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고창 무장읍성 (茂長邑城)

메탈 2008. 4. 9. 11:42

종    목 : 사적  제346호 
명    칭 : 무장현관아와읍성(茂長縣 官衙와 邑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지  
수량/면적 : 205,997㎡ 
지 정 일 : 1991.02.26 
소 재 지 : 전북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49-1외 일원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고창군
관 리 자 : 고창군

 

무장읍성은 1417년 무장진의 병마사에 마을을 다스리는 기능을 주어 무장진 병마사 김노(金蘆)가 쌓은 길이 약 1.2km의 평지성이다.

읍성의 남문인 진무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동문터도 잘 남아 있다. 성 주위를 둘러싼 물길인 해자는 폭 4m·길이 574m 정도로 그 흔적만 남아있다. 성 안의 건물로는 객사·동헌이 있다. 『문종실록』에 의하면 읍성의 둘레는 1,470척(약441m)·높이 7척(약2m)이며, 해자의 둘레는 2,127척(약638m)이고 문는 2개가 있으며, 성의 규모를 넓혀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장읍성은 조선시대 옛 읍성의 모습을 연구하고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88년이래 여러 차례의 조사를 통해 무장읍지에는 현재까지 옛 고을(읍치)에서 2대 핵심 건물이던 객사와 동헌이 공존하고 있고, 또 읍성(토성)이 남문 및 동문(옹성)지와 함께 그 외주(外周)의 해자와 나란히 병존하고 있어서 다시 말해 객사와 동헌, 성곽과 해자가 같이 남아 있어서 심히 드물게 보는 중요한 유적지임이 분명해졌다. 뿐만 아니라 향청(鄕廳)· 연청(椽廳)· 내아(內衙)와 성황당· 사직단· 여단 등 여러 공존시설의 원위치도 옛 지도나 고노(古老)들의 증언을 통해 거의 확인할 수 있어서 1991년 2월에 사적 제 346호로 지정하였다. 더욱이 무장읍지는 신문물 전래이후 다른 고을의 경우와는 달리 성밖의 고창 ∼ 영광 간 대로변으로 신시가지가 형성 개발되고, 성내에 상기(上記) 여러 아사(衙舍)와 객사를 개조한 국민학교· 면사무소· 경찰지서 등 공존건물과 20호의 민가가 있을 뿐 현재 거의가 국공유(國公有)의 야산 (野山) ·농지(農地)· 운동장 등으로 남아있다. 위와 같이 여러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으므로 무장읍지는 오늘날 전국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옛 우리 읍치(고을)의 전형을 조사 복원하는데 가장 알맞은 적지(適地)이다.

 

도로변에 바로 진무루(鎭茂樓)가 있다.

읍성의 남문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층누문(二層樓門)으로 건평 4평이다.

광해군 4년(1612)에 개건(改建)되어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쳤다 하고, 1984년에 크게 중창되었다.

 

성곽은 조금 남아있을뿐이고, 복원한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 성곽이 있을뿐이다.

 

반대편도 마찬가지.

 

읍성 안으로 들어왔다. 진무루의 뒷모습이다.

 

진무루 뒤로는 객사다.

객사(客舍) - 사두봉(蛇頭峰)남록(南麓)의 거의 읍내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면 11칸, 측면 3칸, 건평(建坪)80평, 기단석축(基壇石築)고(高) 80㎝이다.

관명(館名)은 송사관(松沙館)(무송(茂松) 장사(長沙)의 약(略))이고 조선후기에 지어졌음은 확실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수년 전까지 면사무소로 사용된 까닭에 특히 내부구조의 변형이 심하였는데, 1990년에 원형에 가깝도록 일대수리(一大修理)를 가하였다.

 

좌우 건물의 높이가 본관보다 낮은이유는, 격을 낮추기 위함이란다.

 

객사앞에있는 진무루가 웅장해 보인다.

 

해자 (垓字)의 흔적같다.

흔히 성지(城池) 혹은 성호(城濠)라 하는 바와 같이 해자(호)는 방어목적(防禦目的)의 성곽(城郭)에 필히 병설(倂設)되었던 것인데도 현재 성과 함께 해자가 남아있는 예(경우)가 심히 드물다. ○무장해자(茂長垓字)는 남문의 동서 약 150m만 없어졌을 뿐, 폭(幅) 약4m로 , 길이 약574m에 이르는 흔적이 성 둘레에 완연(宛然)하다.

 

동헌앞에있는 국민교육헌장이다.

아직도 남아있는곳이 있다.

 

동헌(東軒)

당호(堂號)는 취백당(翠白堂)이고 성내의 서남쪽 현(現) 무장초등학교 교사(校舍)뒤편에 위치하며 정면 6칸, 측면 4칸, 건평 45평, 석축기단 고(高) 45㎝이다.  인조(仁祖) 13년 (1635)에 창건되어 수차(數次)의 개건(改建)을 거쳤다 하고, 1983년에 크게 중건(重建)되었다. 일정(日政) 초(初) 모든 고을에서 거의 종전(從前)의 동헌(여러 아사(衙舍)의 중심건물 )은 군청 또는 면소(面所)로, 객사(客舍)는 학교로 개조 사용되었는데 무장의 경우는 그 반대이다.

 

 

 

동헌에서 보이는 객사.

 

발굴된 돌들. 복원때 쓰일듯 하다.

 

객사 뒷모습이다.

 

선정비들.

 

고목과 선정비가 오랜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객사쪽으로 나왔다.

좌우 건물이 격을 위해 낮춘것이 인상적이다.

 

진무루가 역광의 실루엣으로, 당당해 보인다.

 

 

 

문을 사용한 흔적이 좌우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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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이래 여러 차례의 조사를 통해 무장읍지에는 현재까지 옛 고을(읍치)에서 2대 핵심 건물이던 객사와 동헌이 공존하고 있고, 또 읍성(토성)이 남문 및 동문(옹성)지와 함께 그 외주(外周)의 해자와 나란히 병존하고 있어서 다시 말해 객사와 동헌, 성곽과 해자가 같이 남아 있어서 심히 드물게 보는 중요한 유적지임이 분명해졌다. 뿐만 아니라 향청(鄕廳)· 연청(椽廳)· 내아(內衙)와 성황당· 사직단· 여단 등 여러 공존시설의 원위치도 옛 지도나 고노(古老)들의 증언을 통해 거의 확인할 수 있어서 1991년 2월에 사적 제 346호로 지정하였다. 더욱이 무장읍지는 신문물 전래이후 다른 고을의 경우와는 달리 성밖의 고창 ∼ 영광 간 대로변으로 신시가지가 형성 개발되고, 성내에 상기(上記) 여러 아사(衙舍)와 객사를 개조한 국민학교· 면사무소· 경찰지서 등 공존건물과 20호의 민가가 있을 뿐 현재 거의가 국공유(國公有)의 야산 (野山) ·농지(農地)· 운동장 등으로 남아있다. 위와 같이 여러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으므로 무장읍지는 오늘날 전국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옛 우리 읍치(고을)의 전형을 조사 복원하는데 가장 알맞은 적지(適地)이다. - 문화재 정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