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제통문 (羅濟通門)
전라북도 무주군(茂朱郡) 설천면(雪川面) 소천리(所川里)에 있는 석굴(石窟)로 된 통문. 높이 3m, 길이 10m. 바위를 쪼아서 만든 인공동굴로, 설천면과 무풍면(茂豊面)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에도 윗부분에 <나제통문(羅濟通門)>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 이 곳은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경계였다고 하며, 동굴 양쪽에 위치한 무풍 방면의 이남(伊南)과 무주 방면의 새말[新村(신촌)]은 1㎞ 정도 떨어져서 행정구역상으로는 모두 소천리에 속하지만 언어·풍속이 서로 다르고 통혼(通婚)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는 삼국시대와 관계된 유적과 전설이 많으며, 부근 야산에는 신라·백제가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약 300여 기의 고분이 있다. 또한 파리소(沼)라는 연못은 양국 격전 때 시체가 산처럼 쌓여 파리가 모여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이 통문은 삼국통일 시기에 신라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왕래하였다하여 <통일문(統一門)>이라고도 불린다. -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반대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전북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위치한 무주구천동 33경 중 제 1경인 '나제통문(羅濟通門)'은 높이 5~6m 너비 4~5m 길이 30~40m인 굴로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의 경계선 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굴이 삼국시대부터 있던 굴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뚫은 굴 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러한 사실을 추적해 역사 교과서에서 관련 내용을 삭제하게 만든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 상임연구위원인 역사학자 오재성씨는 “이 굴의 원래 이름은 기니미굴” 이라며 “1910년경 일본 사람들이 인근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용이하게 옮기고 그 지역의 농산물과 임산물을 신속히 옮겨가기 위하여 뚫은 굴로 당시 김천과 거창을 잇는 신작로였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당시 이 ‘기미니굴’을 중심으로 위쪽마을은 ‘기니미 마을’로 아래쪽은 ‘이미리 마을’ 이라 불렀다. 이 굴의 명칭이 바뀐 것은 1963년 무주구천동 33경을 만들면서부터. 이때부터 '기니미굴'이 '나제통문'으로 둔갑해 교과서에 등장했고 학생들의 수학여행 필수코스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지역 노인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지금은 굴을 뚫을 당시의 현장을 목격한 노인들은 모두 사망한 상태다. 그러나 무주군의 행정기록을 적어놓은 ‘무주군청지 적성지(赤城誌)’에 당시 공사를 한 작업일지가 적혀있다고 한다.
우리민족사연구회에 따르면 지리적으로 살펴봐도 무주에서 경상북도 김천시와 경남 거창으로 향하거나 반대로 그 쪽에서 무주로 들어설 때 반드시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 즉 이 굴은 현대에 와서 드나들기 편하게 만든 굴일 뿐이지 결코 삼국시대에 존재하던 굴이 아니란 것이다.
오재성 선생은 "이제는 교과서에서도 사라진 것을 아직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놀랍다” 며 “불과 몇 십년 전 일도 이렇게 왜곡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우리 역사적 진실을 사실 그대로 밝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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