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산성(山城),읍성(邑城)

서울 아차산성 (阿且山城)

메탈 2008. 3. 5. 15:16

 종  목 : 사적 234호
 명  칭 : 아차산성(阿且山城)
 분  류 : 성지(성곽)
 수  량 : 103,375㎡
 지정일 : 1973.05.25
 소재지 : 서울 광진구 광장동 산16-46,구의동 산1-2 
 시  대 : 삼국시대
 소유자 : 국유, 사유

 

서울특별시 성동구(城東區) 광장동(廣壯洞)에 있는 삼국시대 석축산성. 둘레 약 1000m. 아차산(峨嵯山)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현재 동·서·남쪽에 문지와 수구터만 있다. 해발고도 200m의 산꼭대기에서 시작하여 동남의 한강변 쪽으로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쌓았으며 규모가 매우 크고 성내에 작은 계곡이 있다. 성벽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삭토법(削土法)에 의하여 대강의 형태를 축조한 뒤 그 윗부분을 따라 돌아가면서 낮은 석루(石壘)를 구축하였다. 현재 석축부분은 무너져 토석혼축(土石混築)과 같은 외형을 이루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밖에서 보면 평균 10m 정도이나 내부에서는 1∼2m 내외의 높이로서 수구(水口) 부근은 평탄해져 내벽은 남아 있지 않다. 사적 제234호.

삼국사기에 의하면 아차산성은 백제 책계왕이 286년에 보수 축성한 이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6년에 빼앗았다가 신라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260여 년간 한강을 중심으로 아차산성과 풍납토성에서 밀고 밀리는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3만 대군을 이끌고 한강유역을 점령했고 이때 백제 개로왕이 아차산성으로 압송돼 죽음을 당했다. 백제는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겼다. 590년에는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이자 평강공주의 남편이었던 온달장군이 실지 회복을 위해 싸우다가 이 성에서 전사했다.

 

아차산성 조감도다.

하지만 실제로는 발굴이 이루어지지않고있는데, 학계에서 축성연도와 방법에대해 심각한 의견차이가있어, 그것이 끝날때까지 발굴과 일반인답사를 통제한다는 안내문이있었다.

 

산성가는길이 아차산 등산로다.

소나무숲이 기분좋게 펼쳐져있다.

 

이윽고 산성성곽이 보인다.

하지만 통제중이라 먼 발치에서만 볼수있었다.

 

 

망대지를지나 우미촌쪽으로 얼마를가니, 철조망이 허술한곳이 보이길래 올라보았다.

 

허물어진채인 성곽이다.

 

통제하기전에는 등산로로 다녔던 모양이다.

 

 

망대지(望臺址.감시초소)다.

밑에서보니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성곽돌과 길이 어우러져있다.

 

 

이건 무슨 흔적인지....

 

밑으로 내려와 성곽옆모습을 살펴보았다.

백제시대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런 성곽이 망대지까지 잘 보존되어 있었다.

 

하중을 분산시켜 엇갈리게 쌓은 모습이다.

 

 

 

동문지를 비롯하여, 남문지까지도 볼수있으면 좋으련만, 조사 발굴중이라니 기다려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