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127호
명 칭 : 남도석성(南挑石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20,932㎡
지 정 일 : 1964.06.10
소 재 지 : 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149
시 대 : 삼국시대
소 유 자 : 국유,사유
관 리 자 : 진도군
진도에서 제주도 방면으로 이어지는 항로의 기점이 되는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석축 성으로, 본래는 둘레가 1,233척으로 성벽의 높이가 8척에 우물과 샘이 하나씩 있는 조선 시대 전라 우수영 관하의 수군(水軍)의 진영이었다. 고려 원종때 배중손(裵仲孫)이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남하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쌓은 성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진도군에는 백제 시대에 이미 3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그 중에 진도군에 속한 것이 도산현((徒山縣) : 지금의 가흥(嘉興))과 매구리현((買九里縣) : 지금의 임회(臨淮))으로, 매구리현의 중심이 구도포(九桃浦)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러한 고을들이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면, 삼국 시대에 이미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3세기초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가 연해 지방을 노략질함으로써, 1350년(고려(高麗) 충정왕(忠定王)2)에는 진도의 관부(官府)와 백성들이 세종 초까지 내륙지방으로 피하여 살다가 귀향하였다. 남도포(南桃浦)에 만호영(萬戶榮)이 처음 생긴 것은 1438년(세종 20) 정월의 일로, 이로 미루어 보면 현존하는 성은 그 뒤에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남도포성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金甲堡)와 더불어 명량(鳴梁)으로 돌아가는 바닷길의 요새에 위치하는데,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북상하는 위치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1555년(명종(明宗)10) 5월 서해안으로 약탈하려고 북상하던 왜적들에게 남도포와 금갑보가 분탕질 당한 경우도 있고, 또 이곳의 만호들에 의하여 격퇴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형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1683(숙종(肅宗)9) 6월에는 육군의 진관체제(鎭管體制)와 같은 수군진관(水軍鎭管)의 첨사진(僉使鎭)을 현재 전라남도의 위도(蝟島)와 가리포(加里浦)에 두었는데, 남도포(南桃浦)는 가리포첨사에 딸린 수군만호의 근거지가 되었다. 1765년(영조(英祖)41)경에는 둘레 1,040척, 높이 12척, 치첩(雉堞)이 43개나 있었던 성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성지(城址)의 일부가 민가에 붙어 있고, 성문과 옹성 등이 조선 시대 수군 진영의 전형적인 진보(鎭堡) 성으로서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정문격인 남문이다. 옹성에 두텁게 둘러싸여있다.
왼쪽에서 본 모습이고..
오른쪽에서 본 모습이다.
참고로 조선시대 여지도에 나타난 남도석성이다.
스카이뷰
남쪽의 개거식 문 형태다.
입구로 들어가 망루로 올라보았다.
방어구조를 잘 알수있게 되어있다.
하지만 이곳은 현재 공장 작업장으로 쓰이고있었다...기가 막혔다.
옹성이고..
옹성에서 본 남문모습.
동쪽으로 뻗어있는 남벽.
서문쪽으로 가본다.
서쪽성곽은 가면서 높이가 높아진다.
서문쪽으로 치성이 보인다.
치성을 지나자 큰나무있는곳이 서문이다.
서문도 옹성이 있으나 무너진것 같이 일부만 보인다.
문루가 없어 건너편으로 가려면 성곽을 내려와야했다.
서문에서 안쪽으로 조금들어가면 남문안쪽과 만난다.
그리고 남문길 끝에 관헌이 있다.
관헌은 맞는데, 객사인지 동헌인지, 내아인지..아무 설명이 없어 전혀 알수가 없었다.
다시 서문으로 나가, 옹성을타고 성곽위로 올라간다.
성곽위로 한바퀴 돌아본다. 성곽 서쪽면이다.
옆으로 관헌모습이다.
치성이 있으며, 치성에서 방향이 90도 꺾인다.
북쪽 성곽이다. 그러나 남도석성에 북문은 없다.
관헌건물지붕이 남문지붕과 일직선상에 있다.
남문지붕과 한줄로 연결되는것으로 보아, 옆의건물이 내아쯤 되겠다.
저 앞의 치성에서, 다시 방향이 바뀐다.
이윽고 동문이다. 두터운 동문 옹성의 모습이다.
건너편으로 가려면 다시 내려가야했다.
안쪽에서 바라본 성곽북쪽면이다.
동문이 옹성으로 둘러져있다.
동문옹성으로 나가본다.
바깥쪽 모습이다.
저 끝이 치성이고..90도 꺾이며 북쪽성곽이된다. 오던길 반대로 가보자.
진도 끝자락에도 멋진산이 있네...
치성을 돌자 북쪽성곽이 보인다.
북쪽 수구(水口)모습이다.
뒤돌아 본 모습.
저 치성을 돌면 서쪽성곽이다.
담쟁이에 둘러싸인 서벽.
서벽을 따라가니, 이윽고 서문이다.
서문은 동문과는 입구가, 옹성형태에서 약간 다르다.
서문옆에 남도석성 만호비다.
이곳 성에 부임했던 수군의 수장(首長) 중에서 뛰어났던 수군만호(水軍萬戶)들을 기념하는 비다. 만호란, 벼슬(군인이니까 계급인가?) 이름인데, 고려 말 수군을 재건할 때 각 도별로 도만호(都萬戶) 관하에 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을 두면서 비롯되어, 조선 태종 때에는 3품 이상의 관직을 기리키다가 1443년(세종 25년)에 3~4품을 모두 만호로 통일하여 각 도에 둔 제진을 관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 뒤 종4품으로 고정되었다.) 이곳에는 모두 여섯 분의 만호비가 모셔져 있다.
치성을 지나면, 원점 남문이다.
남문앞에는 남도석성의 단운교와 쌍운교가있다.
공식 명칭은 '진도 남동리 쌍운교 및 단운교'로서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2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도석성의 남문 밖을 흐르는 개울인 세운천을 건너는 무지개다리들이다. 단운교가 세워진 시기는 1870년 이후이나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쌍운교는 주민들이 1930년 경에 세웠다고 한다. 이 둘은 그 자체 문화재가치도 뛰어나지만, 남도석성과 어울려서 더욱 그 운치를 자아낸다.
쌍운교의 모습이고..
쌍운교와 남문.
단운교의 모습인데 담쟁이때문에 잘 안보인다.
다시 남문위로 올라 남쪽성곽에서 동쪽벽을 밟아본다.
저기 치성을 돌면 동문이다.
동문 옹성.
뒤돌아가며 느낀점은, 이쪽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안쪽이 매우 낮았다.
바깥에서는 높은벽이다.
안쪽모습으로 높이가 사람키보다 낮으나, 바깥쪽은 그렇지가 않았다.
남쪽면에는 해자도 있고...
해자로 이어지는 남쪽 수구(水口).
남문의 기둥.이것이 그랭이 공법인가?
남쪽 성곽으로 안쪽보다 매우 높았다.
남쪽 수구.
치성이며, 이곳에서 동쪽면으로 방향을 바꾼다.
동문 옹성이다.
밑부분에는 큰돌로 이루어진 두터운 옹성이다.
어느 할머니를 만나 여기사정을 들었다.
관계기관에서 여기 입주자에게 이주보상을 다 끝냈다고 하는데, 입주자들이 이주안하고 버티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정비도 안돼고, 보수도 안돼며 엉망이란 얘기다.
그리고 동문, 서문에도 문루를 세울 예정이었으나, 정비사업에 차량이 드나들기 때문에, 차량통행을 위해 아직 문루를 못만들었단 얘기다.
이해가 된다. 옹성에 문루까지있으면 차량이 드나들수가 없다.
참으로 멀고도 험한 남도석성복원작업이다.
남도석성은 전형적인 읍성형태를 보이고, 보존상태도 좋았다.
해미읍성,고창읍성,낙안읍성과 거의 같은형태이지만, 원래 수군진영이라서 처음부터 읍성으로 분류가 안된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름다운 진도대교를 건너며, 진도의 산성 읍성 답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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