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민속악기 박물관을 다녀온후, 갑자기 우리 악기에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우리전통 악기를 소개한곳은 없는지...국립국악 박물관이 있었다. 예술의전당 바로옆 국립국악원 내에있다.
국악박물관은 우리 음악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보고 느낄 수 있도록 국악관련 자료를 전시한 곳입니다. 국악박물관은 악기와 귀중도서, 음향 · 영상자료 등 총 3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450여 점이 중앙홀을 비롯한 각 전시실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국악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국악 전문 박물관으로서, 우리 음악 문화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체험의 장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상설전시 이외에 매년 다양한 주제로 특별전시를 기획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전시물을 보완 · 확충하여 국악의 산 교육장으로서의 역할을 더욱 충실히 해나갈 예정입니다. -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http://www.gugak.go.kr/site/homepage/menu/viewMenu?menuid=001005007002
국악박물관은 국립국악원내에 있었는데, 국악원이 이리도 크고 잘지어진것을 오늘처음 알았다.
이건물은 악기연구소와 박물관으로 사용하는데, 1층이 박물관으로 사용중이다.
가운데가 비어있어서 뭔가 아쉽다
계단을 올라 한바퀴돌며, 전통악기를 보기로한다
어 (敔)
목부(木部)의 타악기. 갈이라고도 한다. 1116년(고려 예종 11) 송(宋)나라에서 들여왔다. 길이 1m 가량의 엎드린 호랑이모양을 만들어 방대(方臺) 위에 얹어놓은 형태이다. 호랑이의 등쪽에 톱니모양의 서어(齟齬)가 27개나 있는데, 이것을 대로 만든 견으로 3번 호랑이의 뒷목덜미 부분을 내리치고 꼬리 쪽으로 긁으며 연주한다. 축과 짝이 되는 악기인데 축이 음악의 시작을 알리고 궁중제례와 헌가의 동쪽에 놓이는 데 반하여 어는 음악의 그침을 나타내고 서쪽에 놓인다. 어를 친 뒤 박(拍)을 3번 쳐서 음악의 끝을 마무리하였다. 호랑이와 대(臺)는 피나무로 만들었으며, 서어는 따로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 박았다. 박연(朴堧)이 고제(古制)를 참고하여 복원한 연주법이 문묘제례악에서 쓰이고 있다.
축
국악기의 하나. 아악기(雅樂器)에 속하는 타악기로 강이라고도 한다. 1116년(예종 1) 중국 송(宋)나라에서 전래된 이래 문묘제례·종묘제례 때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악기로 쓰인다. 위쪽이 조금 넓은 육면체의 나무상자로 사면이 막히고 속이 비었으며, 윗면 중앙에 구멍 하나를 뚫어 그 구멍에 추병(椎柄)을 넣어 치게 되어 있다. 옆 4면에는 산수화를, 윗면에는 구름무늬를 그려 넣고, 밑받침을 만들어 그 위에 올려 놓도록 되어 있다.
특종 (特鍾)
국악기 중 금부(金部)에 속하는 타악기. 특경처럼 1개의 큰 종을 매단 것으로 특경은 음악을 마칠 때 치고, 특종은 음악을 시작할 때 친다. 조선 세종 때는 등가(登歌)에 1틀, 헌가에 9틀을 썼다. 등가의 1틀의 음정은 황종(黃鍾)이며, 헌가의 9틀의 특종은 각각 9율을 가졌다. 지금은 문묘제례·석전제례악(釋奠祭禮樂)에 편성되어 쓰이며 기준음고를 정하는 구실도 한다.
편종 (編鍾)
아악기에 속하는 금부(金部) 타악기. 중국 고대 은(殷)·주(周)나라 아악기이며, 한국에는 1116년(예종 11)에 송(宋)나라의 《대성악(大晟樂)》과 함께 들여왔다. 그 밖에 공민왕 때에도 명(明)나라에서 보내온 적이 있으나, 병란(兵亂)으로 일부 흩어지고, 그 부족되는 수만큼 다시 사들였다. 그 뒤 1405년(태종 5)과 1406년에도 들여왔고, 1429년(세종11)부터 주종소(鑄鍾所)를 두어 본격적 편종 주조를 하게 되었다. 편종 제도는 16개의 종을 8개씩 아래위 2단으로 나무를 매달아 놓고 각퇴(角槌)로 친다. 종의 음정은 한때 종의 크기에 따라 조정하던 일(宋의 인종 때, 1425년)도 있었으나, 지금은 살 두께에 따라 정하고 있다. 즉 살이 두꺼울수록 음이 높고, 얇을수록 낮으며, 아랫단 맨 오른쪽 황종(黃鍾;C)부터 윗단 맨 오른쪽 협종(夾鍾;d)까지 차례로 반음씩 높아지는데 웅장하며 날카롭다. 이것을 아악에서는 12율(律) 4청성(淸聲)의 음역이라고 한다. 치는 법은, 종의 정면 아래쪽에 있는 둥근자리(隧)를 오른손 각퇴로 치는데, 예전에는 아랫단은 오른손으로, 윗단은 왼손으로 쳤고(아악), 속악은 치기 편하도록 양손을 고루 사용하였다. 편종의 틀은, 중앙에 구멍이 뚫린 방대(方臺;틀받침)와, 그 위에 놓인 역시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나무사자(木獅子) 한 쌍에다 꽂아 고정시킨다. 틀의 위쪽 양면에는 용머리가 부각되어 있고, 5개의 나무공작[木孔雀(목공작)]·색사유소(色絲流蘇)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건고 (建敲)
조선 초기 이후, 조회(朝會)·연회(宴會) 때 사용하던 아악기(雅樂器) 중 타악기의 하나. 지상 높이 4.15m, 지름 1.6m, 길이 1.49m로 한국의 국악기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하다. 조회·연회 때 전정헌가(殿庭軒架)에서 음악이 시작될 때와 합주가 끝날 때 쳤다. 구조는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가 바깥쪽을 향해 십자로 놓인 거호(踞虎)라는 대 반침을 세우고 그 위에 긴 북을 가로올려 놓았다. 이 북은 북면 지름 1.2m, 북통 길이 1.6m 안팎으로 붉은 칠 바탕에 모란꽃잎을 그려 화사하게 장식하였다. 북 위에는 나무로 만든 네모 진 2층의 방개(方蓋)를 얹었는데 방개의 네 모서리에는 이삭 모양의 붉은 빛 나는 털의 상모(象毛)를 달았으며, 구슬 달린 오색 유소(流蘇)를 물려 늘어뜨리고 있는 용두간(龍頭竿)을 뻗치게 하였다. 방개 위 맨 꼭대기에는 춤추듯 나는 모양의 백로, 즉 상로(翔鷺)가 연꽃 위에 조각되어 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그림과 설명이 있으며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국립국악원에 보관되어 있다.
노고(路鼓), 뇌고(雷鼓), 영고(靈鼓)
노고 (路鼓)
혁부(革部) 타악기의 일종. 중국 주(周)나라의 문왕 때 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에서는 조선 세종 때에 명나라로부터 받아들여, 문묘 또는 종묘의 제례(祭禮) 때 사용해 왔다. 통이 긴 북 2개를 십자형으로 포개어 틀에 매달아 놓고 치는데, 통에는 붉은 칠을 하였고, 북을 칠 때에는 진고(晉鼓)와 쌍이 되어 친다. 북틀 위에는 달 모양을 새겨 희게 칠하였고, 좌우에는 봉의 머리를 그려 유소(流蘇;꾸밈술)를 길게 늘였다. 받침나무에는 두 마리의 작은 범을 십자로 웅크린 모양으로 새기고, 그 등 위에 가자(架子)를 박았으며, 그 가자를 중심으로 하여 북을 매달았다.
뇌고 (雷鼓)
아악(雅樂)에 사용되는 혁부타악기의 하나. 주(周)나라 문왕(文王) 때에 제작된 것이며, 한국에는 조선 세종 때 명나라로부터 수입되었다. 편고(片鼓;한면에만 가죽을 댄 북) 6개를 기둥 쪽으로 모아 틀에 매단 것으로 북통에는 검은 칠을 하였고 반드시 뇌도와 함께 편성되어 타주된다.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산천서낭제[山川城隍祭(산천성황제)] 등의 제천의식에서 댓돌 아래 마당에 설치하는 헌가(軒架)에 편성되는 악기로, 진고와 함께 음악을 시작하거나 종지시키고, 4자(字) 1구(句) 끝마다 친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제향이 폐지됨에 따라 쓰이지 않고 있다.
영고 (靈鼓)
아악(雅樂)에서 쓰이는 북의 하나. 혁부(革部)의 타악기로서 지신(地神)에게 제사드리는 사직제(社稷祭)에서 영도와 함께 연주되었다. 북은 한쪽만 가죽을 씌웠고 앞뒤에 3개씩, 양옆에 1개씩 모두 8면의 북으로 짜여졌으며, 북통에는 노란색을 칠했다. 틀은 4마리의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을 한 2개의 받침대 위에 세워졌으며, 오채(五彩)로 된 길이 약 121㎝의 유소(流蘇)를 늘어뜨렸다. 음악을 시작하고 끝마칠 때에 연주하였다.
그리고 벽쪽에는 반차도가 있다
그림이 너무커 다 담을수가 없고...이 반차도는 청계천에도 벽화로 그려져있다
그리고 국악 CD와 음반들
국악은 대중과 거리가 가깝지 않다.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어렸을때부터 서양음계만 가르쳐왔기때문이 아닐까?
국악체험실로 들어가 본다
모니터에 국악 연주가 보여지고...
여기서 악기를 직접 연주해 볼수가있다
매직비젼
국악, 특히 민간음악과 양반음악을 살명해준다
민간음악을 주로 구전을통해 전해지며, 양반음악은 악보로 전해진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한면을 장식하고있다
90도로 돌아 다른면이다
거문고와 탁영거문고
거문고 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거문고는 중국 진(晉)나라의 칠현금(七絃琴)을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이 개조하여 만든 악기인데 이를 연주하자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 그래서 이름을 현학금(玄鶴琴)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러나 이는 설화적 기원에 불과하다. 가야국의 현악기란 뜻의 '가야고'와 마찬가지로 거문고는 고구려의 옛이름인 검··곰과 고의 합성어로, 고구려의 현악기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구려에서 발생한 거문고는 통일신라에 전해져 신기(神器)로 보전되다가 옥보고(玉寶高)·속명득(續命得)·귀금(貴金)·이찬(伊飡)·윤흥(允興)·안장(安長)·청장(淸長)·극상(克相)·극종(克宗) 등에게 전수되어 민간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거문고는 신라의 삼현삼죽(三絃三竹)의 하나로 향악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조선시대 거문고는 궁중에서보다 민간에서 더욱 발전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거문고는 일부 양반들과 중인계층에 수용되어 선비들의 필수품의 하나로 여겨졌다. 이들은 거문고를 연주함으로써 정신을 수양하고 다스리고자 했다. 이는 공자의 예악관(禮樂觀)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탁영거문고(濯纓거문고)
조선 초기의 학자인 탁영 김일손이 사용하던 거문고로 크기는 길이 160㎝, 너비 19㎝, 높이 10㎝이다.
거문고 중앙부분에 탁영금(濯纓琴)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학 그림이 거문고 아래쪽에 그려져 있다. 거문고의 머리 부분인 용두(龍頭)와, 줄을 얹어 고정시키는 운족(雲足)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끝부분인 봉미(鳳尾), 운족과 같이 줄을 고정시키는 괘 등 일부부품은 새로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옛 선비들의 애완품으로 사용된 악기로서는, 유일하게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4㎝,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장고
여기도 전통악기다
신라금 (新羅琴)
신라에서 일본에 전한 가야금. 실제로는 가야국에서 우륵에 의하여 신라에 전하여진 가야금이지만 가야국의 악기가 신라를 통하여 전하여졌기 때문에 일본에서 신라금이라고 불렸다.
풍류가야금 (風流伽倻琴)
통나무의 뒷면을 판 몸체에 양이두가 있는, 원형의 가야금. 후대에 산조를 타는 데 쓰는 산조 가야금을 만들어 쓰게 되면서부터 구분하게 되었다.
방향 (方響)
금부(金部) 또는 체명(體鳴) 타악기의 하나. 고려시대 이후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대표적인 당악기로 철향(鐵響)·철방향(鐵方響)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악학궤범》에 의하면 <철편(鐵片)의 모양은 길이가 9치, 나비가 2치로,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가 졌고, 수(數)는 16개이다. 16개의 철판을 겹줄로 엮어 틀에 달아놓고 편종과 편경 대신 쓴다. 강한 쇠붙이로 만든 철편의 크기는 같고 그 두껍고 얇은 차이에 의해서 음이 높고 낮다. 철편 위에 구멍을 뚫어 삼갑진사(三甲眞絲)로 위 아래 두 단에 각각 가로놓인 2개의 가로쇠에 8매씩 붙들어 맨다>고 하였다. 한편 1610년(광해군 2) 간행된 《악학궤범》에 의하면 <좌우 기둥 아래 안팎으로 초엽(草葉)을 붙이고, 새끼호랑이를 만들어 네모진 방대(方臺) 위에 놓고 2개의 틀 기둥을 새끼호랑이 등에 뚫은 구멍에 꽂아 고정시킨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주법은 양손에 편종과 편경에 쓰이는 각퇴(角槌)를 들고 치는데, 둔탁한 소리를 낸다.
특경 (特磬)
돌을 깎아 만든 타악기. 특종(特鍾)처럼 1개의 큰 경(특종일 경우는 종<鍾>)을 틀에 매단 것으로 각퇴(角槌)로 쳐서 소리를 낸다. 특종은 음악을 시작할 때 치고, 특경은 음악을 마칠 때 친다. 원래 고대 중국의 악기였으며 한국에는 고려시대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세종 때는 등가(登歌)에 1틀, 헌가(軒歌)에 9틀을 썼으나, 성종 때는 등가에 황종(黃鍾)의 특경 1틀만을 사용하였다. 음색이 맑고 청아한 것이 특징이며, 국악기 8부 중 석부(石部)에 속하는 악기는 특경과 편경(編磬) 뿐이다.
영도 (靈鼗)
8면으로 된 작은 북의 하나. 조선 세종 때 명(明)나라로부터 들여와 지신(地神)에게 제사지내는 사직제(社稷祭)의 헌가악(軒架樂)에 영고(靈鼓)와 함께 편성되었다. 보통 북과는 달리 작은 북을 4개의 나뭇자루에 매달아 8면을 만들었으며 노란칠을 한 북통에 양귀[兩耳(양이)]를 내고 가죽끈을 달았다. 두 손으로 나뭇자루를 잡고 흔들면 양 귀의 가죽끈이 스스로 북면을 때려 소리가 나게 된다. 《주례(周禮)》 <대사악(大司樂)>에 <뇌고(雷鼓)에는 뇌도가 따르고, 영고에는 영도가 따르고, 노고(路鼓)에는 노도가 따른다>고 하였으나, 영고는 진고(晉鼓)와 더불어 음악의 시작과 끝, 그리고 매악절마다 치는 데 비하여 영도는 처음에 3번 흔들어 악작(樂作)을 신호하는 것이다. 사직제가 없어진 지금은 쓰이지 않으며 악기만이 국립국악원에 복원되어 전한다.
뇌도 (雷鼗)
아악(雅樂)에 사용되는 북. 영고(靈鼓)·노고(路鼓)와 같은 계열의 타악기이다. 뇌고(雷鼓)와 같이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산천서낭제[山川城隍祭(산천성황제)] 등의 제례의식에서 댓돌 아래 마당에 설치하는 헌가(軒架)에 편성되는 악기로, 헌가의 음악 시작 전에 3번 흔든다. 작은북 셋을 엇맞춰 긴 나뭇자루에 끼어 쓰는 것으로 《악학궤범》에 기록된 것을 보면, <세 가지의 도는 헌가악(軒架樂)이 시작될 때 이를 흔들어 소리내는데 도만을 쓰는 일은 없다>고 하였다.
노도 (路鼗)
국악기 중 피명악기(皮鳴樂器)의 하나. 고(鼓)는 채로 쳐서 소리내는 북인 데 비하여 도는 흔들어 소리내는 북으로, 그 제작연도나 수입경로·용도 등은 노고와 같다. 노도의 구조는 몸통이 긴 작은 북 2개를 서로 엇갈리게 기다란 자루에 끼우고, 양쪽 북 허리에 가죽끈의 귀를 달아 자루를 잡고 흔들면, 귀가 북면에 부딪쳐서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북통은 붉은 칠을 하고, 노고와 함께 인신(人神)의 제향 헌가(軒架)에 편성된다.
밑받침이다
진고 (晉鼓)
진고는 고려 예종 11년(1116)에 송나라로부터 들어와 헌가(軒架)에서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행 진고와 그 재원에서 차이가 있다.
『주례도』와 진양(陳暘) 『악서』의 현고(懸鼓)가 곧 진고이다. 진고는 악을 시작시키는 것이기에 진고(進鼓)이고, 매달아 놓기 때문에 현고라 했는데, 진양의 『악서』에는 궁현(宮懸)에는 네 모퉁이에 설치하고 헌현(軒懸)에는 세 위[三位]에 설치한다고 했다.
박연은 “오늘날 우리나라 아악의 대고(大鼓)는 이것을 모방하여 만든 듯 합니다. 그러나 그 생김새나 매다는 제도는 『주례』춘관(春官)의 운인의 설명과 맞지 않으니 모두 송나라의 제도대로 진고 하나를 사용하기를 바랍니다.”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세종 이전에는 대고, 그리고 세종 12년(1430) 이후부터 오늘날의 진고와 같은 북을 사용하였다고 봐야할 것이다.
편경 (編磬)
아악기에 속하는 타악기의 한 가지. 고대 중국 은(殷)나라 때 이미 편경이 있었던 사실이 고고학상으로 입증되고 있다. 경(磬)은 맑고 아름다운 음이 나는 옥돌의 일종으로, 이 옥돌 16개를 ㄱ자 모양으로 다듬어서, 아래 위 8개씩 2단(段)으로 경가(磬架)에 매달아 놓고 각퇴(뿔망치)로 쳐 소리를 낸다. 1114년(예종 9)에 송(宋)나라에서 편종과 함께 도입되었고, 그 뒤 한때는 경석을 구하지 못해 기와를 구워 대용한 일도 있다. 그러다가 세종 때 박연이 경기도 남양(南陽)에서 품질이 좋은 경석을 구하게 되어 비로소 악률의 기준이 될 만한 편경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보존하는 데 엄한 법규까지 마련한 바가 있었다. 틀을 세우는 방법은 편종과 같으나, 다만 방대(方臺;틀받침) 위에 놓인 것이 편종은 목사자(木獅子)인 데 비해 편경은 백아(白鵝;흰물오리)인 점이 다르다. 목사자는 음이 웅대함을, 백아는 음이 청아함을 각각 상징한다. 한편 편경의 ㄱ자형은 그 긴 쪽을 고(鼓), 짧은 쪽을 고(股)라고 하며, 그 비율은 음이 높아짐에 따라 작아진다. 음역은 황종(黃鍾;C)에서 협종(夾鍾;d)까지이다.
삭고 (朔鼓)
한국 전통음악에 사용된 타악기. 응고(應鼓)와 더불어 건고(建鼓)에 따르는 것으로, 궁중의 조회(朝會)와 연향(宴享)에 사용되었다. 한국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116년(고려 예종 11) 이후로, 송(宋)나라에서 보내온 대성아악에 입고(立鼓)·응고와 함께 비고라는 명칭으로 들어왔다. 긴 북통에 고리를 박고 나무틀에 매달아 사용하는데, 해를 그리고 흰색을 칠하여 낮을 상징한다. 응고와 모양은 비슷하나 조금 크다. 오늘날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응고 (應鼓)
북의 한 가지. 응비라고도 한다. 아악에 쓰이는 악기로, 마침을 조화시킨다[和終(화종)]는 뜻을 갖고 있다. 건고(建鼓)·삭고(朔鼓)와 함께 전정헌가(殿庭軒架)에 편성되었으며 삭고의 선창에 화응하는 북이다. 고려 예종 11년에 송(宋)나라에서 들여와 조선 말까지 사용되었다. 응고는 작은 북으로 양쪽 가죽면의 지름은 1자 3치이고, 북통의 길이는 2자 2치이며, 가운데 둘레는 5자 4치이다. 가자의 높이는 4자 2치 5푼이고 너비는 2자 7치 5푼으로, 중앙에 달을 그리고 붉은 색칠을 한다.
장구
국악에서 쓰는 타악기의 하나. 기다란 오동나무로 만든 것으로, 통의 허리는 가늘고 잘록하며, 한쪽에는 말가죽을 매어 오른쪽 마구리에 대고, 한쪽에는 쇠가죽을 매어 왼쪽 마구리에 대어 붉은 줄로 얽어 팽팽하게 켕겨 놓았다. 왼쪽은 손이나 궁글채로, 오른쪽은 열채로 치는데, 그 음색이 각기 다르다. 고려 시대에 중국에서 전하여 온 것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의 대표적 악기로서 반주에 널리 쓴다.
박 (拍)
박은 여섯 조각의 나무로 만든 악기이다. 음악과 무용의 진행을 알리고 지시하는 지휘용 타악기이다. 통일신라 이후부터 사용한 기록이 있고 고려 문종시대에는 대악관현방(大樂管絃房), 가무박업사(歌舞拍業師)가 있었다.
벽쪽에는 화성능행도병이다
명인실로 들어가본다
국악명인은 보통사람은 잘 모른다
소수에의해 명맥을 이어가는 우리국악
명인들이 사용하던 옷과 악기
악기전시실은 우리 전통 악기와 다양한 민족 악기들을 함께 살필 수 있는 곳입니다. 약 70여 종의 우리 전통 악기와 세계 여러 나라의 악기 140여 점을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로 나누어 전시하였습니다. 이 안에는 북한 악기 5점과 국립국악원과 교류하면서 기증되었던 외국의 악기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외에 물허벅 쌍피리 영각(나무나발)등 생활 속의 악기와 불교의식 등에 쓰이는 악기 9점, 국악기 전문악기장(樂器匠)이었던 남갑진(南甲振, 1943-1994)이 기증한 악기 73점을 전시한 코너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홈페이지에서
앞의두개와 가운데가 우리악기다
아쟁과 가야금
왼쪽이 해금, 가운데가 이디오피아악기 오른쪽이 중국악기다
위쪽이 한국악기
이것은 중국악기다
수공후
고대 아시리아에서 기원하여 페르시아·중국 등지를 거쳐 한국으로 수입된 듯한 서역계의 전래악기로 L자로 굽어진 틀에 21현을 매었다.
와공후
중국계의 와공후는 한국의 거문고와 비슷한 것으로서, 목이 굽은 모양이 봉황(鳳凰)의 형상이라 하여 봉수공후라고도 한다. 빗모양의 괘(줄받침)가 10여 개 있고, 줄은 13현이며, 학자에 따라서는 금(琴)과 슬(瑟)의 유사계(類似系)인 치터(zither)족으로 다루고 있다.
소공후
공후의 작은 모양으로 13현이다. 굽은 공명통 아래는 곧고 중간에 횡가가 있으며 공명통과 횡가 사이에 줄이 걸린다.
악기전시실 전경
여기는 세계각국 악기실이다
앞쪽은 우리악기
오른쪽 2개는 아프리카악기
다음방도 세계악기
우리의 향토악기라...
목탁,요령,단소,쌍피리...주위에서 쉽게 구할수있는것들로 구성된 악기들이다
이렇게 또 한면을 마치고, 다른방으로 들어간다
국악사실
악보와 악학궤범
이런것들이있어 전통음악이 전해내려오고있다
국악은 국악대로, 서양글래식은 클래식대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한바퀴를 돌았다
계단을 내려오며 답사를 마친다.
국악이 좀더 대중화되고 친숙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어렸을때부터 도레미파보다는 궁상각치우를 가르치면 될까?
이미 우리의 교육에 자리잡은 서양음계를 쉽게 바꿀수는 없을것이고...
국립국악원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