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궁(宮),당(堂),루(樓),정(亭)

파주 반구정 (伴鷗亭)

메탈 2015. 9. 29. 11:19

반구정(伴鷗亭)  
종    목 : 문화재자료  제12호 (파주시) 
명    칭 : 반구정(伴鷗亭)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면적 : 1동 
지 정 일 : 1983.09.19 
소 재 지 : 경기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190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황어연
관 리 자 : 황어연
상 세 문 의 :  경기도 파주시 문화관광과 031-940-4352 

 

 반구정이 있는 문산읍 사목리로 방촌이 만년에 갈매기를 벗 삼아 보내던 곳이고, 반구정(伴鷗亭)은 임진강 가의 기암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어, 아래로는 임진강의 푸른 물이 굽이쳐 흐르고, 곁에는 송림이 울창하여 예부터 갈매기가 많이 모여 들었다 한다. 편액(扁額)이 처마 밑에 걸려 있는데, 이름하여 '伴鷗亭', 곧 '갈매기와 짝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정자 이름도 멋지거니와 글씨 또한 멋이 넘치는 명필이다.

 

황희는 86세에 벼슬에서 물러난 뒤 이 곳에다 정자를 세워 낙하정(洛河亭)이라 이름하고, 강물 위에 날아다니는 흰 갈매기를 벗 삼고 시를 읊으면서 여생을 보냈다 하며, 사후에 없어진 것을 4백년이 지난 뒤에 후손이 다시 세우고 그 뜻을 따서 '반구정'이라 이름 짓고 중수, 보존하여 오다가, 6.25사변 때 불에 타서 없어진 것을 1967년 6월 사방 4간 규모로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한다.

이곳의 밑에는 파란 임진강이 굽이쳐 유유히 흐르는데, 날씨가 좋으면 강 건너 북쪽으로 멀리 개성의 송악산이 눈 앞에 다가선다고 한다. - 문화재청

 

삼문을 지나면 반구정이다. 

 

 

언덕위에 보이는 반구정과 양지대

 

 

 

 

편액이 많이 있다.

 

 

 

 

양지대

 

앙지대(仰止臺)

앙지대는 반구정이 있던 원래 위치에 세워진 정자다. 1915년 반구정을 현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현위치에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라고 이름하였다. 

앙지문 상랑문에 '오직 선(善)만을 보배로 여기고 딴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이 앙지대라는 이름은 시경의 호인(好仁)아라는 뜻으로 취했다" 라고 적고 있다. - 문화재청 

 

 

양지대에서 바라본 반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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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을 뒤로하고 내려왔다.

 

 

참고로 파주에는 다음과같은 정자가 있었다.

 

정자란 벽이없고 기둥과 지붕만으로 되어 있는 건물로 일반적으로 놀거나 휴식할 장소로서 산수좋은 높은곳에 세운 건물을 말한다. 방이 없이 마루만 있고 사방이 두루 보이도록 탁 트였으며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 할 수 있도록 높은 곳에 건립한 것이 특징이다.

파주지역은 임진강변의 경치가 아름답고 서울이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그 경치를 즐기려는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잦았다. 강과 암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곳에 정자를 지어놓고 즐겼던 시인과 은둔자가 많아 기록상으로는 많은 수의 정자가 보이고 있다.

현재 남은것은 반구정과 화석정뿐인데 다른 정자들은 명칭만 알려져 있을뿐 자취를 찿아보기 어려우며 위치조차 확실치 않다. 대략 경치가 좋은 임진강변 일대를 따라서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록에 보이는 임진강변의 정자는 다음과 같다. - 파주향토문화연구소에서

 

기록에 남아있는 임진강변 20여개 정자

[臨津亭] <신증동국여지승람>과<파주목읍지>에 파주북쪽 17리 지점에 있는 臨津渡 남쪽의 언덕에 그 터가 있다고 하였다.
[豊樂亭]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 파주읍내에 있다고 기록
[一松亭] 몽구정 상류에 위치하였고 玄石 朴世采가 은둔하던곳으로 한 그루의 소나무 정자가 있었다고 함. 이 정자가 자리잡은 곳은 고령산과 장지산에서 흘러내린던 물이 합류되어 굽이쳐 흐르는 광탄 어귀로서 경치가 아름답고 한적한 곳이다. 지금의 파평면 두포리로 추정
[二泗亭] 파주읍 백석리에 위치하였다 한다. 辛泰東이 퇴관후 아들 신치복이 파주목사로 있던때에 백석산 남맥 절벽아래에 정자를 세워 고령산과 장지산에서 흐르는 물이 합류한다 하여 이사정이라 이름짓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지금도 백석리에는 정자동 자연부락명이 남아있다.
[七松亭] <적성현지>에 보인다. 이천(二川) 위 큰 길 옆에 魚?砂라는 흙으로 이루어진 둔턱이 있는데 이를 칠송정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가 왕래했던 곳이며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했을 때 쉬던 곳이다. 위치는 탄현면 갈현리로 추정되는데 白江 李敬與가 광해군때 낙향하여 은둔하였던 곳이라 한다.
[來蘇亭] <파주목읍지>에 임진도 하류의 남안에 있다는 기록이 보임. 문산읍 장산리의 임진강가에 있는 정자산에 위치하였다고 하며 居昌府院君 愼承善이 퇴임후 임진강이 굽이쳐 흐르는 어귀에 이 정자를 세우고 은거하였다고 한다.소래정이라고도 한다.
[銀杏亭] <파주목읍지>에 파주의 서쪽으로 15리에 위치하며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懸鍾臺] 적성면 주월리에 있는 육계토성의 북변 임진강에 면해 있다. 고려 궁궐지에 있던 종루였다는 기록이 <적성현지>에 보인다.
[遠思亭] 신지강의 상류에 그 터가 있다고 하는데 적성면 구읍리 관골 북서쪽의 임진강 변으로 추정된다. 진사 慶有後가 인목대비의 유폐시 세상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했다고 <적성군읍지>에 전한다.
[降仙亭] 적성면 주월리 임진강 북안에 있는 밭사이에서 초석의 흔적을 찿아볼 수 있다. 고려조의 왕과 신하들이 신선이 내려올 정도로 경치가 좋은곳이라 하여 이곳에서 즐겼다는 기록이 <적성현지>에 보인다.
[淸遠亭] 신지강 상류 언덕에 있으며 지금은 폐해졌다고 <적성현지>에 기록
[夢鷗亭] 웅담리에서 흘러내리는 늘노천과 牛溪가 합류하여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어귀에 세워졌다. 成聃壽가 계유정난 이후 이곳에서 은거하였다고 하며 파평면 두포리 임진강가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경치가 아름다워 중국의 蘚仙赤壁과 비교되었으며 長湍赤壁 중에서도 이 정자가 위치한 坡州赤壁이 그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었다는 기록이 <적성현지>에 보인다.
[醉翁亭] <적성현지>에 그 이름이 보임. 현의 서남쪽으로 2리 지점인 靑鶴洞에 있는데 이곳의 청학폭포 사이에 있는 큰 바위ㅟ에 吏民들이 재목을 모아 정자를 지어 더위를 피하였다고 하며 취옹정이라 하였다. 지금의 적성면 마지리로 추정된다.
[水月亭] <적성현지>에 화석정의 상류에 위치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위치는 연천 백학면 구미리로 추정된다. 陽村 權近이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이곳에 정자를 건립하고 소일하였다고 함.
[栗浦亭] 적성면 율포리 율포앞의 임진강가에 있었다고 하는데 인조때 정승 鶴谷 洪瑞鳳이 세우고 이곳에서 시를 읊으며 놀았다고 전한다.
[聽溪亭] 파평면 두포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聽松 成守琛이 웅담에서 샘내를 거쳐 흐르는 맑은 냇물과 임진강변의 조수물이 오르내리는 무정산 절벽 아래 정자를 세우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인재를 양성했다고 함.
[沈流亭] 군내면 정자리의 덕진당과 정자포에 인접. 梧川 李宗城이 이곳 임진강과 오천이 합류하여 덕진산 암벽에 부딪혀 휘돌아가는 강언덕에 정자를 건립하고 자주 내왕 은거하였다고 함.
[同樂亭] 문산읍 문산리에 위치. 釣隱 朴誾이 퇴임 후 이곳 배내와 광탄천이 합류하여 흐르는 문산포 위의 파평산 서맥인 백운산 끝머리로 송림이 우거진 곳에 정자를 건립하고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三湖亭] 문산읍 내포리 임진강변에 위치하였으며 成念祖가 은거하였다고 함.
[銀香亭] 광탄면 창만리에 위치. 芝峯 皇甫仁이 광탄 어귀 만장산 북맥의 끝머리 집근처 은행나무가 있는 곳에 정자를 세우고 시와 경치를 즐겼다고 함.
[樂還亭] 조리읍 봉일천리에 위치. 八餘居士 金正國이 기묘사화 이후 이곳에 정자를 건립하고 저술과 후진양성에 힘썼다고 함.
[淸隱亭] 美村 尹宣擧가 곡릉천이 흐르고 조수가 오르내리는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세우고 교하 향교 훈도로 임하면서 인재양성과 저술에 힘썼다고 함. 금능동 서원말 서북쪽 동산에 있었다고 하며 제자들이 이 정자터에 신곡서원을 건립하고 배향하였으나 후에 훼철.
[盧亭] 탄현면 갈현리 구포에 있었다고 함. 保眞齋 盧思愼이 정자를 세우고 집필에 힘썼다고 하며 교하 노씨의 정자라는 의미로 노정이라 불렀다. 일명 影碧亭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鳳岩亭] <장단읍지>에 현에서 남으로 10리인 하도면에 있었다고 하며 폐허가 되었다고 함.
[六仙亭] <장단읍지>에 현에서 동으로 20리에 있는 장서면의 龍山에 있었으며 지금은 石台만이 남아 있다고 함.
[不換亭]

 

<장단읍지>에 현의 남쪽으로 10리 지점인 상도면 洛河에 있었으며 지금은 폐허이다라는 기록이 보임.

 

 

1) 화석정(花石亭)

파평면 율곡리 산 100. 경기도 유형문화재 61호

  임진강변 야은길재의 유지였었던 자리에 율곡의 5대조우인 이명신 공이 창건. 그후 장손 의석이 중수했고, 의석의 증손인 율곡이 다시 중수, 율곡의 8세부시가 있다.

 

2) 반구정(伴鷗亭)

문산읍 사목리 190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 12호

 

3) 래소정 터(來蘇亭)

문산읍 장산리

<파주목읍지>에 의하면 임진도(임진나루) 하류인 장산리 임진강가에 위치했다.

여기서 지은 호곡 남용익의 내소정락경시가 전해온다. 숙종때의 명신으로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때 대마도주가 관백전당에 참배할것을 가요하였으나 굴하지않고 오리혀 도주를 설득하고 돌아왔다. 대제학 이조판서를 지냈고 문헌공의 시호를 받았다.

 

4) 몽구정터(夢鷗亭)파평면 두포리 장개나루터

창녕성씨 회곡공파문중. 몽구정은 웅담리에서 흘러내리는눌로천과 우계가 합류하여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어귀에 있었다. 계유정난으로 성담수가 이곳에서 은거하며 벼슬에 나가지 앉았다고하는데 지금의 파평초교 서ㅉ고의 임지강안 석벽위에 있었다. 두포리의 자연마을인 장포동에 몽구정터가 있었다고 전해온다.

  이곳은 경치가 아름다워 중구의 소선적벽과 비교되었으며 , 장단적벽 중에서도 이 정자가 위치한 파주적벽이 아름다워 극치를 이우었다고 <적성현지>에 나온다. 성담수의 몽구정시가 전해온다.

 

5) 임진정 터(臨津亭)

  파주시 파평면 율곡3리. 지금의 인진나루터 옆에 있었다. 터만 남아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파주목읍지>에 파주관아 북쪽 17리 지점에 있는 임진도 남쪽의 언덕에 그 터가 있다고 하였다. 임진정은 임진나루를 오가는 길손들이 이곳에서 쉬어갔고 또 시도 많이 남긴곳이다.

  임진정이 있었던 임진도(임진나루)는 파주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나루로서 관북과 관서지방의 분기점이 되었으며 임진진을 두어 관리하였고 중앙정부의 총융청에 소속되었다. <대동지지> 파주조에 주의 북으로 15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나루는 장단과 경계를 이루며 임진현 동쪽의 나루가 된다고 <신증동국여지승ㄹ마>장단조와 <장단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6) 일송정 터(一松亭)

   현석 박세채가 은둔하였던 곳이다. 한그루의 소나무 정자가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 이 정자가 자리잡은 곳은 고령산과 장지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합류되어 굽이쳐 흐르는 광탄어귀로서 경치가 아름답고 한적한 곳이었다.  

 

7) 칠송정 터(七松亭)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전하였을때 쉬어가던 곳이고, 고려 태조가 내왕한 곳이다. 지금의 탄현면 갈현리로 추정되는데, 백강 이경여가 광해군때 낙향하여 보내던 곳이다.

 

8) 원사정 터(遠思亭)

   적성면 구읍리 관골마을로 추정, 신지강 상류에 그 터가 있다고 전해온다. 구읍리 관골 북서쪽의 임진강변으로 추정된다. 진사 경유후가 인목대비의 유폐시에 세상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했다고 <적성군읍지>에 전한다.

 

9) 강선정 터(降仙亭)

  적성면 주월리 임진강 북안, 적성 술탄북쪽 언덕에 있었다. 석축이 사방전답에 흩어져 옛터가 남아 있다고 전해온다. 주월리 임진강의 북안에 있었다. 고려조의 왕과 신하들이 신선이 내려올 정도로 경치가 좋은곳이라하여 이곳에서 즐겼다는 <적성현지>의 기록이 있다.   

 

10) 취옹정 터(醉翁亭)

   적성면 마지리 청학동의 청학폭포 사이에 있는 큰바위위에 현의 이속과 주민들이 재목을 모아 정자를 지어 취옹정이라 하였으며 이곳에서 더위를 피하였다고 한다.

 

11) 이사정 터(二泗亭)

  파주읍 백석리. 주내에서 남쪽 10리 응암과 현암 사이에 있었다. 현령 신태동(호는 백석)이 건축하였고, 물이 두군데서(이수) 합하는 곳이므로 이사정이라 명명하였다. 지금도 터가 남아있는데 정자동이라 한다. 

 

12) 율포정 터(栗浦亭)

   적성면 율포리 율포마을, 조선중기 율포리 율포앞의 임진강가에 있었다고 한다. 인조때 정승 학곡 홍서봉이 세우고 이곳에서 시를 읊으며 지냈다고 한다.

 

13) 청계정 터(聽溪亭)

   파평면 두포리, 조선초기, 청송 성수침이 파평면 두포리 웅담에서 샘내를 거쳐 흐르는 맑은 냇물과 임진강변의 조수물이 오르내리는무정안 절벽 아래 정자를 세우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진을 양성했다고 함. 근처 파산서원에 제향되었다.

 

14) 심류정 터(沈流亭)

   군내면 정자리의 덕진당과 정자포에 인접해 있었다고 한다. 당대의 명현 오천 이종성이 자신의 고향산천인 오천이 임진강과 합류하여 덕진산 암벽에 부딪쳐 휘돌아가는 강언덕에 정자를 짓고 자주 내왕, 은거하였다고 한다.

 

15) 동락정 터(同樂亭)

  문산리 동중학교 뒷편 동락사터, 조선초기 문신이었던 조은 박은이 퇴임후 이곳 배내와 광탄천이 합류하여 흐르는 문산포위의 파평산 서맥인 백운산 끝머리로 송림이 우거진 곳이 경치가좋아 이곳에 정자를 건립하여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16) 은행정 터(銀杏亭)

  광탄천 창만리에 있었다. 지봉 호아보인이 광탄 어귀 만장산 북맥의 끝머리 집 근처 은행나무가있는곳에 정자를 세우고 시와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17) 낙환정 터(낙환정)

  조리면 봉일천리, 조선중기의 팔여거사 김정국이 기묘사화이후 이곳 조리면 봉일천리에 정자를 건립하여 저술과 후진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18) 청은정 터(청은정)

   조선초기 산천재 윤선거가 공릉천이 흐르고 조수가 오르내리는 이곳 경치좋은곳에 정자를 세웠다. 교하향교 훈도로 있을때 인재양성과 저술에 힘썼다고 한다. 금릉이 서원말 서북쪽 동산에 있었다고하며 제자들이 이 정자터에 신곡서원을 건립하고 배향하였으나 훼철된후 그 터만 전해온다. 지금은 그자리에 새금초등학교가 들어서있고 느티나무 한그루가 그때를 말해주는듯하다.

  윤선거는 소론의 영수가 된 윤증의 아버지이며, 김집의 문하생이었다. 신곡서원, 영춘의 송파서원, 노성의 노강서원등에 배향되었다. 청은정은 낮은 구릉의 남쪽 기슭에 공긍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19) 노정 터(노정)

  탄현면 갈현리 구포, 조선초기의 보진재 노사신이 탄현면 구포에 정자를 세우고 집필에 힘썼다. 교하노씨의 정자라는 의미로 노정이라 불렀다. 일명 영벽정이라고도 기록되어있다.

 

 

아마 2.35전쟁때 없어진것이 아닐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의 심정도 없어진 정자만큼 메말라 있겠구나.

이만큼 자료를 조사한 파주향토문화연구소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