 

다시 이어지는 성곽.

 

성곽이 능선을 따라 내려간다.

 

약 1.5m위 높이로, 이곳도 다른곳에비해 정교하게 쌓지는 않은구간이다.

 

하지만 체성이 잘 남아있었다.

 

계곡쪽으로 이어지는 성곽.

 

 

 

백운대다.

 

경사가 가파른곳은 성곽을 계단식으로 나눠놓았다.

 

 

계속 아래로 내려간다.

 

 

계곡부근이다.

 

이곳은 바깥쪽의 모습을 볼수가 없었다.

너무 가팔라서 내려설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쪽모습.

 

반대쪽 암벽까지 이어져있다.

 

암벽을 올라서니 성곽이 다시 이어지고...

 

 

성곽 위쪽모습.

안쪽은 이중구조다.

 

바깥쪽은 화강암으로 제대로 쌓았다.

 

계곡쪽은 높이도 높았고, 다른곳과 마찬가지로 화강암이다.

 

뒤돌아 바라본 모습으로, 가팔라지면서 성곽의 높이가 낮아진다.

 

 

바깥쪽.

높이가 낮은데도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안쪽은 일반돌로 채웠고...

 

 

다시 암봉을 오른다.

 

낮게 이어져있는 성곽.

 

암반과 암반 사이를 이처럼 성곽이 연결된다.

 

지나온 봉우리.

 

자연암반을 제외하곤 전부 성곽이다.

 

 

이곳도 화강암으로 잘 쌓았다.

 

다시 뒤의 암반까지 연결되는 성곽.

저 암반까지가 마지막 성곽이었다.

그 이후로는 암벽이라 성곽을 쌓을수도, 쌓을 필요도 없었을듯...

 

백운대를 향해 오른다.

 

원효봉과 염초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곽라인까지...

 

백운대가 가깝고...

 

말바위 뒤로보이는 원효봉 성곽.

 

백운대서 바라본 지나온 성곽길이다.

 

다시한번 원효봉과 염초봉을 바라본다.

 

백운대서 바라본 만경대 성곽.

 

복원된 성곽이 위문에서 백운대까지 연결된다.

과연 옛날에도 이곳에 성곽이 있었을까?  올라올수도 없었을텐데...

 

 

 

위문이다.

정확한 본래 이름은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으로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의 안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위문(衛門)이라 일컫고 있는데, 일제시대 때부터 그렇게 불리어 왔다고 한다.

 

위문에서 올라온 성곽.

 

 

위문에서 백운대쪽 성곽.

 

위문에서 만경대로 이어지는 성곽.

 

만경대방향으로 보이는 성곽.

저기는 만경대릿지구간 답사때 해야한다.

 

 

위문을 뒤로하고 답사를 마친다.

 

전부터 가고싶었던 염초봉 성곽구간이었다. 

과연 그 험한 암릉사이에 성곽이 있었다.

어찌 쌓았는지 의문이들기도전에, 저거 쌓느라고 고생하는 민초들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답사도 힘드는데, 성곽쌓기는 오죽 했을까?

 

이번답사는 나혼자는 할수 없었기에, 같이 동행한 일행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