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징을 고루 갖춘 근대초기 군사건축물의 뛰어난 모범이다.'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세계유산위원회 집행이사회의 화성에 대한 평가의 일부이다.
종 목 : 사적 제3호
명 칭 : 화성(華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188,048㎡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경기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0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수원시
화성은 정조가 부왕인 장조에 대한 효심과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정조 18년(1794) 1월에 착공하여 정조 20년(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성의 둘레는 5,744m , 면적은 130ha로 기능에 따라 48개의 시설물이 축조되었으며 주요시설 23개소에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한국고유의 누각을 설치하였다. 성의 모양은 가로로 길게 비스듬하여 봄의 버들잎 같으니 이것은 유천(柳川)의 지명에서 취하였고, 성의 이름을 華城이라 한 것은 장조의 원침이 있는 花山의 「花」와 「華」가 서로 통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이전에는 성벽을 돌로만 쌓았으나 화성에서 처음으로 벽돌을 사용하였다. 성벽은 지형에 따라 4-6m이며 평균 5m정도이며 순수한 성벽은 돌로 쌓았고 방어시설은 벽돌을 이용하였다. 성벽위의 담장모양의 여장(女墻)은 높이가 1-1.3m정도이며 모두 벽돌로 쌓았고 총구를 규칙적으로 뚫어놓았다.
화성의 특징과 우수성은 대체로 다음 3가지 정도로 간추려진다.
1) 뛰어난 군사적 방어시설이다. 조선의 대부분의 성은 임진왜란때 대부분 무참히 허물어졌다.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후 저서 징비록에서 "성곽에는 반드시 옹성(甕城)과치성(雉城)이 갖추어야 한다."고 거듭 역설하였다. 화성은 동서양 성곽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장점을 취하였으며, 공심돈(空心墩)과 현안(縣眼)은 화성에만 있는 시설물이다.
2) 정치.경제.문화적인 기능도 강하다. 도시기반 시설인 4대문, 도로, 수문과 교량, 상가를 설치하고 생산기반 시설인 저수지와 둔전을 경영하여 세계최초의 계획된 신도시를 이루었다.
3) 건축사적 가치이다. 화성은 한국전통건축의 완성품으로 축성의 계획, 제도, 법식, 인력, 재료의 출처와 용도, 공사일지 등이 완벽하게 남아있다. 정조는 공사가 끝나자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케 하였으니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바로 그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축성을 감독.계획하였는데 당시 규장각 문신인 그는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삼았고, 특히 다산의 발명품인 활차와 거중기(요즘의 크레인으로 2만5천근의 무게를 들어올릴수 있었다.)가 큰 역할을 하여 공사기간을 종전의 5분의1로 단축시킬수 있었다. 성역공사는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가 지휘하였다.
役事에 참가한 인부에 대하여는 일체의 부역을 금하고 임금을 주어 부려 사기를 높혔다.
당시 동원된 인원, 연 동원일수, 사용된 벽돌의 수, 임금, 설계도 등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당시의 경제. 사회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건축실명제가 실시된 최초의 건축물이기도 하다.
축성당시의 주요 군사시설물로는 문루(팔달문,화서문,장안문,창룡문) 4, 암문(暗門) 5, 수문(水門) 2, 적대(敵臺) 4, 공심돈(空心墩) 3, 봉돈(烽墩) 1, 포루(砲樓) 5, 장대(將臺) 2, 노대 2, 치성 9, 은구 2, 각루(角樓) 4, 포루(㉿樓) 5 등 총 48개가 있었고 성내에는 行宮도 마련하여 왕이 머물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수해와 전란으로 복원되지 못한 시설물도 7개(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개가 있어 41개 시설물이 남아있다.
팔달문(八達門) 보물 제402호
조선 후기인 1794년에 세운 화성의 남쪽 문으로, 문의 이름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화성의 4성문 중 동쪽문과 서쪽 문에 비해 북쪽문과 남쪽 문은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 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서울성곽의 동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 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벽돌로 마감된 팔달문 옹성은, 다른 성문과 다른 느낌이다.
우진각 지붕형태이며, 벽돌옹성은 오히려 얇은 모습을 하고있다.
옹성문에서 바라본 정문.
실제크기가 불타버린 남대문(숭례문)보다 크단다.
정문에서 본 옹성.
안쪽에서 바라본 팔달문이다.
이제 성곽을 따라 가본다.
팔달문에서 약 100여m는 건물이있어 끊어져있다.
맨먼저 남치(南雉)다.
성곽에서 바깥쪽으로 튀어나오게한 시설물로 성벽가까이 다가온 적을 공격하기위한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10개의 치(雉)가있다.
남치모습.
그리고 언덕중간에있는 남포루(南砲樓)
포루(砲樓)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치섬과 유사하게 축조하면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 그 안에 화포 등을 감추어 두었다가 위. 아래와 삼면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성곽시설물중에서 가장 중무장된 시설이라 할 수있다.
화성에는 벽돌을 사용하여 모두 5개의 포루(남포루, 서포루, 북서포루, 북동포루, 동포루)를 만들었는데, 서포루만 약간 작고 4개의 포루는 동일한 규격이다. 포루는 3층으로서 지대 위에 혈석(穴石: 대포발사를 위해 구멍을 뚫은 돌)을 전면 2개, 좌우 3개씩 놓았다. 그 위에 벽돌을 쌓았고 안쪽으로 판자를 잇대어 2층으로 구분하였으며, 총혈 15개를 만들었다. 지대 위에 뚫은 혈석은 포루(砲樓)에서만 볼 수 있는 시설이다.
이어서 서남암문.
지금까지 지나온곳의, 밖의 모습을 보기로하자. 성 밖으로 나와서...
남포루(南砲樓) 모습이다.
성곽과 여장의 모습이고...옥개석과 미석이 벽돌로 되어있다.
서남암문까지 뻗어올라간다.
다시 서남암문으로 들어섰다.
서남암문은 서암문의 남쪽 367보 되는 곳에 있는데 용도(甬道)가 실지로 시작되는 곳이고 화양루의 통로가 된다.
벽돌로 된 홍예는 안쪽의 너비가 7척 높이가 8척 5촌이고 바깥 너비 6척 높이 8척이다. 위에는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으며 그 안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포사(鋪舍)이다. 서남포사는 암문 위에 있어 높은 곳에 의거해서 멀리까지 볼수 있기 때문에 군졸을 두어서 경보를 알리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집의 제도는 사방 1간이고 높이는 8척 5촌이다. 여기에 온돌 을 놓고 사면에 판문(板門)을 설치하고 그 바깥 쪽에 짐승의 얼굴을 그리었는데,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다.
안쪽에서 바라본 서남암문이다.
이 끝에 서남각루가 있다.
길게 뻗은 용도(甬道)다.
서남 각루는 화양루(華陽樓)라고도 하는데, 용도(甬道)의 남쪽으로 멀리 떨어지고 높은 지점 경치좋은 곳에 따로 우뚝 서있다.
누의 규모는 6간인데 남북 21척, 동서 14척, 남쪽으로 2간은 판자를 깔고 난간을 둘러치고, 삼면에 판문을 내었다. 그리고 북쪽에는 분합을 내고, 분합의 밖으로 4간에는 메모난 벽돌을 깔았다.
이 벽돌로부터 판자를 깐 데까지의 높이 1척 7촌 석체(石)에서 벽돌을 깐 데까지 높이 2척, 단청은 5토를 썼으며, 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옛날 제도에 따르면 용도(甬道)란 것은 군량을 운반하기 위하여 보이지 않게 낸 길이다.
지금의 남쪽 기슭 한 가닥은 성 밖으로 나와서 별안간 높이 솟아 사방의 들을 내려다 보게 되어 있다. 만약에 이 곳을 막아 지키지 않아서 적군이 먼저 올라가게 한다면 성의 허실을 모두 엿보이게된다.
비록 양식을 운반하는 길은 아니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곳이다. 그러므로 산 위의 3면에 돌로 성가퀴를 쌓았으니, 두께가 4척이고 안의 높이 5척이며, 북쪽으로 서남암문의 바깥 쪽과 이어지게 하였다. 좌우의 길이 각각 177보, 성가퀴 안의 너비 6보이다.
암문에서 84보 되는, 동쪽에 하나의 치성(雉城)을 설치하였고, 또 10보쯤 서쪽에 하나의 치성을 설치하였다.
남쪽 끝에서 15보 떨어진 곳에서 두 번 구부려서 넓혔다. 위의 구부러진 곳의 너비 9보, 아래의 구부러진 곳의 너비 11보로서, 이것이 화양루의 터다. 3면의 둘레는 367보이다.
용도중간에는 용도동치(甬道東雉:서남일치))가 용도서치(甬道西雉:서남이치)와 마주하고있다.
다시 서남암문으로 나와 밖의모습을 본다.
밖은 생각보다 높이가 낮았다.
여기까지 올라온 적은, 기진맥진하여 쉽게 제압할수있으리란 생각이었을까?
서남암문 바깥모습이다.
서남각루.
다시 성안으로들어와 성곽을 따라간다.
서삼치(西三雉)를 지나..
성곽을 따라가면 서포루(西砲樓)다.
서포루(西砲樓)는 서암문의 남쪽 126보의 거리에 있는데, 제도는 동북포루와 같다. 치성이 성 밖으로 22척 8촌이 나왔다. 외면의 너비 30 척이고,현안(懸眼) 1구멍을 뚫었다. 5량으로 집을 지었는데,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다. 7영(七楹) 3간이고, 높이는 여장 위로 6척 8촌이 솟았는데, 전체 높이는 13척이다.
여장의 3면은 모두 벽돌을 사용하였고, 여장 안은 벽등()을 이중으로 쌓았는데, 아래 위에 네모난 총안 구멍 19개[사방 각 9촌], 누혈(漏穴) 11개[사방 각 4촌]을 뚫어 놓았다.
누의 위 4면에는 판문을 설치하고 외면과 좌우에는 사안(射眼)을 내어 놓았다. 내면에 벽돌 층계를 설치하여 오르내리게 하였다.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고, 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서장대로가는부분의 성곽여장이 다른곳과 좀 달랐다.
서장대(西將臺)가 보인다.
성곽밑에 총안인지...
서장대에 오르니 장안문이 한눈에 보인다.
서장대(西將臺). 화성장대라 쓰여있다.
서노대
서노대는 장대의 뒤에 있는데, 『무비지(武備志)』에 이르기를, 노대는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야 하며, 대 위에 집을 짓되 모양이 전붕과 같이 하고, 안에 노수(弩手)가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서장대와 서노대.
서남암문부터 밖에서 본 모습이다.
서삼치(西三雉)
그리고 서포루(西砲樓)다.
성곽을 계속가면 서암문이다.
서암문에 이르자 벽돌로 바뀐다.
수구의 모습.
서암문
서암문은 서장대의 남쪽 44보 되는 곳, 즉 팔달산 남쪽 기슭 사이에 있다.
성을 쌓은 것이 꺽이어져 있어 문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문이 있는지 모른다. 벽돌로 홍예를 만들었는데 안 쪽의 너비는 5척 6촌 높이는 7척 7촌, 바깥 쪽은 4척 1촌 높이는 7척 2촌이다.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고 나머지는 다른 곳의 제도와 같다.
문은 산의 허리에 있고 길은 성 위로 났기 때문에 문 안의 체석(石)은 저절로 네모난 구덩이가 되었다. 돌층계를 북쪽에 설치하여 아래 위로 드러난 길과 숨겨진 길을 통하게 하였다.
암문답게 바깥쪽벽이 돌출되어 문이 안 보이게끔 되어있다.
직각으로 꺾어지는 모습이 다른 암문과 다르다.
아까 총안의 구멍이 밖에선 이렇게 보인다.
이제 서장대에서 성곽을 따라 다시 내려선다.
서장대에서 내리막이다.
서이치(西二雉)를 지나고...
내리막을 계속가면 서포루(西砲樓)다.
서포루(西砲樓)
서포루는 서암문의 남쪽 126보의 거리에 있는데, 제도는 동북포루와 같다. 치성이 성 밖으로 22척 8촌이 나왔다. 외면의 너비 30 척이고,현안(懸眼) 1구멍을 뚫었다. 5량으로 집을 지었는데,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다. 7영(七楹) 3간이고, 높이는 여장 위로 6척 8촌이 솟았는데, 전체 높이는 13척이다.
그리고 서일치(西一雉)다.
서일치를 지나면 이어서 서북각루(西北角樓)다.
서북각루(西北角樓)는 화서문의 남쪽 146보쯤 되는 거리의 산 위의 휘어 굽은 곳에 있다. 동남 1간은 청판(廳板) 아래를 벽돌로 담을 둘러치고, 온돌을 설치하여 수직하는 군사가 있게 하였다.
서북각루(西北角樓)에 올라서니, 화서문(華西門) 옹성과 서북공심돈(西北空心敦)이 보이고, 북포루(北砲樓) 저 멀리 장안문(長安門)이 보인다.
뒤돌아본 서포루(西砲樓)와 서일치(西一雉).
서북각루(西北角樓)를 뒤로하고 화서문(華西門)으로 내려선다.
화서문(華西門)과 서북공심돈(西北空心敦).
화서문(華西門)이다.
서장대부터 바깥쪽의 수원화성을 보자.
서장대에서 내려오니 서이치지나 서포루(西砲樓)다.
다시 성곽을 타고 내려간다.
서일치(西一雉)가 보인다.
밖에서 바라본 서일치(西一雉).
이어서 서북각루(西北角樓).
서일치(西一雉)와 서북각루(西北角樓).
성곽이 길게 화서문(華西門)으로 연결된다.
바깥쪽에서 본 화서문(華西門)과 서북공심돈(西北空心敦).
옹성입구다.
참고
화성은 한국전통건축의 완성품으로 축성의 계획, 제도, 법식, 인력, 재료의 출처와 용도, 공사일지 등이 완벽하게 남아있다. 정조는 공사가 끝나자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케 하였으니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바로 그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축성을 감독.계획하였는데 당시 규장각 문신인 그는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삼았고, 특히 다산의 발명품인 활차와 거중기(요즘의 크레인으로 2만5천근의 무게를 들어올릴수 있었다.)가 큰 역할을 하여 공사기간을 종전의 5분의1로 단축시킬수 있었다. 성역공사는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가 지휘하였다.
役事에 참가한 인부에 대하여는 일체의 부역을 금하고 임금을 주어 부려 사기를 높혔다.
당시 동원된 인원, 연 동원일수, 사용된 벽돌의 수, 임금, 설계도 등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당시의 경제. 사회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건축실명제가 실시된 최초의 건축물이기도 하다.한국전쟁을 겪으며 파손된 성곽의 복원이 가능하였던 것도「화성성역의궤」10권 10책에 근거함인데 이처럼 중요한 서적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지 않고 있음은 유감이다.
거중기
현재 팔달문과 동남각루 사이의 493m 구간은(실제 가보면 팔달문에서 동남각루 쪽으로 200m, 남포루쪽으로 100m가 정확함) 이미 민간건물이 들어서 복원치 못하였고, 행궁과 화령전은 복원작업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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