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홍성 홍주성 (洪州城)

메탈 2008. 3. 16. 06:28

종    목 : 사적  제231호 
명    칭 : 홍주성(조양문,아문,산성)(洪州城(朝陽門,衙門,山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지 
수량/면적 :  46,961㎡ 
지 정 일 : 1972.10.14 
소 재 지 :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00-2 
시     대 : 삼국시대
소 유 자 : 국유,사유
관 리 자 : 홍성군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홍성읍 오관리(五官里)에 있는 석축읍성. 둘레 약 800m. 백제의 주류성(周留城)으로 짐작되나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까지 개축에 관한 기록이 없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세종실록》 지리지에 <성의 둘레가 533보 2척이며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1451년(문종 1) 각 관읍의 읍성을 새로운 규식으로 바꿀 때 성 둘레 4856척, 높이 11척 규모로 수축되었다. 이후 현종 때와 1824년(순조 24) 중수되었다고 전하며, 1870년(고종 7) 조양문(朝陽門)·경의문(景義門)·망화문(望華門)·관영(官營)이 건조되었다. 이 가운데 건조 당시 팔작지붕에 3칸의 다포계 문루건물로서 대원군이 친필을 하사하였다는 조양문은 1975년 완전 해체 복원되었다. 성의 구조상 남문이 없는 것과 북문에 문루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특히 이 성은 1906년 민종식(閔宗植)·이세영(李世永)·채광묵(蔡光默) 등이 이끄는 의병이 성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공격, 덕산(德山)으로 퇴각시킨 전적지로도 유명하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읍터로 별다른 변동없이 전해진 점과 조선 초기 새로운 축성 규식으로 축성되었다는 점에서 연구와 보존의 가치가 있다. 1978년 10월 지진으로 붕괴된 성곽 일부는 1982년 부분적으로 보수되었다. 사적 제231호.

 

현재 성곽은 곳곳에서 헐리어 당초 1,772m에 달하던 것이 810m의 구간만 남아있고 성내에 있던 관아건물이 36동에 이르렀으나 그중 조양문·동헌·홍주아문·여하정 등 4동의 건물만이 현존하고 있다.

 

동문 조양문(朝陽門)

흥선 대원군이 직접쓴글이라는데, 지금은 소실되어 없어졌고, 복원한 것이다.

 

홍주성 옆모습으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문이다.

 

홍주성 옛모습 안내도이다.

1번동문 조양문에서 3번남문을 거쳐 2번서문까지 가본다.

 

조양문에서  남쪽으로 100여미터를 가니, 성곽이 보인다.

하부는 큰돌,상부는 작은돌의 전통적인 성쌓기모습이다.

 

 

축조연대와 보수가 시대별로 달랐던 모양이다.

 

 

홍주성은 복원할때부터 주위정리를 잘한것 같았다.

성곽과 일정거리를 두어 산책로를 만들어서 공원화했는데, 바람직한 일이다.

야간조명시설까지 갖추어, 분위기를 살려준다.

 

성곽돌의 형태를 보면 시대를 알수가있다.

 

치성이다.

 

치성을 지나 성곽이 이어진다.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축성을 한눈에 알아볼수가 있다. 

 

깨끗하게 복원되는부분도 눈에띄는데, 1978년 홍성지진때 일부 무너진 부분이 아닌가한다.

 

문터처럼보이는곳이있어 가본다.

안내도를보면 남문근처같았다., 무너진곳을 복원하지않고, 현재주민통로로 쓰이는것 같았다.

 

홍주성 수성비다. 뒷면에 홍주성쌓기를 감독한 사람과, 작업을 주도한사람의 이름이있다.

 

성곽의 단면이 잘 나타나있다.

 

 

성곽위로 올라가보니, 내탁공법을 한눈에 알아볼수있었다.

 

성안은 휴식공간으로 잘꾸며놓았다.

 

다시 성곽을 따라가본다.

 

여기서 90도로 꺾이며 남문으로 향한다.

 

옛모습과 보수한부분이 조화로웠다.

이정도 복원이라면 칭찬할만 했다.

 

김좌진장군 동상. 이밖에도 한용운,최영,성삼문등 이지역출신의 역사적 인물들을 동상으로 세워놓았는데, 외지인이 보기에 한눈에 알수있어 좋은느낌이었다.

 

성곽이 깨끗한 잔디위로, 서문을 향해 이어진다.

 

군청옆으로 도로가나있어 성곽이 끊겨있다.

안쪽으로는 홍성군청이 자리잡고있었다.

 

다시 성곽이 서문으로 이어진다.

 

아마도 밑의 불규칙한돌은 백제시대, 네모나게 규격화되어있는것은 조선시대, 그리고 위의 새돌은 현대의것이 아닐까한다.

 

초등학교끝이 서문이다.

서문도 흔적이없다.

홍주성은 여기서 끝인데,서문부터 북문, 그리고 동문근처는 복원이 안된상태다.

 

 

서문에서 동문으로 향했다.

 

동문 조양문의 안쪽모습이다.

 

홍주아문(洪州衙門)

이문은 조선왕조때 홍주목의 동헌인 안회당의 외삼문으로서 당시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이성의 동문인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같이 세운 것이다.
대원군이 사액한 홍주아문의 글씨는 6.25전후해서 망실되었으며 이 아문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아문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최근에 홍성이 충남도청의 이전지로 결정되었지만, 홍주는 원래 고려시대때부터 충청 서해안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역으로 근처 고을을 관장하는 목사가 상주하던 곳이었다. 홍주성에는 목사가 업무를 보던 곳, 곧 '안회당'이란 이름의 동헌건물이 남아 있는데, 홍주아문에서 보면 홍성군청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홍주아문이 외삼문이라면 그 안에 내삼문이 있었고 그 뒤로 동헌이 있었는데 일제시대때 내삼문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지금의 군청 건물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에서 본 모습

 

 

 

오관리 느티나무

홍성 오관리 느티나무는 고려조의 공민왕이 식재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고을에 액운(厄運)이 낄 것 같으면 느티나무가 밤을 세워 울었으며 이 때마다 서둘러 예방을 하였다고 한다.

역대 목민관들이 홍주에 부임하게 되면 제일먼저 이 나무아래에 제물을 차려놓고 군민의 무고와 평안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하며 현재에도 제물을 차려놓았던 기대가 남아있다. 그동안 도(道) 보호수로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상태도 양호하다.

 

안회당(安懷堂)=동헌(東軒)

안회당은 현재의 홍성군청이 신축되기 이전에 18명의 홍주목사와 여러홍주 군수가 행정을 집행하던 사무실로 쓰였다. 고종 때 대원군이 안회당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으나 전란으로 소실되었다.현재 전국에서 원형대로 보존된 4개의 동헌(전북 정읍시 태인동헌, 전북 고창군 무장동헌, 충북 괴산군 청안동헌 및 안회당) 중의 하나이다.

 

안회당(安懷堂)은 홍주군의 동헌으로 봉아(鳳阿) 오량(五樑)으로 된 22칸의 목조와가(木造瓦家)이다. 옛 정사당(政事堂)이 해체될 때의 상량문에 의하면 정사당의 상량시기는 숙종4년(1678) 4월 10일 축시(丑時:1시∼2시59분)였고 좌향은 유좌묘향(酉坐卯向)이었다. 이곳에 한응필 목사가 1870년 1월 10일 축시에 안회당 상량식을 올리고 현존한 동헌을 축성하였다. 홍성군에 시넝사가 건축되기 이전에는 18인의 홍주목사와 여러 흥주군수가 행정을 집행하던 사무실이었다. 대원군이 안회당(安懷堂)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하여 그흐루 안회당이라고 하였는데 편액은 을유해방 이후에 분실되었다.
안회당기(安懷堂記)에 의하면 안회당의 안(安)자는 노자안지(老者安之)의 안자로 노인들을 평안히 모시고 회(懷)자는 소자회지(少者懷之)의 회자로 점은 사람들을 품어준다는 뜻으로 논어(論語)에서 인용한 당호이다. 즉 노인들과 젊은 사람들을 모두 위하여 정사르 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당명이다.
이 안회당(정사당:동헌은 전화(戰火)가 많았던 홍주에서 여러 차례의 재화를 면한 건물로 충남 유일의 목도(牧都) 청사이다. 이 보존을 위하여 홍성군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19년(己未) 군수실 18평을 증축 사용해오다가 1977년 원형을 복하였고(대지 3024평 2홉 5작 건물 235평 3홉 5작) 1991년도에 이상선(李商善)군수가 부임하여 부분보수하고 당액(堂額)을 임재유(林載佑)의 ?씨로 안회당 당액을 양각계첨하고 안해당기(安懷堂記)도 조각하여 계첨하였다.

 

 

 

 

 

 

여하정(余何亭)

안회당 뒷뜰과 연접한 소당위에 있는 여하정은 고종 33년(1896)에 이승우 목사가신축한 수상정으로 목조와 즙의 육각형 정자이다. 규모는 3평 5합 5작에 불과하나, 옛연못을 연련하여 누운 고목과 수면을 장식한 연꽃은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