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정(望遠亭)
종 목 : 시도기념물 제9호 (마포구)
명 칭 : 망원정지(望遠亭址)
분 류 : 자연유산 / 명승/ 문화경관/ 건물지
수량/면적 : 1,436㎡(1동)
지 정 일 : 1990.06.18
소 재 지 : 서울 마포구 합정동 457-1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서울시
관 리 자 : 마포구
상 세 문 의 : 서울특별시 마포구 문화체육과 02-330-2502
망원정은 조선 세종 6년(1424)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별장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세종 7년(1425) 가뭄이 계속되자 농민의 삶을 걱정한 세종이 농사형편을 살피기 위해 서울 서쪽의 넓은 들을 살피고, 효령대군이 살고 있는 이곳에 들렀다. 그런데 때마침 단비가 내려 온 들판을 촉촉하게 적시므로 왕이 기뻐하며 정자의 이름을 '기쁜 비를 만난 정자다'라는 의미의 희우정(喜雨亭)이라 하였다.
그 이후 성종 15년(1484)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정자를 크게 고치고 아름다운 산과 강을 잇는 경치를 멀리 바라본다는 뜻으로 이름도 망원정(望遠亭)으로 바꾸었다.
성종도 세종 때와 같이 매년 봄·가을 이곳에서 농사의 형편을 살피고 군사훈련을 관람하였다.
연산군 때는 이곳을 확장하기 위해 헐어내고 공사하던 중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공사가 중지되고 다시 망원정이 복원되기도 하였다.
망원정의 정면모습. 바로앞이 강변도로라 정면모습 담기가 쉽지않았다.
솟을대문의 정문인데, 아쉽게도 닫혀있어 뒤로 들어가야한다.
정자에서 보이는 강변모습. 자동차가 다녀서 옛정취는 보기 힘들다.
강 건너 선유도에서 바라본 망원정이다.
낙천정(樂天亭)
종 목 : 시도기념물 제12호 (광진구)
명 칭 : 낙천정지(樂天亭址)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면적 : 400㎡(1동)
지 정 일 : 1993.04.03
소 재 지 : 서울 광진구 자양동 673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서울시
관 리 자 : 광진구
상 세 문 의 : 서울특별시 광진구 사회문화과 02-450-1323
조선시대 태종(재위 1400∼1418)이 왕위에서 물러나 편히 쉬던 정자가 있던 곳으로, 어사각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1417년 9월에 짓기 시작하여 세종 1년(1419)에 완성되었으나, 지금의 낙천정은 1991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아파트 단지내에있어서 답답했지만, 그래도 이나마 보존된것이 다행이다.
정면모습으로, 낙천정의현판이 뒤쪽에 붙어있는것이 특징이다.
바깥쪽에서는 도저히 볼수가 없다.
계단 위아래에 해태모양의 사지상이 얹혀져있다.
용양봉저정(龍양鳳저亭)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6호 (동작구)
명 칭 : 용양봉저정(龍양鳳저亭)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면적 : 1동
지 정 일 : 1972.05.25
소 재 지 : 서울 동작구 본동 10-30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동작구
상 세 문 의 : 서울특별시 동작구 문화공보과 02-820-1261
정조(재위 1776∼1800)가 그의 부친 사도세자가 묻힌 수원 화산의 현륭원을 찾을 때 잠시 쉬던 정자이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현륭원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 때마다 한강에 배다리를 임시로 만들어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잠시 쉴 자리가 필요하여 이 정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 정조 13년(1789) 이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먹었기 때문에 주정소라 불리기도 하였다. 지을 당시에는 정문과 누정 등 2∼3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앞면 6칸·옆면 2칸 규모의 정자만 남아있다.
용양 봉저정은 가운데에 온돌방을 두고 양쪽으로 퇴칸을 둔 간소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바로옆에 건물의 주춧돌이 남아있다.
세검정(洗劍亭)
종 목 : 시도기념물 제4호 (종로구)
명 칭 : 세검정(洗劍亭)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면적 : 일원
지 정 일 : 1976.11.11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신영동 168-6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서울시
관 리 자 : 종로구
상 세 문 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문화진흥과 02-731-1170
세검정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도 하며, 연산군(재위 1494∼1506)의 유흥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도 전한다. 세검정이란 이름은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 때 이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날을 세웠다고 한데서 세검(洗劍)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정자는 평면상 T자형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영조 24년(1748)에 고쳐 지었으나 1941년에 불타 없어져서 1977년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검정은 평화를 상징하는 정자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었다는 점 등에서 한국적인 건축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선유정(仙遊亭)
선유정은 선유도가 개발로 망가지기 이전에 있었던 정자이다.
선유정수장을 생태환경공원으로 조성하면서 한강변에 소박하지만 전통미를 살린 선유정을 세웠다.
선유정은 시원한 한강의 물줄기를 바라보며 강북의 도시조망에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선유정자에 앉아 옛 선현들이 살아갔던 시대를 돌이켜보고, 각박한 현대생활의 시름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사색의 공간이다.
소악루(小岳樓)
소악루는 조선 영조(1724~1776, 재위) 때 동북 현감을 지낸 이유(李유)가 양천 현아 뒷산 기슭 강변 악양루터에 재건한 것이었다. 당시 이 누각에 오르면 안산, 인왕산, 남산, 관악산 등이 한눈에 보이고 탑산, 선유봉 및 드넓은 한강줄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등 진경이 펼쳐져 조관빈, 윤봉구, 이병연 등 당대 명사들이 이곳을 찾았다 하며,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제정선이 이곳 현령으로 있을 적에 그린 산수화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서 당시의 경관을 볼 수 있다.
소악루의 원위치는 [여지도서(與地圖書)], [양천군읍지(陽川郡邑誌)]와 정선이 그린 소악루, 소악후월(小岳候月) 등의 그림으로 짐작해 볼 때 강서구 가양동 산6-4(일명 세숫대 바위) 근처로 추정되나 주변의 변화가 극심하여, 한강변 경관조성 및 조망을 고려하여 현위치에 1994년 신축하였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28.35㎡)으로 화강석 8각 주초에 민흘림의 원주를 세우고 5량집 겹처마구조로 단층 팔작기와지붕으로 하고 주위에 난간을 둘러 한강경관을 조망토록 배치했다.
효사정(孝思亭)
소 재 지 : 동작구 흑석동 141-2번지(효사정공원)
효사정(孝思亭)은 세종조에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노한대감(盧?大監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 노한대감의 자는 유린(有隣)이며, 시호는 공숙공(恭肅公)이다. 노한대감이 모친을 여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던 자리(지금의 노량진 한강변자리)에 정자를 짓고 북쪽 개성에 있는 아버지 산소를 바라보며 추모했던 곳이다. 당시 동서지간이던 이조판서 강석덕(姜碩德)이 ‘孝思亭’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 정자는 효사정의 제자리를 찾기 위해 정인지(鄭麟趾)·서거정(徐居正)등의 시문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참고 하였으나, 주변 환경의 변화로 부득이 이 자리를 선정하여 신축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46.98㎡, 약 14평) 5량 집 구조와 검소한 민도리가구 구조의 팔작지붕에 온돌방 1칸을 겸한 정자형식으로 주위에 난간을 둘렀다.
나 어릴때부터 28살까지 살았던 흑석동. 이젠는 옛모습이 남아있지를 않는다.
용왕정(龍王亭)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해 지어진 이 정자의 이름은 ‘용왕정’.
옛 정자는 아니지만 그 역사적 의미로 올려보았다.서울 양천구 목2동 용왕산 근린공원.
‘임금이 꿈에서 누군가 자신을 해치는 꿈을 꿨다. 왕은 엄지산 아랫마을에 사는 영험한 힘을 가진 박씨 노인이 죽어서 용으로 변신한 뒤 왕이 되려 하는 것을 알고는 화살로 용을 쏘아 죽였다.’
왕에 얽힌 이 고사 때문에 왕을 상징하는 ‘용(龍)’자와 ‘왕(王)’자를 합쳐 용왕산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
무계정사(武溪精舍)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22호 (종로구)
명 칭 : 무계정사지(武溪精舍址)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건물지
수량/면적 : 1동
지 정 일 : 1974.01.15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부암동 319-4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정상해
관 리 자 : 정상해 외
상 세 문 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문화진흥과 02-731-1170
무계정사지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사용하던 정자인 ‘무계정사’가 있던 터이다.
안평대군은 무계정사에 1만 권의 책을 갖추고 용산 강가에는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선비들과 함께 시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대군이 역모로 몰려서 사약을 받고 죽은 단종 1년(1453) 이후에는 이곳도 폐허가 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한편 이곳에는 커다란 바위면에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무계동(武溪洞)’이란 글씨가 큰 현판 모양으로 새겨져 있어 이곳이 ‘무계정사’가 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무계정사가 있던자리에는 소설가 현진건의 집이 들어서있다.
밖의 길에 청계동천이란 음각이 있는것으로보아, 이곳도 멋있는 계곡이었던 모양이다.
백사실(白沙室)
종로구에서는 부암동 백사골 일대에 위치한 약 1,500평 규모의 전통건물터 및 정자터, 연못터 등 문화유적 5곳과 이곳으로부터 100m가량 떨어진 백석동천(白石洞天) 각자바위 등이있고, 2005년 3월 25일자로 사적 462호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연못의 정자터에는 정육각형 형태의 초석 6개와 계단까지 남아 있으며, 연못 옆의 계단을 오르면 조선시대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별장터로 전해지고 있는 백사실이 있다. 지금은 ‘ㄱ’자형 건물터에 초석 15개와 장대석 기단 만이 남아 있다.
바위에 백석동천(白石洞天)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렇게 바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각자(刻字)바위라고 한다. 또한, 동천(洞天)이란 산과 계곡의 경치가 좋은 곳을 말하는데, 부암동에 백석동천, 청계동천(무계정사지)이란 각자바위가 두 곳이나 있는 것을 보면 이 곳이 예부터 경치가 좋았던 모양이다
서울 한복판에 이렇듯 호젓한 길이 있는것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백석동천 글자가 새겨진 바위.
오솔길을 조금 내려가니 백사실이다.
백석동천인데 비가안와서 물이 없었다.
연못으로 지금은 물이 말라 없다.
정자가 있던 자리다.
방금전에까지 정자가 있던것 같은 생동감을 느낀다.
연못건너 정자 반대쪽으로 건물터다.
이곳도 주춧돌만 남아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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