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9호 (종로구)
명 칭 : 종친부(宗親府)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 2동(507.6㎡)
지 정 일 : 1972.05.25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화동 2, 가회동 105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서울특별시교육위원회
상 세 문 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문화진흥과 02-731-1170
종친부는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인 정독도서관 정문에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보인다. 종친부는 조선시대 국왕을 지낸 분의 족보와 얼굴 모습을 그린 영정을 받들고 국왕 친척인 왕가(王家)·종실(宗室)·제군(諸君)의 계급과 벼슬을 주는 인사 문제와 이들간의 다툼 등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아였다. 종친부는 고려 때 제군부(諸君府)를 세종 15년(1433)에 고친 이름으로 조선말 1905년 종부사(宗簿司)로 이름을 고쳤으나 2년 후에 폐지되어 그 업무는 규장각으로 옮겨졌다.
종친부 건물은 조선시대 관아건축에 해당한다. 원래 경복궁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 맞은 편 옛 수도육군병원 후원인, 한성부 북부 관광방(觀光坊, 현 종로구 소격동 165)에 그 일부분만이 남아있었는데, 1981년 현위치로 옮겼다. 종친부가 이곳에 위치했던 것은 종신(宗臣)과 외척 및 부마(駙馬)ㆍ인척(姻戚) ,그 외에 궁에서 일을 보는 상궁들만 건춘문으로 드나들게 했던 궁궐의 제도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종친부 옆에는 의빈(儀賓)의 인사 문제를 관장하는 의빈부(儀賓府)가 있었다. 의빈이란 왕의 부마, 즉 왕비의 소생인 공주와 후궁의 소생인 옹주의 남편되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 의빈들도 왕족 대우를 받았으므로 그들이 모여 의논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곳으로 종친부 옆에 의빈부가 마련되었었다.
종친부 건물은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어보(御譜, 족보)와 어진영(御眞影), 임금의 초상화)을 받들어 모시고 의촉(衣?)을 만들고, 종실 제군의 봉작(封爵), 승습(承襲), 관혼상제 등의 사무를 행하였던 곳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중당(中堂)과 남쪽의 익사(翼舍), 그리고 이 두 건물을 연결하는 익랑(翼廊)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향하고 있다. 원래 중당의 오른쪽에도 왼쪽 익사와 같은 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없다.
중당은 전면에 잘 다듬은 세벌대 장대석 월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다듬은 화강석 박석을 깔았다. 월대 뒤에는 네벌대 화강석 장대석 기단를 설치하고 그 위에 전돌을 깔고 둥근 초석을 놓은 다음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운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건물인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평면 사방으로 툇칸을 덧댄 형식을 취하였으며, 전면과 후면의 툇칸은 외부로 트였다. 월대와 전면 기단 사이에는 한단 계단을, 뒷면 기단 중앙에는 세단의 계단을 두었다. 이익공계의 겹처마 팔작지붕이고, 양성을 하고 용두와 취두를 설치하였으나 잡상은 설치하지 않았으며, 가구(架構)는 이중량(二重樑) 7량이다. 정면 가운데 세 칸에는 사분합문, 그 양쪽 협칸에는 머름을 설치한 사분합창, 그 양쪽 툇칸에는 두짝문을 달았으며, 측면과 뒷면에는 모두 사분합창을 달았고 상부에는 광창을 설치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천정은 소란우물반자이다. 뒷면 기단 좌·우면에는 아궁이가 있다.
익사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중당보다 격을 낮추었고 규모도 작다. 중당보다 약간 뒤로 물러 서있으며, 바닥 높이도 중단보다 두 단 낮추었다. 전면은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나 뒷면에는 없다. 초익공계 건물로 겹처마 팔작지붕이고, 가구는 1고주 5량이다. 전면 세 칸에는 사분합문, 그 양쪽과 뒷면 가운데에는 사분합창, 그 양쪽 칸과 측면에는 모두 이분합창을 달았다. 건물 좌·우 측면 기단에는 아궁이를 내었다.
익랑은 중당 뒷면의 툇칸과 익사 전면의 툇칸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기능을 하고, 그 아래로는 장초석을 받쳐 사람들이 지나다니게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인데, 양끝에 툇칸이 한 칸씩 더 달렸으며 익사와 같은 바닥 높이로 처리되었다. 기둥머리를 깊게 파고 상·하 이익공을 모두 끼운 형태의 공포로 짜였으며, 공포 외단은 운공형, 내단은 보아지로 되었다.
중당과 익사는 건축적인 특색은 없으나 조선후기의 관아 건물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자료이다.
현판글씨가 한글식가로쓰기로 되어있는것이 눈이뜨였다.
중당(中堂)과 남쪽의 익사(翼舍), 그리고 이 두 건물을 연결하는 익랑(翼廊).
놀랍게도 서울시내에, 조선시대의 관아건물이 세개밖에없단다.
그중 하나인 종친부인데... 나머지 두개는 육사안에 하나, 어린이 대공원에 하나남아있다니..이 얼마나 무관심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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