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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환벽당 (環碧堂)

메탈 2008. 11. 6. 13:08

환벽당(環碧堂)

종    목 : 시도기념물 제1호 (북구) 
명    칭 : 환벽당(環碧堂)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면적 : 1동 
지 정 일 : 1972.01.29 
소 재 지 : 광주 북구  충효동 387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사유
관 리 자 : 정일택
상 세 문 의 : 광주광역시 북구 문화정보실 062-510-1225 


광주호 상류 창계천의 충효동 언덕 위에 높다랗게 자리잡은 정자로, 조선시대 때 나주목사 김윤제가 고향으로 돌아와 건물을 세우고, 교육에 힘쓰던 곳이다. 전에는 ‘벽간당’이라고도 불렀다. 송강 정철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머물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원래는 전통적 누정 형식이었으나, 다시 세우면서 가운데 2칸은 방으로 하고 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가 걸려 있으며, 임억령과 조자이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환벽당 아래로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가 있는데, 여기에는 김윤제와 정철에 얽힌 일화가 전한다. 어느날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이상히 여겨 급히 그곳에 내려가보니 용소에서 한 소년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소년의 비범한 용모에 매혹되어 데려다가 제자로 삼고 외손녀와 결혼시켰는데, 그가 훗날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정철이었다고 한다. 

 

 

 

 

연못에 물이 말라있었다.

 

 

 

 

 

 

 

가꾸어 놓지를 않아서, 정원이 아름답지가 않았다.

 

 

환벽당은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광주호 위에 있는 정자이다. 조선 명종 무렵 김윤제(金允梯1501∼1572)가 건립하였으며, '푸름을 사방에 가득 둘렀다'는 뜻을 가진 '환벽'이란 이름은 신잠(申潛)이 붙였다고 한다.
김윤제는 중종 26년(1531)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나주 목사 등을 지낸 인물로, 관직에서 물러나 이 정자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는데, 정철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에 연유하여 환벽당은 김윤제의 별서로서 뿐만 아니라, 정철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기까지 독서와 학문의 인연을 가졌던 유서 깊은 곳이다. 당시 인근의 식영정(息影亭) 및 소쇄원(瀟灑園)과 함께 '한 마을의 세 명승 (일동 삼승一洞三勝)'이라 일컬어지면서 많은 문인들이 출입하였던 문학 활동의 주요한 무대였으니, 송순ㆍ임억령ㆍ김인후ㆍ김성원ㆍ정철ㆍ백광훈 등의 시가 지금도 전한다.

그래서인지 환벽당은 소쇄원과 길하나 사이에두고있다.


 

취가정(醉歌亭)

취가정(醉歌亭)은 충장공 김덕령(金德齡)을 기려 그의 후손인 난실 김만식 등이 고종 27년(1890)에 창건하였다. 1950년 전쟁으로 소실되었으나 김만식의 후손 김희준 등에 의해 1955년에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 형태로 중앙에는 재실을 배치하였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었으나 선조 29년 이 몽학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받아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 그 후 현종 2년(1661)에 억울한 죽음이 신원되었으며, 정조 12년에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김덕령은 권 필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노래 '취시가'를 읊조리자 권 필이 노래로 화답하였다고 한다. 취가정 전면의 네 기둥에는 『충성은 일월을 꿰뚫고 기상은 산하를 울리느니, 취하여 땅에서 노래 부르자 그 소리 하늘에 들리네(忠貫日月 氣壯山河 醉歌於地 聲聞于天)』이라는 취시가(醉時歌)에서 따온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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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가정은 환벽당 바로 옆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