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시도기념물 제18호 (문경시)
명 칭 : 주흘산조령관문(主屹山鳥嶺關門)
분 류 : 유적건조물 / 유물산포지유적산포지/ 유적분포지/ 유적분포지
수량/면적 : 4,209,908㎡
지 정 일 : 1974.12.10
소 재 지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산21-1외 615필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대성탄좌(주)외다수
관 리 자 : 문경군
상 세 문 의 : 경상북도 문경시 문화관광과 054-550-6062
경상북도 문경에 있는 주흘산은 소백산맥의 주축에 자리잡은 산으로 주변의 산들과 더불어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는 조선시대 영남에서 소백산맥의 험한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가는 주요 통로 중 하나인 조령관문(사적 제147호)이 있다. 이 관문은 영남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으로 되어있는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어서 숙종 34년(1708)에 조곡관을 다시 만들고, 주흘관에 초곡성과 조령산성을 각각 지었다.
선조 30년(1597) 2월 신충원이 파수관(把守官)으로 임명되어 응암의 일자성(一字城)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고개 밑을 내려다보게 하는 축성이 끝났다.신충원은 훈련원 주부(主簿)로 승진하고 조령은 중요 관방(關防)으로 방어책임이 분담되었으나 임란이 끝나자 조령 수어(守禦)에도 관심이 없다가 인조(仁祖) 16년 왜구의 동란이 심상치 않아 비국당상(備局堂上)에서 조령 등 남관요충(南關要衝)의 수호계책이 논의된 적이 있다.
축성공사는 문경현감 이중창과 영비(營裨) 손명대에 의하여 수마석(水磨石)과 잡석소편(雜石小片)으로 쌓아 가자(加資)되었다. 그러나 숙종 38년 5월에 축성상태가 부실하여 무너졌다는 서종태의 보고에 의하여 현감과 영비는 삭탈 당하고 논죄(論罪)됐었다. 그 규모는 기록에 따라 다르나 남북 18리 18,509보인가하면, 남북 8리에 둘레 18,509보로도 기록되고 있다. 성이 3곳의 골짜기를 막고 있는데 하나는 고개 정상에 있어 충청, 경상 두 도의 경계를 이루며 조령관(鳥嶺關)이라고 하고, 하나는 응암에 있는데 신충원(辛忠元)이 쌓은 옛 성으로서 조동문(鳥東門)이라 하며, 하나는 초곡(草谷)에 있는데 주흘관(主屹關)이라 한다. 위의 세 곳은 모두 홍예문이 있으며 대로를 통하도록 되어 있다. 성내(城內)에서는 여러 갈래의 개천이 있고 항상 맑은 물이 흘러간다.제1, 2, 3관문은 양쪽 산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관문 좌우의 성벽은 능선을 따라 우회하며 높이 솟은 봉우리 6부 능선쯤에서 끝났다가 다음 골짜기로 이어져 있다.
조령관문 가기위해, 문경새재로 들어간다.
관문가는길에 오른쪽에 신길원 현감 충렬비(申吉元 縣監 忠烈碑)가 보인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낸 신국량의 아들로 45세에 벼슬길에 올라 선조 23년 경인년(1590)에 문경현감으로 도임하였다. 임진년(1592) 4월 27일 문경을 사수하다가 순국하였다. 임란 때 지방관으로 순국한 이가 많지 않았기에 나라에서는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하여 그의 충렬을 기렸으며 숙종 32년(1706) 비를 세워 충절(忠節)을 표창하였다.
이 비는 화강석으로 지대석(地臺石)과 비신(碑身), 비개(碑蓋)를 만들었다. 비부는 높이 23㎝, 가로 146㎝, 세로 86㎝이며 비신은 높이 190㎝, 폭 89㎝, 두께 27㎝이고 비개는 높이 77㎝, 가로 122㎝, 세로 63㎝이다.
임란 당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상주를 거쳐 문경을 침공하자 현감은 피신하지 않고 문경을 사수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왜적에게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현감은 항복을 거절하고 관인도 주지 않았다. 왜적이 현감의 몸을 수색하자 관인을 오른손에 쥐고 주지 않으므로 적이 장검으로 목을 쳐서 순국하였다. 1706년 3월에 나라에서 비를 세워 충절을 표창하니 비문은 선무랑 전수사간원 정언지제교(宣務郞前守司諫院正言知製敎)인 채팽윤이 지었으며 통훈대부전행성균관전적(通訓大夫前行成均館典籍)인 남도익이 글씨를 썼다. 이 비는 1981년 4월 25일 지방유형문화재 제145호로 지정되었고 신길원은 달성군 공산면의 표충사에 배향(配享)되었다.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에도 실려 있다.
주흘관(主屹關)-영남제1관(嶺南第1關)이다.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으며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한다. 정면 3칸(間)과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며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이고, 부속 성벽은 높이가 1~3m, 폭 2~4m이다. 길이는 동측이 500m, 서측이 400m로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수구문도 보인다.
잘 복원된 성곽이 휘감아 돌아간다.
관리인에게 물으니 성곽이 거의 정상까지 뻗어있다고한다.
주흘관 정면모습이다.
성벽 여장부근에서 바라보았다.
안쪽모습으로 영남 제일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안쪽은 방어하기 쉽게 성곽이 이루어져있다.
성곽이 어디까지있나 따라가보았으나, 잡목때문에 진행할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곽이 정상부근까지있다니..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도대체 돌을 어떻게 운반했으며, 어떻게 쌓았단 말인가..관문 오른쪽은 주흘산, 왼쪽은 조령산...거의 1,000m높이까지..
멀리 KBS촬영장이 보인다.
가운데 큰문이 광화문세트이다.
다시 주흘관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 영남대로를 따라간다. 뒤돌아본 주흘관이다.
선정비(善政碑) 및 불망비(不忘碑)
비는 왕이 승하하면 장사 지내고 신하들이 임금의 덕과 공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이 돌은 공덕을 표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고인들은 왕의 송덕비를 세웠다. 이것을 모방하여 군수나 현감에 대하여 참으로 그들의 시책이 잘 되어야만 비를 세워 공덕을 잊지 않게 하였다.
중국의 후한 때 오장이 군의 태수로 선정을 하였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 묘 앞에 선정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선정비의 시초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충렬왕 때 양리(良吏) 최석이 선정을 하여 팔마비(八馬碑)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이 또한 우리나라의 선정비의 시초인 듯 하다.
선정비의 글은 대개 일치하여 전 군수 누구의 영세불망(永世不忘)이니 송덕이니 하는 문자를 새겼다. 그 중 크고 글도 많이 새겨져 있는 것이 어쩌면 백성을 많이 울린 표본이 되기도 한다.
어느 곳을 막론하고 예전 읍자리에 아직 십여개 혹은 수십개의 비석이 서 있어 선정의 허욕을 장식하고 있다. 선정비를 더욱 간수하고 옥석(玉石)을 가려 보관할 것을 보관하면 그래도 선인들의 뜻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1관문 뒤에는 당초 있던 비석과 관내에서 발견된 몇 기의 비석을 옮겨 20여기가 있다.
조령산을 배경으로, KBS세트장이 잘 갖추어져있다.
영남대로다.
옆으론 시원한 계곡이 흐르고...
조산(造山)이다.
인위적으로 만든산으로서, 풍수지리학적으로 공허한곳에 조산을 만듬으로써, 그곳을 보강하고자 하는것이다.
쭉 뻗은 영남대로다.
지름틀 바위
기름을짜는 도구인 기름틀을 닮아 붙여진 이름. 지름틀은 기름틀의 경상도 사투리다.
조령원터.
조령원터를 지나 영남대로가 훤히 보이고...
옛 과거길이 대로옆으로 있었다.
다시 영남대로를 걷는다.
주막이다.
이곳에는 익히들은 이름의 시가 새겨져있다.
류성룡의 시.
매월당 김시습의 시.
이어서 교귀정이다.
교귀정(交龜亭)은 조선시대 신임 관찰사(觀察使)와 이임(離任) 관찰사가 관인(官印)을 인계·인수하던 곳이다. 조선시대 경상도 관찰사(일명:監司)는 도(道)의 경계에 도착하면 관찰사로서의 임무가 시작되므로 이를 도계(到界)라 하였다.
신·구 감사의 인수 인계는 도계(道界)지점에서 실시되었다. 이 지점을 교귀(交龜)라 하는데, 경상도 관찰사의 그곳은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선인 새재길의 중간지점인 교귀정(交龜亭)이다. 여기에서 이임하는 관찰사는 관찰사인(印)을 신임감사에게 인계하면 관찰사로서의 임무가 끝나고, 신임관찰사는 관찰사인(印)을 인수함과 동시에 새로운 임무가 시작되었다.
최초의 창건은 조선 성종(成宗)시대 초엽인 1470년대에 문경현감(聞慶縣監)신승명(愼承命)이 세웠고, 약 500년간을 존재하다가 한말 의병전쟁때인 1896년 3월에 일본군에 의한 방화(放火)로 소실되었는데 소실된지 100년이 지난 1999년에 문경시에서 중창하였다.
용추계곡.
다시 영남대로를 걷는다.
산불됴심비
이 비는 상초리 산42-8번지에 있다.
교귀정을 지나 제2관문을 못미쳐 노변의 오른쪽에 세워 있다. 다듬지 않은 돌(높이 183㎝, 폭 75㎝ 정도)에 "산불됴심"이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퍽 오래된 조선조 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정조 때 별장이 잡인의 통행을 단속할 때 역시 관방(關防)유지를 위해서는 산불조심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고 일반서민이 잘 알도록 한글 비를 세우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연보호의 시금석(始金石)이고 「조심」을 고어(古語)인 「됴심」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기 드문 한글 비이며 지방문화재 자료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로저쪽에 물레방아가 보인다.
조곡폭포물로 움직인다.
통나무 물통이다.
조곡폭포.
이윽고 조곡관(鳥谷關)-영남제2관(嶺南第2關)이다.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 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關)은 영성(嶺城 : 3관문)과 초곡성(草谷城 : 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 또는 주서문(主西門)을 설치하였다.
그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鳥東門)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鳥谷關)이라 개칭하였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가 3.6m, 길이 5.8m이다.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3m, 길이 73m이고, 좌우의 성벽의 높이는 2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100m이다.
안쪽모습이다.
영남제2관이란 현판이 달려있다.
여장끝까지 가보았다.
그 이후부터는 복원되지않은 성곽이 산위로 뻗어있었으나, 잡목때문에 진행이 어렵다.
반대편은 길때문에 끊겨있었고...
대로옆에는 옛과거길이다.
이곳에도 여러 시 들이 돌에 새겨져있었다.
정약용의 시다.
다시 대로로 들어섰다.
대로옆으론 옛길이 자주 눈에 보인다.
그저 오솔길에 지나지 않지만, 몇백년동안 이어져온 영남대로 지름길이다.
2관문을 지나자 얕은 오르막길이다.
옆으로 장원급제길이있어 가본다.
아마 후세에 붙여진 이름이겠지...
책바위.
장원급제길로 올라가니 큰길과 만나면서 제3관문이다.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嶺南第3關)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 : 1708) 때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陸築)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했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으며 팔작(八作)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 4.5m, 폭 3.2m, 길이 185m이고 성벽의 높이는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400m이며 대문의 높이는 3.9m, 폭 3.56m 두께 19㎝이다.
다른 두문은 남쪽의 적을 방어하고자 만들었고, 이문은 북쪽의 적을 막기위해 만들었다.
여장을 따라가본다.
여장이 끝나는곳에 성곽이 이어져있다.
복원된 성곽이 이어지다가, 본래의 성곽을 만날수 있었다.
여기부터 본래의 성곽이다.
마침 바로옆이 백두대간길이라 따라가보았다.
안쪽모습으로 여장의 역할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곽위로 올라서본다.
돌이 치밀하게 놓여있지는 않았다..그렇겠지..여기까지 돌 나르는것만해도 엄청날텐데..
성곽모습이다.
밖에서본 모습으로 무너진곳도 많았으나, 대체적으로 양호했다.
마패봉(925m) 쪽으로 끝없이 이어져있었다.
위쪽의 튀어나온 돌은 여장의 흔적이 아닐까?...
아무래도 그런것 같다. 500년의 세월을 지켜온 조령산성의 여장.
무너진곳이있어 내려가보았다.
엉성해보이지만 500년을 버틴 성곽이다.
마패봉쪽으로 힘차게 올라간다.
성곽과 마패봉.
마패봉에서 백두대간쪽으로 성곽이 이어지며, 그곳에는 북암문과 동암문이 있다는데, 거기가려면 등산장비를 단단히 챙겨야한다.
아쉽게도 여기서 마감해야했다.
백두대간길로 다시 내려선다.
성곽위에 구멍뚤린 여장의 모습이다.
다시 조령관으로 돌아왔다.
반대편 성곽은 길때문에 끊겼다.
길건너편에 있을지 모르는데, 잡목때문에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조령관을 나서며, 조령관문, 조령산성 답사를 마친다.
내려오며 바라본 신선봉 병풍바위 산세가 무척 아름다왔다.
여기서 차가 주차되어있는곳까지 택시비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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