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257호
명 칭 : 운현궁(雲峴宮)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터
수량/면적 : 9,413.23㎡
지 정 일 : 1977.11.22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운니동 98-50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학교법인덕성학원
관 리 자 : 서울특별시,학교법인덕성학원
운현궁(雲峴宮)은 흥선대원군이 살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교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한옥은 제일 앞 남쪽에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자리잡고, 뒤쪽인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북쪽에 안채인 노락당이 자리잡고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고,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0여년간 정치를 하면서 세도정치의 폐란을 제거하고 인사·재정들에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하였고,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경복궁을 다시 짓기도 하였다.
지금은 궁의 일부가 덕성여자대학교로 사용되고 있고 방송국 시설이 있기도 하다. 이로 인해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도 헐려 나가고 영화루와 은신군·남연군의 사당도 모두 없어졌다.
운현궁의 규모
고종이 즉위(1863.12.13)한 지 한 달쯤 지나서 대왕대비의 하교로 운현궁의 신ㆍ증축 공사는 시작되었고, 9개월만에(1864. 9) 노락당과 노안당 건물의 준공을 보았다. 당시 대왕대비는 호조에 명하여 운현궁에 매달 쌀 10섬과 100냥씩을 보내고, 운현궁의 신증축 비용으로 17,830냥을 지원하였다.
운현궁이 준공되었을 때 고종은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모시고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하였다. 이 때 고종은 자신이 그 곳에서 살던 때를 생각하여 근처의 선비와 소년들에게 임시과거시험을 보게 하고 선비 50명, 소년 497명을 선발해서 시상하는 등 운현궁의 준공을 기념 축하하였다.
본래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증축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의 담장 길이가 수리(數理)나 되고 4개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舊TBC방송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라고 한다.
운현궁의 대표적 건물로는 고종원년(1864) 9월에 준공한 노락당과 노안당 그리고 6년 후에 증축한 이로당이 있고, 지금은 한 개뿐이지만 그 당시 4개였던 대문이 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는 궁궐에 비하여 손색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였다.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노락당기(老樂堂記)'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했던 사실만으로도 노락당이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병학은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된다고 했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해도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천하제일이었다는 것을 잘 웅변하고 있다.
대원군의 위세와 운현궁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고종 3년(1866) 3월 21일에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를 운현궁에서 치른 사실이다. 가례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하였음은 물론이다. 당시 가례행사를 위하여 1,641명의 수행원과 700필의 준마가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모두 운현궁을 거쳐갔다고 할 때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가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되었다가 환국한 이후 민씨 척족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 곳이 이 건물이고, 만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노안당의 상량문이 1994년 5월 27일 보수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 및 지위에 관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상량문에 의하면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閤下)'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또 노안당의 당호는 공자가 '老者를 安之하며'라고 한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노락당과 노안당 증축 당시 대원군의 권세를 이처럼 상량문에서도 잘 대변하고 있다.
노락당 못지 않게 운현궁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4대문이었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정문, 후문,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의 4대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등극했을 때 조종대신들이 왕의 심중을 헤아려서 왕실 예산으로 경근문과 공근문을 지었다고 한다. 이 때 고종은 호조판서 이돈영에게 품계를 올려주고 치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공근문은 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전용한 문인데 경근문과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일본문화원 옆터에 그 기초만 남아있다.
운현궁의 담장.
현재남아있는 운현궁의 모습이다.
노안당,노락당,이로당 등이다.
운현궁으로 들어가기전에 덕성여대 사회교육원으로 사용되고있는 옛운현궁부터 살펴보기로한다. 운현궁 대문 옆에있었다.
덕성여자대학교 교사로 쓰이는 양옥집은 1910년 이후 대원군의 손자 준용(峻鎔)의 거처였으며, 일본인이 지은 건물이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정문, 후문,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의 4대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는데, 이것이 그 후문이다.
후문을 들어서자, 아담한 옛정자와 현대적인 휴식건물이 함께하고있다.
아마 운현궁의 정원이었던 모양이다.
그 위로 현대적 양식건물이다.
대원군의 손자 준용(峻鎔)의 거처였단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양관의 건립연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언제, 어떤 경위로 만들어진 것에 대해서는 구구한 억측만 난무할 뿐 정확한 기록을 보았다는 이도, 확실히 그 시기를 바로 잡아줄 이도 없는 형편이 계속되고 있단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의 경우는 1994년에 서울정도60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운현궁 복원공사가 진행되던 도중에 상량문이 잇달아 드러난 일이 있었으니 이것으로 건립연대의 확인이 이루어진 바 있었다.)
당시의 여러자료 내용을 종합해보면, 운현궁 양관은 1908년 이후에 착공되거나 건립된 것이 확실하며, 준공시기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건축물이 이뤄진 동기(動機) 역시 애당초 일제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황족, 명문가 등 권세가의 독자적인 능력이나 판단에 따라 이뤄졌던 측면이 강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그것이 1910년 이후에 이뤄진 것인지의 여부는 구체적인 기록이나 사진자료로 판명이 되어야 할 일이겠으나, 운현궁 양관의 지붕에 표현된 '이화문양'의 존재 등에 비춰보면 그래도 대한제국의 형태가 유지되고 있던 시기에 완공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다.
양관은 1917년 이준씨가 돌아가고 순종(純宗)의 동생 이강(李堈)의 2남 이우(李우)가 계승, 한때 이우공저(李우公邸)로 불리웠다. 돌과 벽돌을 섞어 쌓은 2층건물로 146.95평, 2층 137.71평이다. 건물의 양식은 후렌치 르네상스(French Renaissance)식으로 정면 중앙에 현관을 두고, 좌우의 2층에는 아취로 개방된 베란다를 두었다. 2층 정면 중앙에는 이오니오더의 벽기둥 4개가 서있다. 베란다의 석주(石柱)는 터스칸 오더(Tuscan order)이다. 이의 설계·시공은 일본인이며 재료도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라 전한다.
일제에의해 건축되었지만, 남아있는건물로서는 아름다운 양식건물이다.
다시 운현궁으로 들어선다.
입구를 들어서면 수직사로, 운현궁의 경비를 맡는곳이다.
안쪽에서 본 정문.
수직사다.
수직사(守直舍)
정문 우측에 위치한 수직사는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 궁에서 파견된 경관들과 관리하는 인원이 많았다.
굴뚝의 장식이 예사롭지않다.
노락당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문앞에는 가마가있고...
마침 노락당에서 전통혼례식이 있는모양이다.
노락당의 전면모습이다.
노락당(老樂堂)
노락당은 정면10간, 측면3간으로 노안당의 정면6간 측면3간 보다 상당히 크고 웅장하며, 툇마루 좌우에 방이 아홉 간이나 있을정도로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고종과 민비의 가례와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각종 중요 행사때 사용되었으며 명성왕후가 삼간택이 끝난 후 왕비수업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이는 노락당 대청에 걸려있는 노락당기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노락당이 굉장히 높아 하늘과의 거리가 한 자 다섯 치밖에 안된다'는 뜻에서 노락당의 호화롭고 웅장함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삼강오륜 이라는 유교적 개념 아래 조선시대 여성들의 주생활 영역의 안방으로 대표되는 운현궁의 주 건물이며 특히 노락당 벽채에서 나온 그림과 글씨는 현재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유물로 인정받고 있다.
부엌
노락당 남행각이 뒤로 보인다.
노안당이다.
노안당(老安堂)
운현궁에서 사랑채로 쓰였던 노안당은 대원군의 일상거처였으며 파격적 인사정책, 중앙관제복구, 서원철패, 복식개혁 등 국가주요 정책을 논의했던 곳이다.전형적인 우리나라 한식 기와집으로 처마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차양을 단 수법은 오늘날 이곳에만 남아있는 특징이다.노안당'이란 현판은 '노자(老者)를 안지(安之)'하며에서 딴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된 덕택으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 되어 스스로 흡족하다는 뜻으로 흥선대원군이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다. 말년에는 정권에서의 퇴진과 청나라에 납치되는 등 이곳에서 7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노안당 뒤쪽으로 건물이 일직선상에있다.
저 끝이 이로당이다.
대 양반가의 뒷모습을 보는것도 재미있다.
여기가 일종의 밀실역할이 아니었을까?
이로당 동행각 뜰로 나왔다.
뒤뜰에서 이로당으로 통하는 문이다.
문을 지나자 이로당이다.
이로당뒤로 양옥이보인다.
이로당(二老堂)
이로당은 정면7간 측면7간으로 바깥 남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입구(口)'자 모양으로 된 건물로 가운데 중정이 있다.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여자들만 살수있게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철저한 금남지역이라 할 수 있으며, 이로당의 안주인은 운현궁 전체 안살림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이로당은 ㅁ자건물로 남자는 안에 들어갈수가 없단다.
안뜰모습이다.
이로당의 안모습.
노락당과 노락당 북행각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문밖에서 본 이로당.
운현궁 사랑방이다.
공부를하거나 손님을 맞이했단다.
문을나서며 운현궁답사를 마친다.
대원군의 정치생애와 운현궁의 성쇠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따라서 운현궁의 역사적 보존가치는 대원군이 한국근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맥을 같이한다.
고종의 잠저였던 운현궁은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까지는 왕족으로서의 권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보잘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고종 즉위 후 10년 동안 대원군의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운현궁은 그 위용이 자못 왕궁과도 같았다.
운현궁의 대표적 건물인 노락당, 노안당이 사대문이 웅장하고 화려하여 그 모습이 엄숙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운현궁의 중심건물인 노락당은 낙성식 때 고종과 대왕대비가 참여했을 뿐 아니라 고종과 명성후 민씨가 가례를 치른 곳으로서 이 건물이 상징하는 역사적 의미는 크다.
그러나 대원군이 하야한 이후 운현궁도 점차 위용을 잃었다.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청에 구금당하고 있는 동안에 가장 경제적으로 힘들 때여서 관리유지가 힘들었다. 다시 운현궁이 활기를 찾게 된 것은 그가 재집권하고서부터 이다.
대원군이 다시 집권한 것은 2차례 있었다. 처음은 임오군란 직후 33일간(1882.7. 23 - 8.26)이었고, 두 번째는 동학혁명 당시로서 약 4개월간(1894 7.23 - 11. 22)이었다. 이 경우 대원군의 재집권 배경과 계기는 서로 다른 점이 있으나 공통적인 것은 2차례 모두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초기 집권할 때부터 내정개혁에서 역점을 두었던 인사정책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하겠다. 신분에 관계없이 불만세력을 포용하는 인재등용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 운현궁 홈페이지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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