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명승 제40호
명 칭 : 담양소쇄원(潭陽 瀟灑園)
분 류 : 자연유산 / 명승/ 문화경관/ 원지
수량/면적 : 108,531㎡
지 정 일 : 2008.05.02
소 재 지 :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 등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사유
관 리 자 : 담양군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은둔생활을 하던 조선시대 선비의 별서원(別墅園)이다. 양산보(梁山甫)의 호가 소쇄옹(瀟灑翁)이었기에 원(園)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한 것이다.
소쇄원의 조성연대는 1520년부터 1557년까지 양산보(梁山甫)의 은둔생활(隱遁生活) 기간 중에 조성된 것이다.
이 원(園)의 조성사상을 보면 주자(朱子)가 중국(中國) 숭안현(崇安縣) 무이산(武夷山)계곡의 경승지인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현실(現實)을 도피하여 은둔하는 행동양식이 깔려있다.
원(園)의 구성을 보면 흘러내리는 계류가 암반을 타고 오곡(五曲)으로 흐르다가 폭포로 떨어져 작은 조담(槽潭)을 이루는 3천여평의 공간에 조성되어 있다. 계류를 중심(中心)으로 양쪽 언덕 임간(林澗)에 터를 잡아 광풍각(光風閣), 제월당(齊月堂), 초정(草亭), 화계(花階), 연지(蓮池), 석천(石泉) 등이 배치되고 물레방아와 석가산도 있었다. 그리고 계류 위에는 외나무다리와 죽교(竹橋)가 설치되고 원(園)의 구역은 아름다운 토석담으로 구획 지워져 있다. 담벽에는 「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소쇄처사양공지허(瀟灑處士梁公之虛)」의 글씨가 석판(石板)과 목판(木板)에 새겨져 박혀 있어 운치를 더한다. 원의 입구는 울창한 죽림(竹林)으로 외부(外部)와 막혀 있으며 원내(園內)의 식생(植生)은 죽(竹) 매(梅) 송(松) 행(杏) 괴(槐) 도(桃) 벽오동 유(柳) 자미(紫薇) 단풍(丹楓) 사계화(四季花) 치자(梔子) 국(菊) 부용(芙蓉) 순채 파초(芭蕉)를 심었던 것이다. 이러한 식생이 조선선비들이 좋아하였던 화목(花木)들이다. 지금도 넓은 소나무와 느티나무 목백일홍(자미(紫薇))의 원림(園林)이 계류와 정자들과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연지(蓮池)는 방형(方形)들인데 하나는 2.5m의 정방형이며 하나는 세로 5.5m, 가로 4m의 장방형이다. 이들 연못에는 계류의 물을 나무 홈대로 연결하여 넣었던 것이다.
이 소쇄원에는 김인후(金麟厚)가 1548년(명종(明宗) 3)에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의 48영(詠) 시(詩)가 남아 있다. 그리고 고경명(高敬命) 이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광주목사(光州牧使) 임훈(林薰)과 함께 광주 무등산(無等山)을 유락(遊樂)하면서 4월 23일 소쇄원에 들려서 보았던 계원(溪園)의 사실적 묘사가 「유서석록(遊瑞石錄)」에 남아있다.
또 소쇄원의 배치를 목판(木板)으로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있다. 이 목판은 가로가 35cm, 세로가 25cm로 양각으로 판각되었는데 1775년 4월 하순(숭정기원후 삼을해년청화 하완간(崇禎紀元後 三乙亥年淸和 下浣刊)에 제작했다는 판각기가 새겨있어 소쇄원의 원형(原形)을 상고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목판에는 위쪽에 김인후의 소쇄원 48제영(瀟灑園 48題詠)이 새겨있고 오른쪽 외곽에는 「창암촌 고암동 소쇄원 제월당 광풍각 오곡문 애양단 대봉대 옹정봉 황금정 유 우암선생필(창蒼巖村 鼓巖洞 瀟灑園 齊月堂 光風閣 五曲門 愛陽壇 待鳳臺 瓮井峰 黃金亭 有 尤菴先生筆)이라 새겨있다. 우암(尤菴)은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호이다. 이 소쇄원도(瀟灑園圖)에는 건물의 명칭 식물의 명칭 지당(池塘) 계류의 조담(槽潭)이나 바위 다리 물레방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입구 담벽에는 원래 김인후의 소쇄원 48영(詠) 수제(手題)가 편액으로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쇄원은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문아한 아름다움이 풍기는 조원이다.
대나무숲을 오르면 소쇄원이다.
각 건물의 설명은 소쇄원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다.
제일먼저 광풍각이 보이고...
앞에는 대봉대.
대봉대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대를 쌓고 정자(소정)를 지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대봉대는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는 ‘봉황새를 기다리는 동대桐臺‘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그 곁에는 봉황새가 둥지를 틀고 산다는 벽오동나무와 열매를 먹이로 한다는 대나무를 심었다. 또한 입구 쪽으로는 상지와 하지가 있고 바람을 막기 위해 애양단이 바로 앞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상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쇄원48영」중 많은 구절이 적용되는 장소 가운데 한 곳이며, 제 37영 ’동대하음桐臺夏陰’에서 동대 주변의 분위기를 노래하였다. 이러한 주변의 상황으로 보아 ‘동대’란 대봉대를 가리킨다. 이 대봉대의 넓이는 4m×2.5m이다. 현재 대봉대의 초정 옆에 심어진 오동나무는「소쇄원도」에 근거해서 15대손 양재영씨가 최근에 심어 가꾸고 있다. 중국에는 봉황새가 모여 살았다는 봉황새와 봉황산이 많다
광풍각앞 계곡이 멋있다.
광풍각은 소쇄원의 하단에 있는 별당으로 건축된 정면 3칸, 측면 1칸 전후퇴의 팔작지붕 한식기와 건물이다. 중안 1칸은 온돌방으로 뒷면에는 90cm 높이의 함실 아궁이가 있다. 방의 문턱에는 머름대를 구성하였으며, 문은 삼분합의 들어열개문으로 되어 있다. 막돌허튼층의 낮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으며, 주두와 소로, 장혀, 굴도리로 결구된 평5량가구이다. 천장은 연등천장과 우물천장을 혼합하였는데 서까래가 모이는 부분은 눈썹천장으로 되어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서까래는 선자서까래이다.
양산보가 계곡 가까이 세운 정자를 광풍각이라 하고 방과 대청마루가 붙은 집을 제월당이라고 한 것은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춘릉春陵의 주무숙(1017~1073)의 인물됨을 얘기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을 맑고 맑음이 마치 비갠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라고 한 데서 따온 이름이다. 어찌보면 처사로서 양산보의 삶이 마음에 맑고 깨끗함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광풍강뒤의 저 문을 지나면 제월당이다.
소쇄원은 크게 애양단, 오곡문, 제월당, 광풍각으로 나눌 수 있다.
애양단구역은 원립의 입구 쪽에 위치해 있으며 계곡을 감상하기에 좋다.
오곡문구역은 주변에 넓은 암반이 있으며 오곡문 옆에 있는
담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어 이곳으로 맑은 계류가 흐른다.
제월당은 정자라기 보다는 정사精舍의 성격을 띄는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독서하는 곳이었다. 당호인 제월霽月은 ‘비 갠 뒤하늘의 상쾌한 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소쇄원도」에 나타난 제월당이나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흥미롭다. 물론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지는 하지만 제월당은 『유서석록』이 제작된 당시인 1574년에는 아직 건립되지 않은 것이 아니냐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제월당에앞에있는 광풍각.
오곡문.
한국의 정서가 가득들어있는 소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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