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남원읍성 (南原邑城)

오솔 길 2008. 11. 6. 17:42

종    목 : 사적  제298호 
명    칭 : 남원성(南原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지 
수량/면적 : 7,521㎡ 
지 정 일 : 1982.11.03 
소 재 지 : 전북 남원시  동충동 464-1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사유
관 리 자 : 남원시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지역에 소경(지방도시)을 설치하였고, 691년에 쌓은 네모난 형태의 평지 읍성이다.

1597년에는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성을 크게 다시 쌓고 수리하여 담을 높였다. 그해 8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왜군에게 크게 패했고, 이때 싸우다 죽은 군인과 주민들의 무덤이 만인의총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많이 허물어져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있다.

돌축대의 길이는 2.4km가 넘고, 높이 약 4m에 이르며 성 안에는 70여 개의 우물이 있었다. 성 내에는 남북과 동서로 직선대로가 교차하고, 그 사이에도 너비가 좁은 직선도로가 교차하여 바둑판 모양의 도로구성을 볼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 도시가 들어서며 성곽은 대부분 헐려나갔으나, 시내 중심부의 도로는 지금도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어, 과거 성내의 가로 구성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 읍성의 가장 전형적인 구조를 하고 있으며, 규모가 크고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네모 반듯한 구성과 성내의 가로가 직선으로 구성된 점이 흥미롭다. 

 

 

 

 

 

 

 

 

 

 

 

 

 

 

이것이 남원읍성의 전부이다.

 

하지만 아래 현황도와 비교해보면, 남원읍성의 전체크기를 비교짐작 할수가 있다.

남원성의 일반현황으로는 둘레가 약 3.5 km(동벽 866m, 서벽 850m, 남벽 870m, 북벽 855m, 성내 넓이 740.025㎡(223,858평)이고 높이 5.4m(18척), 치성 16개소, 옹성4개와 4대문, 치첩 1016개, 여장이 높이 있었고 해자(넓이 6m)와 마면 16개소이 있었던 조선8도의 유명한 백제식 읍성이다.


많은 사람들은 광한루와 오작교는 알아도 읍성은 모른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하찮은 돌담정도로만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400년전 이 성안에서는 왜군들이 쳐들어와 살육장을 만들었다. 1만 여명의 남원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 전투는 단 하루 만에 산자와 죽은 자로 승패가 갈렸다.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는 전투였다. 남원성을 포위한 왜군의 병력은 5만 6000여명 최정예군 이었다. 남원성의 우리군1000명과 청나라 군 3000명에 1만 여의 백성들이 전부였다. 북문을 지켰던 방어사 오응정과 김경로 구례현감 이원준이 수세에 밀리자 화약고에서 왜군을 안고 같이 자폭할 정도로 사기는 떨어졌다. 그리고 전투는 끝이 났다.
그 날 하루에 1만명이 죽었다. 성내 모든 건물들도 전소됐다. 싸움이 끝났는데도 왜군은 남원의 민초들까지 보이는 대로 살육했다. 심지어는 코와 귀를 잘라 본국으로 보냈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렇게 죽은 조선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 합장했다. 그곳이 바로 현재 성 밖 둔덕마루에 있는 만인의총이다. 숨져가면서도 이 땅을 지켰던 옛 사람들, 그들의 강직한 절개가 새삼 가슴을 적신다.

기록에는 남원에서 온전하게 목숨을 보존한 사람은 도공들뿐이었다. 남원성 전투가 끝나고 일본으로 끌려간 남원의 도공만 70여 명이었다. 일본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한다. 그때 도자기 제조 기술을 익혔기 때문에 나온 말들이다.
남원성은 통일신라 때 소경(지방 행정도시)을 설치하면서 읍성을 축성했다. 그 후 조선 초기에 언양읍성과 함께 네모반듯한 성으로 새로 고쳤다. 둘레는 2.5km, 높이가 4m, 사방에 문을 두었다. 성안에는 71개의 우물과 샘이 있었다. 조선시대 읍성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큰 규모의 성이다. 우리나라 읍성에서는 볼 수 없는 네모반듯한 축법과 성안에는 바둑판 같이 도로도 냈다. 
조선후기(1897)에 그려진 고지도 459장 중에서 걸작으로 평가받는 남원부지도는 아름다운 색상과 정교한 필체, 상세한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고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남원에는 2개의 성곽이 존재하고 있다. 시내의 중심을 두른 남원성과 외곽을 둘러싼 교룡산성이다. 옛 고을에 성곽이 두 곳에나 축성됐다는 사실은 그곳이 싸움의 세월이라고 할 수 있다. 그곳은 현재도 여전히 과거의 잔영 속에 묻혀 있다. 그래서 남원의 역사는 지킴의 역사다. 쉴 새 없는 침략으로 성곽은 함락됐고 무너졌다.
근대화 개발에 밀려 성은 목숨을 지키지 못했다. 전라선 철로가 놓이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성벽도 강제 철거됐다. 서쪽성벽 일부가 있었지만 최근 복원하면서 켜켜이 쌓인 고색은 이제 다시 볼 수 없다. - 데일리안 경기: 최진연 문화전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