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포로수용소는,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에 의하여 발생한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1950년 11월 부터 고현,수월지구를 중심으로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기 시작하여, 1951년 6월까지 인민군포로 15만여명,중공군포로 2만여명등 17만3천여명의 포로들을 수용하였으며, 그중에는 300여명의 여자 포로도 있었다.
그러나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간의 유혈살상이 자주 발생하였고, 1952년5월7일에는 수용소 사령관인 돗드준장이 포로에게 납치 감금되어 4일만에 석방되는 사건까지 있는 곳이다.지금은 잔존건물 일부와,당시 상황을 재현한 막사와 기념관이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1983년 12월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99호로 지정보호되고 있으며,전쟁 역사의 산 사회교육장으로, 그리고 셰계적인 전쟁 비극의 산 교육장으로 보존하기위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관을 건립 당시의 막사재현,사진,의복,무기 등의 관련자료 등을 수집전시 하고 있다.
포로수용소 설치 배경
일찍이 포로의 수가 증가하고 그들을 수용관리하는 문제가 어려워질 조짐이 보였을 때, 유엔군사령부는 그 대책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포로를 분산시켜야 할 필요성과 공산포로들에 의해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려된 대책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지고 육지와도 격리된 섬으로 포로 를 옮겨 놓는 방법이었다. 이때 유엔군사령부가 수용소 후보지로 생각한 섬이 제주도였다. 그러나 결국 거제도가 포로수용소 적합 지역으로 판단되었는데 그 이유는 ①(섬이기 때문에) 포로 관리에 최소의 인력과 경비가 소요될 것이다. ②급수가 용이하다. ③포로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장소가 있다는 점 등이었다.
수용인원
포로수용소가 이전된 후로 계속되는 포로의 이송을 통해 거제도에는, 통계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17만 명에 이르는 전쟁포로들이 모이게 되었으며, 포로를 경비하는 부대병력과 행정인원 등이 합쳐져서, 자체 인구 약 10만 명의 세배 이상이나 되는 사람으로 섬이 포화 상태가 된 듯 하였다. 이렇게 해서 다음 해인 1952년 포로의 분리, 분산 작전에 의해 이곳에 있던 대부분의 포로들을 다른 여러 수용소로 옮기게 될 때까지 약 1년 남짓 동안 거제도는 포로수용소의 주 무대가 되었다.
포로관리의 성격
전쟁 전 기간을 통하여 북한 및 중공군 포로에 대한 한국군 및 유엔군 측의 관리 및 대우의 실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모든 수용소의 위치도 공개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백색 또는 황색으로 PW표지가 되어 있어서 수용소 상공을 비행하는 항공기가 이 표지를 관측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공산군 측의 포로 관리의 실상이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현상이었다.
1.탱크전시관-북한국의 남침용 선봉에 섰던소련제t-34 탱크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2.디오라마관-단일 "디오라마관" 으로는, 세계 최대규모로, 포로수용소 옛 현장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3.북한군 남침-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4시를 기해 북한군의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남침을 감행한 자료가 전시 되고있다.
4.6.25역사관-전쟁 발발 에서 휴전에 이르기 까지 한국 전쟁 속 삶의 모습등이 재현된 전쟁역사의 살아있는 교육장 이다.
5.대동강 철교-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후퇴하게된 피난민들이 폭파된 평양 대동강 철교를 필사적으로 넘나드는 자료가 전시되고있다.
6.포로생활관-제네바 협정에 의거하여, 자치적으로 운영된 포로수용소 생활중 포로들의 일상생활 모습을 엿볼수 있다.
7.포로생포관-국군과 유엔군의강력한 반격과공세에 투항하는 북한군의모습을 볼수있다.
8.포로사상대립관-내무반의 모습과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사상대립이 매직 비젼을 통해 설명되고 있다.
9.여자포로관-일부 여자 포로들도 생포되어 그들도 남자 포로와 동일한 수용소 생활 모습을 볼수 있다.
10.포로폭동체험관-친공포로들의 폭동과, 친.반공포로들의 격돌장면이 첨단 복합 연출기법으로 만날수 있다.
11.포로설득관-포로교환에 앞서 진행되었던 심사과정과 결과 등 역사적 사실을 다양한 연출 기법으로 만날수 있다.
12.포로귀환및 송환-열차에 넘실대는,태극기의 물결속에 자유를 되찾은 포로들의 함성을 들을수 있다.
13.유적관-각종 사건에 대해 실물기록에 의한 실증적인 박물관으로 전시실 및 영상실이 있다.
14.야외막사-막사와 감시초소,야전병원 생활도구 까지 완벽하게 재현된 실물공간이며, 영화"흑수선"의 촬영 현장이기도 하다.
15.잔존유적지-경비대장 집무실.경비대 막사.p.x.무도회장 등 잔존유적의 실물을 만나 볼수 있다.
http://www.pow.or.kr/_main/main.html
주차장으로 들어가면 넓다란 공원이다.
한줄로 따라가면 다 볼수있게 되어있다.
매점도 수용소 모양을 하고있었다.
공원내의 이정표.
입구가 독특하다. 6.25남침때의 북한군 T34 탱크모형이다.
그렇지만 탱크가 전시되어 있는것은 아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면, 좌 우로 6.25당시의 관련인물들이 판넬로 서 있었다.
왼쪽이 김일성을 시작으로 스탈린,모택동..오른쪽이 이승만,트루만,맥아더...순이다.
출구다.
다음이 포로수용소 디오라마관.
당시 수용소의 규모이고...
수용소의 생활상을 나타내는 디오라마.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대 잘못만난 민초들의 모습이다.
밖으로 나오면 6.25 역사관가는길에, 북한군 남침모형이다.
이것은 전쟁기념관 것과 똑같다.
이런것을 보면 뭔가 필요이상으로 예산을 쓴것같은 느낌이다.
6.25 역사관
어렸을때부터 귀에 못이박히게 들은 내용이다.
이어서.. 끊어진 대동강철교를 건너는 피난민 모습.
기왕에 할려면 뒷 배경좀 크게하던지...카메라에 전체가 쏙 들어가게...
MP 다리를 건너면...
포로 생활관이다.
그리고 수용소 막사형태의 놀이터도 있다.
애들이야 즐겁지...
포로생포관인데..웬지 사족이다.
이런 뻔한내용,뻔한장면에 얼마를 썼을까?
좀더 상황연출이나 전시효과에 신경써야 했는데...
왼쪽으로 수용소 실제모습을 재현한 장소가 보이는데, 맨 나중 코스다.
포로수송에 관한 모형.
이곳은 반공포로와 공산포로의 갈등을 재현한 곳이다.
나름대로 매직비젼으로 포장했으나, 이제는 이념대결이란것이 사회이슈에서 관심밖이라...
여자포로관은 여자포로에 대해, 모형과 판넬로 구성되어 있었다.
포로폭동 체험관
어렸을때 가본 귀신나오는 체험관 같았다.
포로설득관
사실 이런것 전시연출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위의 담장이 철조망으로 되어있어서, 나름대로 그때분위기를 나타내려한다.
유적관을 지나면..
포로수용소 야외막사다.
78수용소라는데, 400여명의 반공포로가 처형된 9.17폭동의 주동 수용소란다.
위병소를 지나면..
본격적인 포로막사다.
밥하는곳의 모습이다.
건물 안에서만 밥하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화장실이다.
수용소 특성상 용변볼때도 노출시켰을 것이다.
막사인데 1951년 전쟁초기에는 천막막사로 포로들을 수용하고 내부에는 가마니등을 깔았다가, 이후 포로의 수가 늘어나자 자체인력으로 흙벽돌 막사를 세웠다.
천막막사 내부모습.
흙벽돌 막사다.
내부모습.
잔존하는 당시의 막사잔해를보며, 유적지 답사를 마친다.
저때 태어나지 않은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우리세대는 과연 행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