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337호
명 칭 : 나주읍성(羅州邑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지
수량/면적 : 14,852㎡
지 정 일 : 1990.10.31
소 재 지 : 전남 나주시 남내동 2-20외
시 대 : 고려시대
소 유 자 : 국유,사유
관 리 자 : 나주시
고려시대에 축성된 나주읍성은 서울 도성과 같은 4대문과 객사, 동헌 등을 갖춘 전라도의 대표적 석성(石城)으로 둘레 3.7㎞에 면적은 29만4천753평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읍성의 규모는 조선초(1457년) 당시 나주목사 김춘경이 완성했고, 세조 3년(1457)에 성을 확장했고, 임진왜란(1592) 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있었으나.조선민족 말살 정책을 편 일제에 의해 1910년대에 강제로 철거됐거나 훼손됐다.
돌을 쌓아 만든 둘레는 3,126척(약 940m), 높이는 9척(약 2.7m) 이며 대포을 쏠 수 있는 성벽에 나온 포루가 3개이고, 우물이 20여 개 있었다고 한다. 성문은 4개로 동·서·남·북에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북문터에 기초석만 남아있다.
나주시는 2006년 35억원을 들여 현재 남아있는 석축과 성곽조사 등을 거쳐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누문(樓門) 형식의 동점문(東漸門)을 건립했다. 화강석 재질과 색깔, 가공정도 등도 당시 원형을 재현했으며 누문에 사용될 목재를 1년여 동안 미리 건조하고 창호지 바름 등을 통해 가장 큰 단점인 갈라짐을 방지했다.
동점문 명칭은 '나주천 물이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서경' 하서 우공편'에서 유래됐으며 나주 사람의 정신이 작은 개울에서 시작돼 큰 바다에 이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
동점문(東漸門) 정면이다.
동점문(東漸門)과 남고문(南顧門)은 복원이 됐고, 서성문(西成門)과 북망문(北望門)은 아직 복원이 안 되었다.
뒷면이고...
아름다운 단청을보며, 위로 올라가본다.
옹성의 형태가 잘 나타나있다.
홍에문의 천장부분이다.
여장위로 가본다.
여장위에서 바라본 동점문 정면.
문루내부모습으로, 잠궈놔서 들어갈순 없었다.
뜰에는 초석이 놓여있었는데, 다듬이초석과 막돌초석(덤벙주초)이 하나씩 있었다.
다음엔 남고문(南顧門)이다.93년 12월에 복원한 것이다.
나주읍성의 관아로 가본다. 금성관(錦城館)이다.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2호 (나주시)
명 칭 : 나주금성관(錦城館)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 1동
지 정 일 : 1972.01.29
소 재 지 : 전남 나주시 과원동 109-5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나주시
상 세 문 의 : 전라남도 나주시 문화공보실 061-333-5891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건물이다. 객사관 고려∼조선시대때 지방궁실로써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을 양쪽의 익사(翼舍)에서 유숙하게 하던 곳이다. 지방의 도읍지에 관아건물이 들어서면 일반적인 경우는 중심축선상에 동헌과 정문, 루문 등이 자리하고 주변에 육방관 속의 건물과 내아들이 위치한다. 나주읍성내에는 목사의 내아(內衙), 관문(官門)인 정수루(正綏樓), 나주향교 등이 인근에 있다. 금성관 정문은 1966년에 나주 공원으로 이축해 갔다 한다.
금성관은 조선성종 6∼10년(1475∼1479) 사이에 목사 이유인(李有仁)이 건립했다 한다. 이후 선조 36(1603)에 크게 중수를 하고, 고종 21년(1884) 박규동 목사가 3창을 했다. 최근에 와서는 1963년 9월에 보수하였고, 다시 1976년에 완전 해체하여 거의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하여 오늘에 이루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창호·마루등 내부를 개조하여 나주군청 청사로 사용되면서 유리창문을 달아 쓰기도 했으나 현재는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금성관은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팔작지붕이다. 그러나 칸넓이나 높이가 다른 건물보다 크게 되어 정청으로서의 위엄을 더한다. 금성관의 공포형식은 익공형을 하고 있다. 원래 익공집은 궁궐이나 정전 등의 부속건물과 누각, 정자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중기 이후부터는 목조건물에 있어서는 다포계와 주심포계가 혼용되다가 새로운 형태로 익공계 양식이 대두되었다. 금성관은 고흥의 존심당과 함께 익공형식으로 관아건물의 유사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내부는 모두 대청으로 꾸몄으며 우물마루를 깔았고, 대형의 막돌초석에 약간의 배흘림을 둔 두리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10개의 내진고주(內陳高柱)를 세웠으며 기둥 위로는 주두(柱頭)를 얹고 창방을 걸었으며 주칸마다 소로 2개 화반 1구씩 배치하였다. 공포는 주심포계 익공식으로 살미첨자와 끝은 쇠서로 되었고 행공첨차를 두어 외목도리를 받게하였다. 가구는 내진고주 위로 대량을 걸고 그 위로 동자주를 놓은 다음 종량을 얹힌 9량가(樑架)로 되어 있다. 창호의 구성은 중앙 세칸은 4개의 빗살문으로 되었고 양쪽 퇴칸에는 빗살문 2개를 달았다. 측면 역시 빗살 창문으로 중앙 2칸은 4짝, 양편 2칸에는 두짝이다.
금성관 정문인 망화루(望華樓)다.
정면3칸,측면2칸의 2층누각이다.
안쪽에서 본 망화루.
망화루 내부모습.
망화루에서 바라본 금성관.
좌우건물은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이유숙하던 양쪽의 익사(翼舍)다.
옆에 우물터도 있다.
익사 벽오헌(碧梧軒)이다.
동익헌(東翼軒)의 다른 이름인 벽오헌(碧梧軒)이란 명칭은 조선 초기 전라도 관찰사 이행이 다른 곳에는 없는 벽오동 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 이름붙인데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2007년에 복원되서 새건물느낌이 확연하다.
이쪽은 왼쪽에있는 좌익헌(左翼軒).
벽오헌 뒤모습.
금성관에서 바라본 망화루와 안뜰.
밖으로 나가 정수루(正綏樓)로 향한다. 바로 옆이다.
정수루(正綏樓)는 조선시대 나주목 관아(官衙,동헌)의 정문이다. 우복룡 목사가 (1602.10.3∼1604) 건립하였다고 군지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민백남 목사가 1753년에 건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층의 양측면만 벽체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한때 북을 매달아 읍성의 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의 북은 근래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정수루 옆에 내아까지 있었다.
종 목 : 문화재자료 제132호 (나주시)
명 칭 : 나주목사내아(羅州牧使內衙)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 일곽
지 정 일 : 1986.09.29
소 재 지 : 전남 나주시 금계동 33-1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나주시
상 세 문 의 : 전라남도 나주시 문화공보실 061-333-5891
나주목사 내아(內衙)는 조선시대 때 목사가 정무(政務)를 보던 동헌(東軒)의 근처에 있던 살림집, 즉 관사(官舍)로 읍 역내에 있었던 많은 관아 건축 중에서 객사(客舍)인 금성관과 아문(衙門)인 정수루 등과 함께 현재 남아있는 건물이다.
내아의 건립연대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다만 문간채가 고종 29년(1892)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19세기 현재의 모습으로 건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건물의 위치는 옛 동헌의 정문이었던 정수루(正綏樓)에서 서쪽으로 약 65m되는 지점에 정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건물의 구성은 현재 본채와 문간채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문간채는 본채와 20m의 거리를 두고 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ㄷ자형 평면으로 된 팔작집이다. 중앙은 전퇴를 둔 5칸으로 좌측으로부터 대청 3칸과 여러곳이 크게 개조되어 원형은 찾아보기 어렵다.
기단은 현재 시멘트몰탈로 마감되어 있고 주춧돌은 막돌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정면에만 원형을 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정면의 퇴주 위로만은 창방을 걸고 그 위로 소루(小累)를 기둥 사이마다 3구씩 배치하였다. 가구는 정면 중앙으로는 1고주 5량, 양날개쪽은 4량형식으로 꾸몄다. 처마는 전면은 겹처마로, 후면은 홑처마로 꾸몄다.
본 내아는 일제시대 이후 군수 관사로 사용하면서 개수하여 원형을 많이 상실한 상태이다. 이처럼 객사(客舍), 아문루(衙門樓), 내아(內衙)가 함께 현존하고 있는 것은 관아 건축의 원형을 일부라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 건물이라 하겠다.
방문했을때 보수중이라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다.
나주읍성도 서문이 복원중이고, 점차 복원계획이 있다니 다행스럽다.
관아와 객사는, 지방에 그나마 남아있어 찾을수 있는데, 서울에는 궁만 있을뿐 관아가 거의 전멸이다.
나주의 역사가 전라도의 역사를 대변해준다고 할 정도로, 오랜세월의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므로, 복원의 날을 기다리며 나주읍성 답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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