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단양 적성산성 (赤城山城)

메탈 2008. 3. 29. 03:38
종    목 : 사적  제265호 
명    칭 : 단양적성(丹陽赤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88,648㎡ 
지 정 일 : 1979.07.26 
소 재 지 : 충북 단양군  단양면 하방리 산3-1 
시     대 : 신라
소 유 자 : 국유,사유
관 리 자 : 단양군

 

단양 성재산에 있는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주위가 약 900m이나 대부분 붕괴되고, 북동쪽에는 안팎으로 겹쳐 쌓은 부분의 안쪽 성벽이 일부 남아있다.

성의 남서쪽, 남쪽, 동남쪽의 3곳에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성벽의 절단부가 있다. 북쪽은 남한강과 가파른 절벽의 자연적인 지리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다.

1978년 성내에서 적성비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신라와 고구려의 세력관계 변동을 알 수 있다. 비석외에 삼국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도 있어 대략 고려 후기까지 오늘날의 단양지방을 다스리는 읍성의 구실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축성방법이 매우 견고하게 되어있어, 신라의 성 쌓기 기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문화재청

 

중앙고속도로 단양 상행선휴게소에서 산성이 바라보이며, 바로 올라갈수가 있다.

전형적인 삼국시대의 육중한 산성모습이다.

 

올라서며보이는 성곽모습.

훼손된부분도 많지만, 남아있는부분도 꽤된다.

 

길게 뻗은 성곽 남동쪽부분이다.

 

비교적 이부분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올라서서 북쪽방향으로 걸어간다.

방금전에 보았던 성곽위다.

 

본격적인 삼국시대 성곽형태를 볼 수가있다.

 

아침햇살에 성곽실루엣이 잘 살아난다.

 

 

위치상 북문이겠다.

 

 

금수산이 눈앞에 놓여있고...

 

뒤로는 단양휴게소를 배경으로,성곽이 뻗혀있다.

 

북문터 위다.

이곳은 복원된곳인가보다.

 

당시 무기로 쓰였던, 투석용 몽돌무지같다.

 

북문사이로 금수산이 멋지다.

 

밖으로 나와서 성곽을 바라보니, 그 높이를 알수가 있다.

 

문이 있던 흔적이겠지?...

 

성곽이 한바퀴 돌아왔다.

 

성곽이 산능선의 복원안된부분으로 이어진다.

 

여기부터는 성곽의 흔적조차 찾을수가 없었다.

잡목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끝부분에서 뒤돌아보니, 산성모습을 한눈에 바라볼수있었다.

 

오른쪽 옆에는 흔적이 있을텐데, 내려가기가 힘들었다.

 

아주 편안한 소나무길로 이어진다.

 

길이 아래로 있어 내려가다보니, 국보 198호 적성비(赤城碑)다.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직접 볼수없어 아쉬웠지만, 판독할것도 아니고..해서, 안내판 사진으로 대신한다. 

 

 

스카이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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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산성은 거의 복원된곳이지만, 복원상태가 고증대로 양호하다 할수있었다.

그리 크지않은 적성산성에서, 치열했던 당시의 영토싸움의 현장을 다시한번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