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 : 사적 제 12호
건물용도 : 기타(산성)
주 소 : 공주시 산성동 2외
건립년대 : 창건-5세기 말중건-조선중기
공산성 : 사적 제 12호
공북루 : 유형문화재 제37호
진남루 : 문화재자료 제48호
쌍수정 : 문화재자료 제49호
광복루 : 문화재자료 제50호
영은사 대웅전 : 문화재자료 제51호
공주 시가지와 금강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한 공산성은 공주 땅 여행에서 꼭 들러봐야 하는 곳으로 꼽힌다.
서기475년 한강 유역의 한산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후 새로 정한 도읍이 공주였다. 개로왕(蓋鹵王) 21년(475년) 9월에 장수왕(長壽王)이 이끄는 3만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백제는 7일 만에 북성이 함락 당했다. 그리고 다시 한성이 함락되고 국왕이 전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이 시기에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러 간 문주(文周)는 신라로부터 원병 1만명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는 중이었으나 그가 왔을 때는 개로왕은 이미 죽고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였다. 이에 문주는 왕위에 오른 후 10월에 조미걸취(祖彌桀取)ㆍ목협만치(木協滿致)와 같은 중신들의 보필을 받아 부득이 남쪽의 웅진(공산)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이후 부여로 천도 할 때까지 불과 60 여 년 간의 백제 도읍이었지만 공산성이 있기에 공주는 백 제의 도시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북으로는 금강을 띠처럼 두르고,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한 천연의 요새인 이 성은 동서 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총 길이 2660m인 성곽은 능 선과 계곡을 따라 이어져 있는데, 원래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초기에 석성으로 개축된 것이다.
곳곳에 역사적 사연 깊은 누각이 서있는 성을 한 바퀴 돌다보면(1시간30분쯤 소요) 성 안팎 을 감싸고 흐르는 백제의 옛 향기뿐 아니라 수려한 자연에 흠뻑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금강과 공주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한가롭게 산책할 성벽이 있고, 우거진 숲 사이의 산책로, 그리고 계룡산과 차령산맥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 등이 공산성을 더욱 사랑 받는 곳으로 만들고 있다.
산성은 백제시대는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일시 거쳐가기도 하였으며 나·당 연합군에 대항 하는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또 이곳을 거점으로 또한 822년에 김헌창의 난이 이곳에서 평정 되었으며,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하였던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성벽은 높이 약 2.5m, 너비 약 3m로 보수되었고 성안에는 17가구가 사는 마을이 있 다. 봄가을에는 매주 토, 일요일 오후2시부터 50-60명이 참여하는 수문병 교대식이 열린다. 성내 유적으로는 진남루, 공북루, 쌍수정, 명국삼장비, 쌍수정사적비, 영은사, 연지, 임류각, 군창지, 동문루, 금서루 등이 있다.
차를주차시키니, 그곳이 금서루(錦西樓)앞이다.
원래 서문이었으나, 도로개설로 그 흔적조차 찾을수 없던것을 1993년 문헌과 유적을 조사한후 복원하였다.
그래서인지 자동차도로를 품은 이상한모양이 되었다.
아침해가 공산성 성곽을 잘 표현해주고있다.
안내판이있어 알아보기 쉽다.
입구에서 본 금서루.
선정비다.
금서루에서 남쪽으로 향해갔다. 뒤돌아본 금서루와 전망대.
전형적인 내탁공법으로 이루어진 성곽이다.
복원이 잘 되어있었다.
쌍수정(雙樹亭).
쌍수정은 공산성 진남루 부근의 서쪽 고지대에 위치한 정각이다. 원래 그 터는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공산성 파천시 머물렀던 장소이며, 이 곳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인조는 환도시 쌍수에 정3품 대부작을 하사하였는데 그 후 나무는 죽고 구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유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관찰사 이수항이 영조 10년
에 쌍수정을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정조 11년, 고종 7년, 1947년에 걸쳐 중수되어 오다가 1970년에 건물은 전면 해체되고 새로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쌍수정 앞에있는 공산성 연못이다.
지면을 깊게파고, 자연석을 쌓아만들었다.깊이 3m, 지름 7.5m다.
다시 호젓한 산성길이다.. 진남루로 이어진다.
진남루(鎭南樓), 공산성 남쪽 누각이다.
높은 동축대위에 쌓아, 2층의 효과를 나타낸다.
진남루에서 동문지로 이어지는 성곽.
물림쌓기로 튼튼한 경사각을 보여준다.
이어서 동문지(東門止)다.
이미 무너져 없어진것을 1980년 발굴조사하여 복원하였다.
발굴조사는 철종10년(1859)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를 근거로 했단다.
동문 밖의모습이다.
여기부터는 일부구간이 토성(土城)으로 이루어져있다.
공산성광복루 (公山城光復樓)
광복루는 공산성의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계상루(繫桑樓)라 하여 성내 중군영(中軍營)의 문루였던 것을 중군영의 폐쇄 후 일제 초기에 이곳으로 옮겨 웅심각(雄心閣)이라 불렀다. 1945년 공주 주민들이 보수하였고 이듬해인 4월에 김구, 이시영 등이 이 누각을 광복이라고 부르면서 독립을 기념하는 누각으로 그 상징성이 변하였다.
공주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다시 석성(石城)으로 이어진다.
임류각(臨流閣)이다.
1993년에 지어진 복원된 건물이긴 하지만 공산성에 있는 유일한 백제 시대의 건물인 임류각이다. 백제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위례성을 공격할 때 개로왕이 전사하고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동성왕에 이르러 어느정도 자리가 잡히게 된다. 수도로서 웅진이 자리를 잡고 동성왕은 연회를 할 수 있는 건물을 지었고 (동성왕22년, 서기 500년) 그 건물이 임류각이라고 한다. 일단 건물만을 봐서는 일본 건물처럼 지붕이 좀 가파르고 크다는 인상 정도를 받는다.
경복궁 경회루를 연상시키는 큰 규모다.
임류각 옆에는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라는 비석이 있다. 명나라의 세명의 장군을 위한 비석인데 임진왜란때 조선에 원군으로 와서 충주에서 전투를 했던 이공(李公), 임제(林濟), 남방위(藍芳威)라는 명나라의 3명의 장군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라고 한다. 선조32년(1599년)에 세운것인데 일제때 파괴된것을 복원하였다.
임류각에서 북벽은 가파른 내리막 길이다.
공산성 연지(蓮池)와 만하루(晩河樓)가 바로 내려다 보인다.
연지는 공산성안에 있었던 연못중 하나이며 단(段)을 둔 석축(石築)을 정연하게 쌓았으며 동,서 양측에 넓은 통로를 둔 것이 특징이다. 깊이는 약 9m이고 연못과 금강사이에 만하루(挽河樓) 라는 정자를 세웠다.
만하루(晩河樓)
공산성을 방비하는 군사적 기능과 경승을 관람하는 누각 건물로 조선 후기 영조 시대에 건립 되었으나 그간 홍수로 붕괴 매몰 되었던 것을 1982년 건물터를 발견 하면서
1984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건물로 중건 하였다. 8각으로 다듬어진 초석과 주위의 기단석 디딤돌은 원형대로 이용하고 건물은 그 당시 대로 복원 하였다
만하루 앞의 연못은 동성왕 22년에 만들어 졌다고한다.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연못 중 하나다
성곽이 공북루로 이어진다.
공북루에서 보이는 전망대.
금강의 옛다리. 1900년대 다리다.
공북루(供北樓)
공산성의 북문(北門)으로서 선조(宣祖) 36년(1603) 옛 망북루(望北樓)의 터에 신축한 것으로 조선시대 문루건축(門樓建築)의 좋은 예(例) 이며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강남과 강북을 왕래하는 남북통로의 관문(關門)이었다.
전망대쪽에서 본 공북루.
다시 한바퀴돌아 금서루(錦西樓)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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