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강화산성 (江華山城) 1 : 남문-서문

메탈 2009. 4. 15. 15:39

종    목 : 사적  제132호 
명    칭 : 강화산성(江華山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784,170㎡ 
지 정 일 : 1964.06.10 
소 재 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시     대 : 고려시대
소 유 자 : 국유,공유,사유
관 리 자 : 강화군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고려 및 조선시대의 석축산성. 총면적은 307.1㎢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지은 것인데 1234년부터 본격적 공사에 들어갔다. 고려 때 쌓은 성의 구조를 보면 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의 형태를 취했는데, 이 중에서 내성이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1250년 축조했으며, 길이 약 9㎞의 토성으로 모두 8개의 성문이 있다. 외성은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각 주현의 일품군(一品軍)을 징발,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공사를 실시하였다.

 

몽골군을 막기 위한 중요 방위시설이었으며 강화성은 조선 초기에 다시 축성한 적이 있으나 병자호란 때 파손되고 1677년(숙종 2)에 대규모의 개축공사를 시작하면서 토성(土城)이던 것을 돌로 쌓기 시작하였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 있고 암문(暗門)이 4개, 수문(水門)이 2개 있다. 문루로는 남쪽에 안파루(晏波樓), 서쪽에 첨화루(瞻華樓), 북쪽에 진송루(鎭松樓), 동쪽에 망한루(望漢樓)가 있다. 사적 제132호.

 

작년에 강화산성을 다녀간 적이있는데, 그때는 사대문 주변만 보았다.

마침 월간 산 잡지에 강화산성 소개가 있어, 읽어보고 답사하기로 하였다.

시작은 접근이좋은 남문이다. 바깥쪽이다.

 

강도남문이란 현판.

 

문 좌우로 일부 복원되어 있다.

 

 

그러다 갑자기 끝난다. 약 30m정도.

 

남문 주위.

 

홍예문을 통과하면..

 

성 안쪽이다.

안파루(晏波樓)란 현판이 걸려있다.

 

 

복원공사 중이다.

총 600억가까운 예산으로 2012년까지 산성을 복원한다니...기대가 크다.

 

남문에서 남산방향으로 성곽을 따라가본다.

 

남문과 성곽모습이다.

 

여기부터는 성곽이 없다.

흔적만이 남아있을뿐...

 

 

남산쪽으로 성곽의 흔적이다.

복원공사를 위하여 주변정리를 깨끗하게 하였다.

 

따라가본다.

 

남산으로 향한다.

 

조선시대 해동지도.

김포의 문수산성과 가깝게 그려졌지만, 사실은 멀다. 

 

북문앞에 그려져있는 산성 안내도. 해동지도보다 못하다.

 

위로오르니 그제서야 약간 성곽의 흔적이다. 

 

저 언덕에서 능선으로 오른다.

 

뒤돌아 본 모습으로, 주변정리를 하니 성곽의 흔적을 알수 있다.

 

남산으로 향하는 길. 아래쪽으로 내려가보았다.

 

역시..성곽이다.

 

높이는 약 1.5m로 높지 않지만, 성곽의 모습이 잘 남아있었다.

 

 

 

성곽을 따라가본다. 주위를 깨끗이해서 여간 편한게 아니다.

 

 

남산까지 아주 잘 남아있는 성곽이다.

 

잘 살펴보면 성곽의 높이가 처음부터 높지않음을 알수있다.

저기에 여장이 있을뿐이었다.

 

크게 휘어 올라가는 성곽.

 

 

 

마치 뱀같다.

 

 

뒤돌아 바라본 모습.

 

남산이다. 위로올수록 성곽상태가 좋은것은, 사람들의 접근이 없어서일까?

 

마치 새로 쌓은듯한, 아주 깨끗한 성곽.

 

자연암반과 이어지는 성곽.

 

뒤돌아 본 모습.

 

 

정상이 가깝다.

 

 

성곽위로 올라왔다.

 

크게 S자를 그리며 올라오는 성곽.

 

1876년 사진이라는데 이근처에서 찍은것 같다.

이때만해도 여장이 잘 남아 있었다.

북문에서 내려오는 성곽과 견자산에서 이어지는 성곽도 잘 보인다.

 

정상부분의 성곽으로 남장대 발굴 조사중이다.

 

남장대 터.

 

남장대에서 이어지는 성곽. 서문 방향이다.

 

암문이 보인다. 부분적으로 무너진 상태다.

 

암문 바깥쪽.

 

안쪽모습.

 

 

여기부터는 성곽의 상태가 좋다.

 

 

누가 일부러 빼지않고서야, 저절로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성곽의 훼손이 많았다.

 

뒤돌아 본 모습.

 

서문으로 내려간다.

 

급경사를 이루는데, 많이 훼손되었다.

 

내려온 방향.

 

아래쪽은 깨끗하게 복원되었다.

 

 

서문가까이있는 수구문 위쪽 성곽.

 

강화 석수문 (江華石水門)

지정번호 :  인천유형문화재 제30호
지정연도 : 1995년 3월 31일
소장  : 국유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 685-1
시대  : 조선시대
크기  : 길이 18.2m, 높이 2.7m, 폭 4.7m
분류  : 성곽 건축

 

1995년 3월 31일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다.

강화산성(江華山城)의 내성에 연결되어 강화읍을 통하여 흐르는 동락천(東洛川)을 가로지르는 수문으로 1711년(숙종 37)에 축조되었으며 길이 18.2m, 높이 2.7m, 폭 4.7m이다.

3개의 월단(月團) 수문으로 되어 있는데, 각 수문은 화강암을 다듬은 선단석(扇單石)을 4∼5단으로 쌓아 이를 교각으로 삼고, 그 위에 매끄럽게 다듬은 월단석을 반원형으로 잇대어 아치를 이루도록 하였다. 아치와 아치 사이에도 다듬은 무사석으로 메워 올려서 아치석 윗돌과 평평하게 한 다음 그 위에 흙을 깔았다.

 

1910년 갑곶리(甲串里) 선착장을 신설하고 그 옆 동락천 하구(河口)의 교량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옮겨 시설하였다가 1977년에 다시 지금의 위치에 옮겨 복원하였다.

강화에는 또 1676년(숙종 2) 축조한 갑곶리 석수문(인천유형문화재 67)도 있는데, 역시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4단의 기단 위에 11개의 각석으로 홍예(虹霓)를 틀고, 홍예 사이에는 직사각형 대석으로 8층을 쌓아 단단히 축조한 것으로 갑곶진(甲串鎭)의 통로였다. - 두산백과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나무 뒤로 서문이다.

 

서수문 옆 연무당 옛터. 뒤로 남산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보인다.

 

강화산성 서문 건너편에 있는 연무당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최종 조인된 장소로 이 곳에서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의해 우리나라는 부산, 인천, 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하였다.
고종 7년에 창건된 연무당은 본시 지금의 상 시장 군 농협 자리 서쪽에 있었는데, 비좁아 동소문 밖으로 옮겼다가 내성서문 남쪽에 당을 세우고 그 전면에 조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연무당은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곳으로서 우리 민족의 암울했던 과거사를 잊지않기 위해 이 곳에 기적비가 세워져, 민족 자주의식을 드높이 간직해야 한다는 경고를 하고있다.

 

서문 첨화루(瞻華樓)다.

 

남문에서 서문의 성곽은 마을부근만 무너져 있을뿐, 산을 오르면 상태가 양호하게 남아있었다.

비록 여장은 다 무너졌지만, 성곽자체는 그대로 남아 옛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다행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