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354호
명 칭 : 탑골공원(탑골公園)
분 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역사사건/ 역사사건
수량/면적 : 15720.9㎡
지 정 일 : 1991.10.25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1
시 대 : 대한제국시대
소 유 자 : 공유
관 리 자 : 종로구
탑골공원 팔각정 자리에는 조선초기에 원각사(圓覺寺)가 있었다. 원각사는 고려 때 흥복사(興福寺)라고 불리던 것을 조선 세조 10년(1464) 5월에 중건하며 이름을 고쳤는데,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으로 연산군 10년(1504) 12월에 폐사(廢寺)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장악원(掌樂院)을 이 자리로 옮기고, 다시 연방원(聯芳院)으로 그 이름을 고쳐 기생방이 되었다. 연산군이 축출된 후에는 한때 한성부의 관청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가 중종 9년(1514)에 원각사의 재목으로 공공건물의 영선(營繕)에 쓰게 되어 그 자취가 완전히 없어졌고, 지금은 원각사탑과 비(碑)만 남아 있다.
탑골공원은 조선 말 고종 임금 당시에 총세무사(總稅務司)로 있던 영국인 브라운(John Mcleavy Brown, 栢卓安)이 1895년(또는 1896년) 이 곳을 도시공원으로 만들 것을 건의하여 공원으로 되었다. 이 공원은 원래 황실공원이었으며, 처음에는 탑이 있다 하여 탑골공원이라 하였고, 그 후에 파고다공원으로 불려졌다가, 1991년부터 탑골공원으로 공식명칭이 되었다.
공원 안에는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 제2호)과 원각사비(보물 제3호)가 있다. 또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팔각정·독립만세 부조판·손병희 선생의 동상들도 있다. 1919년 3월 1일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출발지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탑골공원의 문이다.
문은 모두 4개가있는데 정문은 남문이고, 다른 문은 크기가 작다.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으로 3.1운동 기념탑이다.
정면에는 손병희선생 동상이고...
그 뒤로 팔각정이다.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73호 (종로구)
명 칭 : 탑골공원팔각정(塔골公園八角亭)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면적 : 1동
지 정 일 : 1989.09.11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종로구
상 세 문 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문화진흥과 02-731-1170
탑골공원 팔각정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공원이 조성되고 1902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위하여 군악대의 연주 장소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때 건립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팔각정은 황실 관현악단이 쓰던 황실 음악 연주소였다. 당시 일요일에 한하여 일반에게 공개되어 관현악을 듣고자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곤 하였으며, 평일에도 일반에게 공개하기 시작한 것은 1913년 7월부터다.
도편수 배희한(裵喜漢)에 의하면, 이 건물은 광화문에 있는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전과 아울러 도편수 최백현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최백현은 경복궁 중건과 창덕궁 수리에 참여했던 궁궐목수이며, 최원식에서 배희한으로 이어지는 도편수 계보의 스승이었다.
이 건물은 건물 내부의 고주와 바깥쪽의 평주로 내외진을 형성하며 기둥열이 구성되어 팔각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외진 한변의 길이는 12자이다. 외진을 이루는 평주의 높이는 11자이고, 내진을 이루는 고주의 높이는 14자이다. 평주 상부에는 몰익공(勿翼工)에 운공(雲工)이 부가되었고, 겹처마의 팔각지붕으로, 지붕 꼭대기에는 2단의 절병통을 설치하였고, 사래 끝에는 토수를 꽂아 마무리했다.
평주와 고주 사이에는 툇보를 걸어 추녀방향으로 기둥 외측에 익공이 설치되었으며, 내부 고주 사이에는 대들보를 걸었고, 고주 상부에서 대들보의 머리가 내밀었는데 좌우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 밑에 네 방향으로 익공을 설치하였다. 대들보와 직각방향으로도 단면이 작은 부재로 보를 걸었고, 그 상부에 동자주를 세우고 상중도리를 얹었으며, 고주와 상중도리 사이에는 각서까래를 사용하여 부채꼴 모양의 지붕을 구성하였다. 지붕의 중앙부는 중심에서 십자로 충량을 걸어 중심부를 관통하는 찰주를 받도록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을 둘러가며 장대석으로 다섯 단의 층단식 기단으로 처리하였고 내부 바닥에는 박석을 깔았다. 단청은 모루단청이며, 외진주열에는 각 면에 낙양을 설치하고 무궁화 당초로 장식하였으며, 머리초 사이의 계풍에는 소나무ㆍ난초ㆍ국화 등의 그림으로 장식하여 일반적인 단청과는 달리 한국적인 정서가 강조된 문양들로 시대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 건물은 외관상의 비례가 훌륭하여 남산 팔각정의 모본(模本)이 되기도 하였다.
팔각정과 탑골공원은 1919년 3월 1일 당시 청년학도와 애국시민이 이 곳에 모여 학생대표의 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시위 행진을 벌였던 3·1독립운동의 발상지다. 1969년 3월 발행 한국은행권 오십원 지폐 앞면에는 팔각정 모습이 국보 제2호 원각사지십층석탑과 같이 그려져 있다
팔각정 옆에는 3.1운동 부조물들이 있다.
부조물이 공원을 빙 둘러 북문까지간다.
그리고 원각사지 십층석탑이있다.
종 목 : 국보 제2호
명 칭 : 원각사지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 1기
지 정 일 : 1962.12.20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종로구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유리판으로 씌우기 전 모습이다.
동문쪽에는 대원각사비가 있다.
종 목 : 보물 제3호
명 칭 :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
분 류 :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 1기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탑골공원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종로구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3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돌 위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 (大圓覺寺之碑)’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동문이다.
밖에서 본 동문으로, 남문보다 작고 북문 서문보다 컸다.
동문옆에는 한용운 기념비도 있었다.
원각사탑 뒤는 북문이고,북문을 지나 한바퀴 돌면 다시 팔각정이다.
원각사 십층탑을 중심으로, 한바퀴 돌게되어있다.
아직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다.
바깥담장을보며 답사를 마친다.
흔히 파고다공원으로 알고있는 탑골공원이,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는것을 이번답사를 통하여 알았다.
역시 아는만큼 보이며, 보이는만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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