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시도기념물 제35호 (제천시)
명 칭 : 제천덕주산성(堤川德周山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일곽
지 정 일 : 1983.03.30
소 재 지 :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1-1외
시 대 : 삼국시대
소 유 자 : 국유,사유
관 리 자 : 제천시
상 세 문 의 : 충청북도 제천시 문화관광과 043-640-5433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있다.
신라 경순왕의 제 1공주 덕주공주가 이곳 월악산에 머물면서 지세를 이용하여 이 산에 성을 쌓고 훗날을 기약하였다. 그 후 이 성을 덕주공주가 쌓은 성이라 해서 덕주산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 때문에 차단성의 기능을 지닌 이 성은 고려 고종 43년(1256)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또 조선 말기에는 명성왕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둘레가 32670척(9800m)에 이르렀던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동문·북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있고, 좌우를 막은 석벽은 내외 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다. 덕주골 입구에 있는 동문은 남문과 비슷하며, 새터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내·외 5겹의 성벽이 있는데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83년 3월 30일 충청북도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었으며 제천시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월악산국립공원 남쪽에 있으며 성의 유구는 윗 덕주사를 에워싼 내성, 그 바깥의 하성과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 동문, 북문 등 아치형의 성문 3개소만 남아 있다.
먼저 북문 북정문(北正門)이다.
송계리 새터말 민가 가운데 있는데, 당초 계곡을 막았을 차단성의 성벽과 수구(水口)는 남아 있지 않다. 내외홍예를 갖춘 성문으로 초루(성 위에 세운 누각)와 여장(女墻:성 위에 활과 조총을 쏘는 구멍이나 사이를 띄어 쌓은 작은 성벽) 등 대부분의 석재가 유실되었으나 1997년 복원되었다. 홍예마루돌에는 태극모형이 조각되어 있다. 이 성은 안팎으로 5겹의 성벽이 남아 있는데 그 축조연대가 각각 달라, 성을 축조하는 방법에 관한 귀중한 자료이다.
주위에 민가와 창고등이 어지럽게 널려있어, 눈살을 찌프리게만든다.
그리고 덕주산성의 지붕형태는 서울의 숭례문이나 수원의 팔달문과같이 우진각지붕형태를 하고있는것이 특징이다.
성 안쪽모습이다.
최근에 복구해서인지. 옛스런 맛은 떨어진다.
주위의 지저분한 조건부터 해결해야할것 같다.
일부만 남아있지만, 상당히 두텁게 싸여있음을 알수있다.
홍예문에 태극문양이 있다.
다시 차를타고 5분정도 거리에 남문이있는데, 이곳은 주위경치가 좋다.
송계팔경중 하나인 망폭대다.
남문 월악루(月岳樓)다.
남문은 경죽 문경에서 하늘재(寒暄嶺)를 넘어 월악산 남쪽 기슭의 월천을 막는 차단성 역할을 하는 문이다. 동창에서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홍예문으로 되어 있고 좌우를 막는 석축은 내외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다. 축성법은 선단석을 3개씩 쌓아올린 뒤 종석(宗石) 1개와 12개의 기석(基石)을 쓰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아주 힘차게 성곽이 산위로 뻗어있다.
좀더 다가가본다.
산위로 길게뻗어있는데, 저것을 어떻게 쌓았단 말인가?
외침과 부역에 시달리는 우리민족의 한(恨)이 성곽에 고스란히 배여있는것 같다.
복원한흑적이보인다.
성 안쪽모습이다.
계곡쪽에 길이있어 끊겼지만, 아마도 성곽이 자연암반까지 연결되지 않았을까?
전형적인 조선시대 축성법이다.
성곽위로 올라서본다.
내외겹축방식을 알수있다.
누각으로 올라서서 산쪽으로 뻗은 성곽을 바라보니,두터운 실루엣이 육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곽을 따라 올라가 본다.
뒤를보니 월악루가 송계계곡과 잘 어우러져있다.
성곽은 저 앞의 자연암반까지 연결되어있었다.
성 안쪽의 성곽모습으로, 윗쪽만 보수한 흔적이보인다.
다시 월악루로 내려왔다.
아주 견고함을 느낄수있었다.
홍예문사이로 월악산을 마라보며, 동문으로 향했다.
동문은 남문에서 그리멀지않다.
덕주골 입구에 있는데 좌우를 가로막은 축성법을 사용하였고 문의 홍예 양식은 남문과 비슷하다.
덕주루(德周樓)란 현판이 걸려있다.
어마어마한 성곽이 산위로 이어진다.
안쪽에서 바라본모습이다.
겹겹이이루어졌슴을 알수있다.
덕주루 안쪽모습.
문을 사용했던 흔적이있고, 큰 돌들은 무었에사용했는지 알수가 없다.
덕주루 정면모습인데, 복원할때 물받이등에 신경좀 썼으면..하는 바램이다.
물받이는 있는데 물흐르는 구멍이 없었다.
윗쪽으로 오르니, 덕주루와 성곽을 한꺼번에 볼 수가 있었다.
여태까지 본 성곽중 가장 두터운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제 외성을 마치고 내성으로 들어간다.
내성은 마애불가는길에 있으며, 덕주사에서 걸어서 30분쯤 거리다.
국립공원이라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있다.
내성이다. 새로 복원된것이 아쉽고, 일부의 형태만 남아있었다.
오른쪽으로 저만큼..
완쪽 계곡쪽으로 저만큼이다. 성곽두께가 상당하다.
안쪽에서 보이는,계곡쪽으로 흐르는 성곽모습이다.
안쪽모습.
문쪽은 더 두텁게 되어있었다.
여닫이 문을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계곡쪽으로 내려선다.
계곡물건너편에도 성곽의 흔적이다.
거의 무너졌으나, 남아있는곳도 보인다.
이쪽은 너무 말짱히 복원되어, 오히려 부담스럽다.
계곡 건너편의 무너진 성곽.
산죽길을 내려서며 덕주산성 답사를 마친다.
덕주산성은 북으로는 남한강을 끼고 남으로는 하늘재를 통해 남과 북을 연결 시켜주는 주요한 교통요충지이며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로인해 통일 신라 말에는 중앙 집권세력이 미치지 않는 지방 분권적인 강력한 호족 세력이 이 지역에 나름대로 웅거하였을 가능성도 높다고 보여지는 곳이기도 하다.
천혜의 지형 덕분으로 예로부터 유명한 피난처로 알려져 왔다.
고려 고종 때 몽고가 대군을 몰고 충주성을 함락코자 하여 많은 충주사람들이 이 곳으로 피난 오게 되었는데 김윤후장군과 용감한 충주민이 버티고 있는 충주성 공략에 실패한 몽고군은 달아난 충주민들이 있는 이 곳 월악산성을 공격코자 하였으나 월악산 주변으로 갑작스럽게 안개가 자옥히 끼더니 요란한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쳐 공포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필히 월악산신이 노한 것으로 생각한 몽고군은 겁을 먹고 산성을 피해 문경을 넘어 상주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한다.
임진왜란 때에도 충주와 주변 주민들은 떼를 지어 월악산성으로 난을 피해 몰려 왔었다한다.
왜군들 역시 월악산성만은 건드리지 못하였다하여 피난민들은 무사하였다고 한다. - 충주여행정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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