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오산 독성산성 (禿城山城)

메탈 2008. 3. 22. 14:17

종    목 : 사적  제140호 
명    칭 : 독산성및세마대지(禿山城및洗馬臺址)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37,299㎡ 
지 정 일 : 1964.08.29 
소 재 지 : 경기 오산시  지곶동 162-1 외 
시     대 : 삼국시대
소 유 자 : 고복순 외
관 리 자 : 화성시

 

독성산성(禿城山城)또는 독산성(禿山城)이라고도 하며, 삼국시대에 축조되었던 옛 산성을 조선시대에 수축하여 이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는 도성(都城)의 문호와 관련된 전략상의 요충지로 남한산성과 용인의 석성산성((石城山城) : 보개산성(寶盖山城)) 등과 연계하여 도성을 에워싼 형세를 이루는 중요한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백제(百濟)가 쌓았던 성으로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 이용되었다. 1593년(선조(宣祖) 26) 7월에 전라도 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權慄)이 근왕병(勤王兵) 2만인을 모집하여 북상하다가, 이 성에 진을 치고 왜적 수만명이 길을 나누어 노략질하는 것을 차단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듬해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불과 4일만에 백성들이 합심하여 수축을 하였다. 이와 같은 민정모입(民丁募入)에 의한 구제(救濟)와 설진련병(設鎭鍊兵)을 통한 산성 수축을 동시에 해결하는 독산성의 예는 이웃에 모범을 보여 금지산성(衿之山城)에서도 군량을 모으고 병사를 훈련시켰으며, 이어 월계산성(月溪山城)과 파사산성(婆娑山城)으로까지 퍼졌다. 1595년 포루(砲樓)의 시설이 갖추어지고, 1597년 2월에는 왜병의 조총을 방어하기 위하여 평평한 집을 성벽 안에 짓고, 거기에 성의 아래로 향한 창문을 시설하며, 석차(石車)와 포차(抛車)를 배치하고, 성밖에는 목책을 세우려고 계획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 성의 중요성이 강조되자 1602년(선조(宣祖) 35) 수원부사 변응성(邊應城)이 수축하고, 1796년(정조(正祖) 20) 수원읍성인 화성(華城)의 축조와 함께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의 성의 둘레는 1,800보(步)이며 4개의 문이 있었다. 성벽은 외면이 장방형 내지 방형이 되도록 다듬은 석재로 약간의 기울기가 있도록 쌓아 매우 견고하다.

그러나 물(정천(井泉))의 부족이 대군의 주둔을 어렵게 하여, 이 산성의 가장 큰 결점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물의 부족은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을 낳았다. 즉 1593년 권율 장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 가토(加藤淸正)이 이끈 왜군이 이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 보내 조롱하였다. 그러나 권율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백마(白馬)를 산 위로 끌어 올려 흰쌀을 말에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였다. 이를 본 왜군은 산꼭대기에서 물로 말을 씻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고 오판하고 퇴각하였다고 한다. 

 

입구길이 북쪽에있는 백제시대 절 보적사까지 나있어, 보적사 암문부터 시작되지만, 편의상 복원이 잘되어있는 동문부터 시작하겠다.

성의 둘레는 3,240m 이며, 성곽의 길이는 1,100m란다.무슨소린지 모르겠다. 아마 내성과 외성의 길이를 합한모양이다.

 

스카이뷰

 

동문(東門)이다.

현재 문은 없지만, 여닫이 문 이있었던 흔적을 볼수가 있다.

 

동문밖의 모습으로, 요즘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문에는 여닫이로 사용한 흔적의 홈이 있었다.

 

안에서 바라본 동문이다.

나중에 복원한것이겠지만, 돌의 짜임새가 정교하다.

 

옹성형태가 잘 나타나있으며,안쪽에는 돌의 틈새가 거의없을정도로 정교했다.

 

위쪽으로 따라올라가본다. 북쪽성곽이 되겠다.

 

성곽위에서바라본, 입구쪽 옹성형태의 동문이다.

 

내성인지 건물지인지,안내판 하나정도는 있어주면 고맙겠다.

 

내탁축성법을 알수가있다.

 

독성산성의 특징이라고할수있는 치성이다.

독성산성에는 구부러지는곳에는 어김없이 치성이있는데, 성의 규모에비하여, 치성수가 많은편이다. 눈으로 확인한것만도 8개였다.

 

북쪽성곽모습으로, 여장으로 사용된듯한 돌들이 삐죽삐죽 나와있었다.

 

방향이 바뀌는 부분엔 반드시 치성이 자리잡고있었다.

 

여기는 여장의 흔적이 보인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느낄수있는 곡선이다.

 

보적사(寶積寺)다.

보적사는 삼국시대에 독산성을 축성한 후 성내인 현재의 터에 전승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된 이래 여러차례의 전란으로 중건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내에는 조선 22대 정조가 용주사를 건립할 당시 재건되었던 것으로 전하던 주 건물인 약사전과 요사 3동이 있었으나, 약사전은 약사여래상을 안치하고 정면 3칸(6.5m), 측면 2칸(3.97m)의 굴도리집형에 단청이 섬세한 겹처마 팔작지붕 양식이던 것을 1987년 사적의 경관에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정면 3칸(9.0m), 측면 2칸(5.7m)의 방풍판을 설치한 맞배지붕 양식으로 증개축하였다.

 

수원유수가 관할하는 3백여호의 변화한 촌락이 되었으나 한일 합방후 왜인은 세마대를 파괴하고 주민을 각처로 분산 이주케 하였다. 여러차례 전란으로 중건을 거듭하다 조선 22대 정조가 용주사 건립시 재건하였고, 1957년 세마대의 복원과 함께 산상에 연무의 3개 광장도 마련하였다.

 

보적사에있는 북쪽암문.

 

여닫이의 문 흔적이다.

 

밖에서본 모습이다.

 

왼쪽은 오던길이며...

 

오른쪽으로 치성이보인다.

 

치성에올라가니 오산시가 바라보이고...

 

 

보적사 뒤편에는 세마대(洗馬坮)다. 

임진왜란당시, 특히 물이 부족한 이 곳의 조건을 알고 왜병이 물을 한 지게 올려 보내 조롱하자, 권율장군이 백마를 산상에 세우고 말에 쌀을 끼얹어 말을 물로 씻는 시늉을 해 보이자 왜군은 성내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 퇴각하였다는 세마대의 전설이 전해오기도 한다.

 

현판이 앞뒤로 걸려있는것이 새롭다.

 

다시 치성이 나오며 성곽이 90도로 꺾인다.

 

여장의 흔적을 보이며, 성곽이 암문으로 이어진다.

 

위치로보니 서암문정도 되겠다.

 

 

밖에서 본 모습으로, 여닫이 문의 흔적이 뚜렸하다.

 

사람키를 조금넘는 성곽이 힘차게 뻗어있다.

 

다시 성곽길이다.

아무도 없는.. 호젓하고, 쓸쓸한 성곽길이 너무도 좋다.

 

치성이 나오며 성곽이 길을 바꾼다.

 

큰 문이 보이는데, 서문인가?

안내가 없어 알수가 없으나, 서문위치다.

 

 

밖에서 본 모습으로, 의외로 그리 높지가 않다.

 

그러나 두텁다. 밖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저 치성에서,성곽 방향이 바뀐다.

 

남쪽성곽은 서쪽보다는 높았다.

 

 

여기는 남문위치다.

 

 

문을 사용한 흔적이다.

 

 

또다시 치성이 나오며 방향이 틀어지는데, 이쪽은 높이가 높았다.

 

새로 복원된부분도 보인다.

 

다시 방향이 바뀌는곳에 치성이있다.

 

어디에 쓰였는지 알수없는 돌이 눈에보인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동문으로 이어진다.

 

동문근처에오니 여장의 흔적이 남아잇다.

 

동문으로 돌아왔다.

 

북문으로 내려오니, 외성의 흔적이보이는데, 아무설명이 없어 알수가 없었다.

 

독산성은 백제가 축성한 고성으로 연장 1,100m이며 백제시대와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 때까지 이용된 성이다. 임진왜란을 맞은 1592년 , 권율장군이 근왕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북상하는 도중 이성에 주둔하여 수만의 왜병을 무찌르고 성을 지켰던 곳으로 유명하다.

복구된곳을 비롯하여, 성의 상태는 매우 좋았다. 다만 독성산성의 존재에 대하여 얼마나 사람들이 알고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