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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華城)2 - 화서문(華西門)에서 창룡문(蒼龍門)

메탈 2008. 7. 28. 13:05

화서문(華西門)

화서문[편액은 좌의정 채제공이 썼다]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묘좌(卯坐) 유향(酉向)에 자리잡고 있다.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꺽어지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협도는 둘을 세웠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 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화서문(華西門) 옹성.

 

옹성안에서 본 화서문(華西門)모습.

 

안쪽이다.

 

 

옹성부분.

 

옹성과 서북공심돈(西北空心敦).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북치(北雉) 위에 있다.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벽돌로 삼면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둔다. 그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를 만들고 나무 사닥다리를 사용하며, 위아래에 공안(空眼)을 많이 뚫어서 바깥을 엿보는데 편리하게 한다. 불랑기(佛狼機) 백자총(百子銃)들을 발사하여도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지금 이 제도를 본떠서 치(雉)에다가 돈(墩)을 설치하였는데, 치의 높이 15척, 서북 이면(二面)에 각각 현안(縣眼) 2구멍을 내었고, 그 위에 벽돌로 쌓아서 그 속을 비게 하고, 위에다 가로 세로 2간의 집을 지었다.
벽돌로 쌓은 것이 높이 18척, 아래의 너비 사방 23척, 위의 줄어든 너비 사방 21척이다. 상청판(上廳板)과 하청판의 2판을 설치하여 누(樓)일 경우에는 2층으로 하고 포(鋪)일 경우에는 3층으로 하여 층마다 벽돌로 된 면에 불랑기를 쏘아댈 포혈(砲穴)[사방 1척]을 내었다.
상층의 벽돌로 된 면 위 쪽은 판자로 둘렀으며 문마다 각각 전안(箭眼)을 뚫었다.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고 대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중층과 상층에는 각각 청판(廳板)을 여는 사방 3척의 덮개판 하나를 만들어, 밀고 당겨서 열고 닫게 하여 나무 사닥다리로 된 오르 내리는 길과 통하게 하였다.
아래 층 안쪽에는 벽돌로 된 홍예 모양의 작은 문을 내었다.

 

 

서북공심돈을 지나 북포루(北鋪褸)다. 산책하기 좋게 되어있었다.

 

북포루(北鋪褸)

북포루는 북서포루의 서쪽 129보 5척의 거리에 있다.
치(雉)가 성 밖 19척까지 튀어 나왔다. 외면의 너비 27척, 5량 집을 지었다. 사방 2간인데, 구조는 동북포루와 같다.
3면의 평평한 여장은 누의 바닥과 이어지며, 각각 포를 쏘는 구멍을 내었고 안쪽에 나무사다리를 설치했다.

 

 

북포루에서 뒤돌아본 모습.

서북각루, 화서문, 서북공심돈이다.

 

이어서 북서포루(北西砲褸)

지붕모양이 보행에방해받지 않도록 배려되었다.

북서포루는 성밖으로 약 8.8m 돌출되어있으며 지붕의 형태가 성안쪽은 맞배지붕형식, 바깥쪽은 우진각 형식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북서쪽에 위치한 북서포루는 검정 벽돌을 쌓에 치성과 같이 성밖으로 돌출시키고 내부는 나무판을 이용하여 3층으로 구획하였으며 포혈을 만들어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와 아래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서포루를 지나자, 장안문(長安門)이 보인다.

 

장안문 좌측에 북서적대(北西敵臺).

적대(敵臺)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북서적대(北西敵臺) 안쪽모습이다.

 

홍이포다. 700m를 날아간다는데 차체폭발력이 없어 생각보다 위력이 작은 포다.

 

장안문(長安門)

장안문[편액은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이 썼다]은 성의 북문이다.
행궁의 왼쪽 편인데 동쪽으로 780보되는 곳에 사좌(巳坐) 해향(亥向)으로 앉았다. 문의 안과 밖은 홍예로 되어 있다. 안쪽 홍예는 높이 19척 너비 18척 2촌이고, 바깥 쪽 홍예는 높이 17척 5촌, 너비 16척 2 촌, 전체 두께는 40척이다.

 

뒤돌아본 성곽모습.

 

장안문 옹성으로 들어가본다.

 

북옹성은 장안문의 외성이다. 성서(城書)에는 옹성의 크기는 정성(正城)의 대소에 따르며 모양은 옹기를 반으로 나눈것과 같다고 하였다. 문위에 적루(敵樓)를 세우지 않는 것은 정성이 가로 세워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옹성은 정문 좌우의 무사에서 각각 7보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벽돌을 쌓아서 성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17척 안쪽 둘레는 159척 6촌 바깥 둘레는 209 척이고, 아래는 두께가 15척이고 위는 줄어 들어서 12척이다.

 

 

 

반바퀴 돌아서 반대쪽으로 나갈수있게 되어있다.

 

북동적대(北東敵臺)가 보인다. 장안문에서 북서적대(北西敵臺)와 좌, 우에하나씩 반대로 같은 위치다.

 

 

장안문 내부모습.

 

북동적대(北東敵臺)와 북동치(北東雉).

 

화서문에서 장안문까지 바깥쪽 모습이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敦).

 

 

 

 

이어서 북포루(北鋪褸).

 

 

 

북포루의(北鋪褸) 정면모습.

 

이어서 북서포루(北西砲褸).

 

 

 

북서포루(北西砲褸)에서 장안문까지 이어지는 성곽이다.

 

 

북서적대(北西敵臺).

 

 

장안문(長安門)과 옹성.

 

수원화성 홈페이지에서 가져왔는데, 누구읽으라고 쓴 글인지...

장안문

안쪽의 좌우에 있는 무사(武砂)[성석이 크고 잘 다듬어진 것으로 문 옆의 석면(石面)이 된 것을 무사라 한다]는 각각 아래 너비가 67척 8촌, 높이가 23척 5촌, 왼쪽과 오른쪽의 와장대(臥長臺)는 각 32척 4촌, 섬돌은 각 23층 너비는 17척 2촌이다. 바깥 쪽의 좌우 무사는 각각 너비가 41척 높이가 23척 5촌이다. 안팎의 홍예문 사이에 있는 좌우 무사의 높이는 각 21척, 양쪽 선문(扇門) 안은 철엽(鐵葉)으로 하고 빗장을 설치하였다. 홍예의 덮개 판에는 구름 무늬를, 그리고 판 위에는 세 가지 물건[석회, 가는 모래, 황토]으로 쌓았는데, 두께는 4촌이다. 안팎의 홍예 위에는 장군 모양의 무사와 2층의 장대를 얹었으며 홈통[너비 1척 깊이 5촌]을 네 곳에 설치하였다.

안쪽의 평여장(平女墻)은 너비 88척 7촌, 높이 4척 3촌, 두께 2척 5촌이고 바깥 쪽 여장의 높이 두께도 같으나 너비는 동서장 밖으로 각각 7척 4촌이 나왔다. 이 부분에서는 높이가 6척이 되어 옹성 위의 작은 홍예와 연결되며 타구(口)는 10개[첩(堞)은 11개]를 벌여 놓았다. 그리고 네모진 총혈(銃穴) 12개[네모의 한 쪽 길이는 8촌이며, 첩마다 1 개를 뚫었고, 가운데에 있는 1개의 첩에는 2개의 총혈을 뚫었음]를 내었다. 동쪽과 서쪽의 여장은 너비 3척 5촌, 높이 5척 6촌, 중앙에 각각 작은 판자문을 두었는데 높이는 6척 5촌 너비는 6척이다. 장(墻) 안에는 2층의 누를 세웠는데 전체 높이는 32척 9촌, 아래 위 각각 10간(間), 가로 너비는 5간 세로 길이는 2간이다.
아래 층[안은 7포, 바깥은 5포] 정면 간의 너비는 22척 5촌인데, 바닥[높이 1척]에는 널판지를 깔았다. 오른쪽과 왼쪽 각각 둘 씩 협간(夾間)이 있는데 너비는 모두 12척이며, 세로 길이 2 간이고 전체 길이가 24척이다.
서쪽 협간의 첫째 간과 동쪽 협간의 두 번째 간에는 각각 곡란층계(曲欄層階)를 설치하여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서쪽 층계는 북쪽에서 올라가며 동쪽 층계는 남쪽에서 올라간다[서쪽 층계 아래에 살문[箭門]이 있는데 잠가두었다가 임금이 오실 때에는 연다].
위층[안팎 모두 7포]은 정면의 간과 좌우 협간은 너비가 모두 하층과 같고 두 번째 협간은 각각 너비가 9척이며, 그 세로가 2간 전체 길이는 18척인데 모두 널판지를 깔고, 사면에 널판지 문을 달았다. 그리고 3면에는 모두 짐승의 얼굴을 그려 호로전안(葫蘆箭眼)[널판지마다 구멍이 하나씩 있는데 경(經)이 3촌 직봉(直縫) 역시 3촌이다]을 뚫었는데 안 쪽에는 태극을 그렸다. 단확(丹)은 3토를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으며 문 안 서쪽 가에는 수문청을 별도로 세웠다.[협도(夾刀) 넷을 세웠다]....

 

장안문 정면모습.

 

안쪽에서 본 모습.

 

장안문에서 다시 안쪽으로 진행한다.

북동포루(北東砲褸), 동북각루(東北角樓:방화수류정), 동북포루(東北砲樓)가 보인다.

 

가끔 규격이외의 이런 총안도 눈에 보인다.

 

 

북동포루(北東砲褸)

북동포루는 화홍문 서쪽 124보 3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루는 대체로 5좌(座)가 있는데, 그 구조는 모두 똑같다.
성의 몸체에 凸 자 모양을 붙여 치성과 비슷하게 하고 집을 지었는데, 높이는 포(鋪)와 같다. 3층으로 하여 그 가운데를 비운 점이 마치 공심돈의 구조와 비슷하다.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아래 넓이나 위의 줄어든 넒이가 모두 옛날 제도의 재돌(再突)하는 형세를 따랐다. 화포를 많이 감추어 두어 위 아래에서 한꺼번에 쏘게 하였다.

 

동북각루(東北角樓:방화수류정), 동북포루(東北砲樓)다.

 

동북각루(東北角樓:방화수류정)가 보이고..그 아래에 북수문(北水門)이다.

화홍문(華虹門)이라고도한다..

 

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광교(光敎) 언덕을 대천(大川)이 가로로 자르며 흐르고 있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그 동서로 3간은 아래 너비가 8척 높이가 7척 8촌, 가운데 한 칸은 너비가 9척, 높이가 8척 3촌이다. 7개의 안팎 홍예 사이에는 각각 좌우에 돌기둥 4개를 세웠다. 홍예가 서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잠자리 무사를 붙였다. 중앙에는 장군형 무사를 덧붙였다. 거기에 다리 놓을 돌을 깔고 다리 위 바깥 쪽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설치하였다.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訪花隨琉停)

화성의 4개각루중 주위의 아름다운 경광과 어우러진곳으로,시설물� 가장 빼어난곳이다.용연,화홍문과더불어 화성의 백미로 불리운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화홍문 동쪽 높은 벼랑위에 세워져 있다. 한국의 건축미와 정자문화를 마음껏 자랑하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정자이다.  전시에는 감시초소로 평시에는 휴식공간으로 쓰인곳으로 아래에는 인공호수인 용연지가 있는데 각종 수목이 많이 심어져 있어 보는 맛이 매우 싱그럽고 화사하게 느껴진다. 용연지에 비친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의 그림자를 보면 설계자의 안목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다.

 

 

 

방화수류정에서 보이는 동북포루(東北砲樓).

 

연못 용연(龍淵)이다.

 

방화수류정옆에 북암문(北暗門)이 있다.

 

북암문(北暗門)

문위에는 둥근 여장을 설치했는데 제도는 동암문과 같다. 홍예 사이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여 들어가는 곳은 높고 나오는 곳은 낮게 만들었는데, 지세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암문을 지나자 언덕이나오고, 그 위에 동북포루(東北鋪樓)다.

 

동북포루(東北鋪樓)

동북포루는 각건대(角巾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 135보 4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지세가 별안간 높아져서 용두(龍頭)를 눌러 굽어보고 있다.

 

동북포루(東北鋪樓)에서 보이는 방화수류정(訪花隨琉停)

 

다시 성곽이 아래로 내려간다. 아래에는 동암문(東暗門)이 있다.

 

동암문(東暗門)은 동장대 서쪽 166보 되는 곳에 있다. 동쪽에 자리잡고 북쪽을 향하여 있으며 벽돌로 안과 밖의 홍예를 만들어 말 한필이 지나갈 수 있다.
안쪽 너비는 7척 높이는 8척이고 바깥은 너비가 6척, 높이가 7척 5촌이다. 문 위는 벽돌을 깔았고 누는 세우지 않았다. 다만 오성지와 한 개의 큰 둥근 여장을 설치하였는데 마치 나무로 만든 전붕(戰棚)의 제도와 같다. 좌우는 각각 비예를 갖추었고 안쪽은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다. 나머지는 남암문과 같다.

 

동암문(東暗門)을 지나자, 이윽고 동장대.

 

 

동장대는 일명 연무대라 하며 솟을삼문에 정면 5칸의 잘생긴 기와집으로 화성 시설물중 가장 위용이 있고 평상시에는 군사들을 훈련하고 지휘하는 곳이다. 연무대 성벽밖으로는 넓은 활터가 있다. 정조도 활쏘기를 즐겼다하며 지금은 궁술을 아끼는 수원시민들이 심신을 수련하고 있다.

 

동장대에는 불랑기포가 장착되어있다.

불랑기포(한자:佛郞機砲, 로마자:Bullanggi-Po)는 중국 명나라 시대에 도입한 서양식 박격포이다.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전해져, 이후 일본과 조선에서도 사용되었다. 조선에서는 당시 귀화한 박연(벨테브레)이 서양식 포술을 지도했다.

 

동장대에서 보이는 동북공심돈(東北空心敦).

 

 

동북공심돈(東北空心敦)은 노대의 서쪽 60보쯤 되는 거리에 있다.
성탁(城托)의 위 성가퀴 안에, 요동(遼東)에 있는 계평돈(平墩)을 본떠서, 벽돌로 쌓아서 둥그렇게 돈(墩)을 만들었는데, 겹으로 둘렀다.

높이 17척 5촌, 바깥 원 둘레 122 척,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 안쪽 원 둘레 71척,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척 5촌의 공간을 비워두고, 2 층 덮개판으로 둘렀다. 아래 층 높이 7척 3촌, 가운데 층 높이 6척 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바깥 쪽으로 총안을 뚫어서 밝은 빛을 끌어들이는 구실을 겸하게 하였다. 위 구멍은 26개, 아래 구멍은 14개[사방 각각 1척]이다. 위 아래 덮개판 위는 진흙과 회를 섞어 쌓았다.
아래 층 공심에서 구불구불한 벽돌 사닥다리를 거쳐 위로 올라가면 위층에 이르게 되어 있다. 그 규모는 기둥 6개를 세웠는데 길이 12척이고 너비 10척이며,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다.

평평한 여장을 둘렀는데 높이 5척, 위 아래에 포혈 23개와 누혈 6개를 뚫어 놓았다. 아래 층 안 쪽에는 벽돌로 만든 홍예 모양의 작은 문을 설치하였다. 또 문 동쪽으로 공심을 막아서 온돌 한 간을 지어 놓았는데 방안(方眼)을 창으로 삼아 군사들이 출입하게 하였다.

 

동북곡심돈에서 바라본 동장대.

 

동북공심돈(東北空心敦)안으로 들어가 본다. 

 

 

2층계단.

 

 

 

동북공심돈(東北空心敦) 옆에 동북노대

동북노대는 창룡문의 북쪽 96보의 거리에 있다.

치(雉) 위에 벽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었는데, 대 아래의 석축 높이 13척, 대의 높이 18척이다. 벽돌로 쌓는 방식은 사각형이지만 모서리를 깎아 벌의 허리처럼 만들어서 모를 죽인다. 안쪽 너비 17척 4촌, 바깥쪽 너비 19척, 성밖으로 나온 부분이 25척 5촌, 2개의 현안을 뚫었고, 위에 둥근 여장을 만들었다.

3면에 각각 1타씩이고, 바깥 쪽 2모퉁이에는 둥근 타구를 굽게 접히게 설치하였는데, 모두 방안(方眼) 3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타구마다 좌우에 凸모양의 여장을 끼고 있다.

안쪽 두 모퉁이는 평여장으로 굽게 접었는데, 모두 높이 6척 5촌, 가운데에 벽돌 계단을 돌계단과 이어지게 하였고 대 위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담장 안의 남북의 너비는 14척, 동서 길이는 벽돌 계단까지 11척이다

 

이윽고 창룡문이다.

 

장안문에서 창룡문까지 밖의모습을 보자. 

화홍문 밖의보습이다.

 

용연(龍淵)과 수구(水口)모습.

 

 

그리고 북암문.

 

 

북암문을 지키는 옹성

 

성곽이 동암문으로 이어진다.

 

동암문이다.

 

이어서 동북공심돈(東北空心敦).

중간에 동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밖에서는 안보였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敦) 정면모습이다.

 

이어서 동북노대.

 

 

동북노대에서 창룡문까지 성곽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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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화성의 약 5.5km는 안내판을 찬찬히 살피면서 걸으면 3-4시간이 걸린다. 주차하기 좋은 곳은 연무대부근 활터나 화서문 부근이다. 화서문에서 장안문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장안공원에서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을 바라보면 아늑한 한국적인 城분위기를 느낄수 있다. 웅장한 장안문에서는 성문의 여러시설물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팔달문은 입장이 불가하므로.. 화홍문-방화수류정-각건대 일대는 지형이나 시설물이 문화적분위기로 바뀌는 사랑스런 곳으로 화성에서 가장 사랑받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