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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오천성 (鰲川城)

메탈 2008. 3. 20. 07:15

종    목 : 시도기념물  제9호 (보령시)

명    칭 : 보령오천성(保寧鰲川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면    적 :  87,678㎡

지 정 일 : 1973.12.24

시    대 : 조선시대

소유관리 : 보령시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는 오천성은 해발 400m 정도의 구릉성 야산에 거북이 모양의 지형을 이용하여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1650m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 중종 5년(1510)에 성을 쌓아, 고종 33년(1896) 군대 처소가 패쇄될 때까지 서해를 방어하는 성의 역할을 해왔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두었는데 모두 없어지고, 서쪽 망화문터에 입구를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게 만든 홍예문만이 남아 있다. 성 안에는 영보정과 공해루를 두어 바다와 주변의 크고 작은 섬들을 살피었고, 통신망을 구축하였다. 또한 성 안에 도로를 만들어 관사와 백성이 함께 살았다.

 

오천은 백제때부터 회이포라는 이름을 가진 항구로 이용됐던 곳이다. 통일신라 당시에는 당나라와의 교역 창구로서 이름이 높았다.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오천항 일대를 지키는 수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영이 설치된 것은 조선조 때이다. 조선 중종 15년(1510)에 성이 만들어지고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의 본거지가 되 었다.지금은 서문에 해당하는 망화문지와 백성을 돌보던 진휼청, 장교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장교청만이 남아있다.
오천성은 당초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중종 5년에 이장생이 16년간에 걸쳐 돌로 축성하였다. 오천성과 인접한 오천항은 충남 보령시의 어항 중 대천항에 이어 두번째로 규모가 큰 곳이다. 오천항 우측으로는 홍보지구 간척사업 제방이 들어섰다. 오천항은 전복, 바지락, 해삼을 비롯한 조개의 집합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본으로 수출을 많이 하는 키조개의 산지로 유명하다.

 

스카이뷰

 

오천면 면사무소에 차를 추차시켰다.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바로 서문 망화문이다.

 

오천면 면사무소에서 성곽이 이어진다. 서문으로 이어졌다.

 

성안에는 민가가 있었다는데, 이제는 철수한 모양이다.비어있었다.

복구를 위한다면 바람직한 일이다.

 

성곽 밖의모습으로,옛상태 그대로이다.

 

해안가쪽으로 성곽이 이어지는데, 제법 높았다. 돌의 크기를 보니 조선시대 이전의 것과 조선시대에 보수를 한 흔적이 보인다.

 

홍예문 안쪽모습으로, 문이있던 흔적이 있었다.

 

이 홈이 문을 열고닫던곳이다.

 

안쪽으로 한바퀴 돌아본다.

 

 

 

성곽높이는 서문쪽을 제외하고는, 그리 높지않았다.

 

진휼청(賑恤廳)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구제를 담당하던 곳이다.

정면5칸,측면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있다.

 

오천항이다. 조선시대 수영(水營:충청도 수군절도사)이 있던곳, 즉 해군기지가 있던곳으로, 지금은 아름다운 항구다.

 

오청항과 서해안을 바라보며 성곽이 돌아간다.

 

경치가 좋아 옛부터 성보다는 별장에 가깝지 않았을까?....

 

약 300m정도 성곽이 이어졌다.

 

그러다 도로때문에 성곽이 끊어졌다.

 

내려서보니, 이곳도 그리 높지가 않다.

 

길을건너 공해관으로 향했다.

공해관앞에는 여러 선정비들이 많았다.

 

공해관(控海館) 삼문

수군 절도사가 집무하던 공해관의 삼문.지금은 문만 남아있다.

 

삼문뒤에있는 충청수영 객사.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는 곳이다.

 

 

객사 뒤편으로 다시성곽이 이어진다.

방치된지 오래되서, 잡목때문에 들어가기가 불편했다.

 

옆에서보니, 높이는 그리 높지않았다. 위로 올라보았다.

 

 

 

위로 올라서니 약 30m쯤 성곽이 이어졌다.

 

그리고는 끊어져 잡초에묻혀있다.

 

밑에서 본 모습으로 성곽높이는 사람 키 정도였다.

 

다시 객사쪽으로 오며, 면사무소로 향했다.

 

오천성 서문을 바라보며 오천성 답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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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성은 오천면에있는 작은 성이다.

조선 중종 15년(1510)에 성이 만들어지고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의 본거지가 있던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오천수영 수군은 이순신장군을 도와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진주대첩은 충청수군에게 비극적인 전투가 되고 말았다. 당시 고립된 진주성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던 충청수사 황진과 휘하의 수군 대부분은 옥쇄했던 것이다.  이후 오천성은 텅 빈 채로 방치되다시피 했고, 고종 33년(1895)년에 수영이 폐지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생생한 비극적역사를 가지고있는 오천성의 모습을 후세에 알릴수있는 복원을 바라며,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