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235호
명 칭 : 삼년산성(三年山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229,958㎡
지 정 일 : 1973.05.25
소 재 지 :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1-1
시 대 : 삼국시대
소 유 자 : 국유,사유
관 리 자 : 보은군
충청북도 보은군(報恩郡) 보은읍(報恩邑) 어암리(漁巖里) 오정산(烏頂山)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축산성. 둘레 1680m. 오정산의 능선을 따라 문터[門址(문지)] 4개소, 옹성(甕城) 7개소, 우물터 5개소와 교란된 수구지(水口址)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이 성은 470년(자비왕 13)에 축조되었으며, 486년(소지왕 8)에 개축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이 지역이 삼년군(三年郡)·삼년산군(三年山郡)으로 불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으로 불린 듯하나,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오항산성(烏項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산성은 포곡형으로 구들장처럼 납작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정자(井字)모양으로, 한 켜는 가로쌓기, 한 켜는 세로쌓기로 축조하여 성벽이 견고하다.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축조하였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 1983년 발굴 결과 삼국시대부터 고려·조선시대까지의 각종 유물이 출토되어 이 성의 이용 편년(編年)을 입증해 주고 있다. 사적 제235호.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 천기의 무덤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삼국시대의 각축장이던 충북에는 곳곳에 산성이 많은 편으로 그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단한 산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삼년산성이다.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마립간 13년(470) 축성을 시작한지 3년만에 완성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 후 소지마립간 8년(486)에 실죽이 3천명의 인부를 징발해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가 서북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전초기지였다고 생각되고있으며, 삼국통일 전쟁때 태종 무열왕(654∼661, 재위)이 당나라 사신 왕문도를 이곳에서맞이하기도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918∼943, 재위)은 이 성을 점령하려다 크게 패하였던 곳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축산성으로 평가되며 성의 둘레는 약 1.7㎞이고 성벽의 높이는 13m, 폭은 8∼10m에 이른다. 이 성에는 서문·북문·동문터가 있고, 특히 성벽의 군데 군데에 곡성이 있어 우리 나라 고대 축성법 연구에 매우 중요시 되고 있다. 성내에는 아미지란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이 주위의 암벽에는 옥필, 유사암, 아미지 등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김생의 필체로 전해오고 있다.
입구가 서문지다.
육중한 산성이다. 여태보던거와는 차원이 다른, 삼국시대 산성이다.
이것을 과연 사람이 쌓았단 말인가? 1500년 전에?
짜임새나 구성이 보통 정교한것이 아니다.
물론 이곳은 나중에 보수한 곳이지만, 무너지지않은곳을 보더라도,보수되지 않은곳을봐도, 놀라움 그 자체다.
높이는 13m, 폭이 8-10m에 이르는 장대한 성벽이다.
안내판이 있어, 쉽게 이해할수 있었다.
서문지에서 남문지-동문지-북문지로 돌아본다.
아미지(蛾眉池).연못이름이다.나방눈썹이란 뜻이란다.
김생의 글이라는데, 청량산 김생굴 바로 그 인물이다.
서남곡성을 지나 남문지로 향한 육중한 성곽이다.
뒤로는 서북곡성에서 내려오는 성곽.
서남곡성쪽으로 올라본다.
서남곡성과 서북곡성이 잘 비교된다.
짜임새가 보통이 아니다.
남문지까지 잘 이어져있다.
아침햇살에 성곽의 콘트라스트가 잘 살아난다.
옆이 아미지(蛾眉池)다.
마치 마야문명이나 이집트의 건축물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남문지(南門址)다.
여기부터는 복원이안돼있어서, 오히려 현장감이있다.
서쪽끝에 위치하며, 여기서 90도 �여져 남쪽성곽을 따라 동쪽으로 이어진다.
문의 형식은 사다리를 이용해 오르내리는 현문식으로, 필요할때만 사용할수있는 잇점이있다.
남문지에서본 남쪽성곽 바깥모습.
성 내부, 그러니까 안쪽모습이다.
봉우리까지 이어져있는데..밖에서보면 저 봉우리를 사이에두고 성곽이 끊어져있다.
봉우리가 가팔라 성곽을 쌓기가 어려웠던지, 아니면 쌓을필요가 없었을게다.
밖에서 본 성곽모습.
남문지 밖의모습이다.
이 봉우리를 중심으로...
왼쪽 성곽 밖의모습이고...
오른쪽 성곽 밖의모습이다.
일부 무너진 곳도 눈에 보이는데..속이 흙으로 된것이 아니라, 돌로이루어져있다.
그야말로 철옹성이 아닐수없으며, 이것을 쌓은데 얼마나 백성들이 힘들었을까?....
무너진 곳에서 오히려 역사를 느끼고, 산성이 살아있는 냄새가 난다.
뒤돌아보니 성벽의 두께를 가늠할수 있었다.
90도를 돌아 동쪽 성곽이다. 성의 윤곽이 잘 보인다.
내려오며 뒤돌아봤다.
동쪽성곽 안쪽모습으로 길이 산책하기 좋게 되어있었다.
꽃피면 다시한번 오고싶다.
동문지(東門址)로 가는길이다.
반대편에는 잘 복원된 서문지와 성곽이 보은읍을 배경으로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동문지 부근. 여기도 복원안된 상태 그대로다.
동문지 밖에서 본 성 바깥모습이다. 현문식이라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으면 밑으로 갈수가 없다.
그래서 끝에 바짝다가가서 찍은모습이다.
동문지에서 동북곡성 가는길도 멋진산책길이다.
동북곡성.
여기 삼년산성에는 민가들이 모두 철수했고, 관리사무소와 보은사란 절이 하나있을뿐이다.
그리고 이와같이 탐방로를 잘 만들어 걷기좋고, 산책하기 좋게 만들었는데,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나머지 무너진성곽을 모두 깔끔이 보수할것이 아니라, 더이상 허물어 지지않게 하는것이, 산교육으로 좋지않을가 생각된다.
동북곡성에서 90도로 �어지며 북쪽 성곽이다.
무너진부분도 있고, 잘버텨있는부분도있어, 1500년의 오랜세월을 느낄수있었다.
북문지를 지나,북문곡성으로 이어진다.
정말로 으리으리한 산성이다.높이가 10m는 되는것 같다.
북문지(北門址)
북문지 밖의 모습이다.
무너진곳과 그렇지많은곳이 잘 비교된다.
북문곡성에서 바라본 동북곡성과 북문지.
북문지는 복구되었지만,나머지 상당부분이 무너져있음을 알수가있다.
북문곡성부터는 잡초가 우거져있고,그위로 길이 나있어 성곽을 볼수가 없다.
조금 내려서니, 서북곡성이다.
서북곡성.
서북곡성과 서남곡성이다. 그리고 저 뒤에 남문지.
다시 서문지다. 아미지(蛾眉池)가 보이고 육중한 성곽의 단면이 압권이다.
문이있던 자리란다.
수구문(水口門).
삼년산성(三年山城)은 삼국시대에 치열한 영토전쟁을 위해,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처절이 투쟁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장소이다.
산성을 통하여 그때의 처절함을 느낄수있고, 아울러 천여년의 지난과거가 오늘날 생생히 되살아날수있는 본보기로가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산역사가 아니겠는가?
주위환경을 잘 정비하고, 안내판을 보완설치하면,훌륭한 관광지와 역사교훈장으로 자리매김 할수있을거란 생각을 하며 답사를 마쳤다.
보은 문화원으로부터...
성곽은 사람들을 안전히 보전하기 위한 시설이다. 나무로 만든 울타리 모양의 목책도 있었으며, 흙으로 다져 쌓은 흙 성(토성)도 있었다.
돌을 깨어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 성(석성)은 보다 견고하였다.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나아가 이웃과 함께 사는 고장을 지키기 위하여 사는 마을의 둘레에 도랑을 파는 일은 이미 땅에 정착하여 사는 시기부터 있어 왔다. 혼자서 이기보다는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쳐 커다란 구덩이를 줄지어 파고, 한편에서는 산에서 큼직한 나무들을 골라 베어내고 운반하여 구덩이에 넣어 세우고 단단히 다져서 높이가 두어 길이 되는 커다란 목책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목책은 불이 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불길에 휩싸이므로 불안하였고, 때로는 오래 되어 썩으면 또다시 만드는 수고로움이 몇 해마다 되풀이되어야 하였다.
보다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 흙을 파서 도랑을 만들면서 그 파낸 흙을 안쪽에 다져서 쌓는 흙 성이었다. 흙 성은 그냥 다지면 아주 높이 쌓기가 어려워 바닥 너비를 넓게 만들어야 하였다. 그러다 보니 두둑을 이루는 성벽은 제방 뚝 모양이 되었고, 많은 흙을 필요로 하였다.
여기에 새로이 고안한 방법이 거푸집을 만들고 다져 쌓기의 방법(판축 : 版築)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터전을 닦고, 거푸집을 세우기 위한 구덩이를 안팎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어 판 다음, 그 구덩이에 기둥을 세우고 견고하게 버티도록 다진다.
그 기둥 사이를 상자 모양의 판목으로 고정한다. 그 다음에는 흙을 그냥 다지는 것이 아니라 뻘 흙이나 찰흙을 모래가 섞인 흙과 교대로 평평히 깔고 다지기를 되풀이한다.
이렇게 쌓으면 벽이 바로 서고, 보다 높이 쌓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굵기가 서로 다른 입자들이 촘촘히 섞이어서 물이 스며들지 못하는 상태로 단단히 쌓을 수 있었다.
판축의 흙 성은 매우 발달된 토목 기술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히 다져도 비가 오래 계속되는 장마철이 있고, 또 땅이 얼었다가 풀리는 계절의 변화를 겪으면 무너지기 쉽다. 무너진 성벽을 해마다, 혹은 몇 해마다 사람들을 동원하여 수리하여야 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은 흙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베고 나르며, 흙을 져 날라 다지는 작업으로 몇몇의 특별한 기술자가 감독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흙을 파고 나무를 베는 일이 거의 일상 하는 일에 해당한 우리 조상들에게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이샤 어이샤 하는 흥을 북돋우면서 여럿이 하는 일이요 또한 처자식을 데리고 봄에 씨뿌려 여름내 가꾸어 가을에 추수를 한 다음에 쌓아 놓은 양식을 지키기 위하여 공동으로 하는 일이었으므로 보람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땀이 흠뻑 젖도록 열심히 일하여도 그 일이 자기를 위한 일이었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
이처럼 만든 성들은 몇몇을 빼고는 오늘날 자취를 확연하게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무너지고 잡초가 나고 오랜 동안 지나면서 원래의 모습을 점차 잃었기 때문이다.
보다 튼튼한 성벽은 돌로 만들었다.
돌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서 돌을 깨고 나르며, 다듬고 쌓는 일은 흙으로 쌓는 것보다 3배 이상의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뿐만 아니라 돌을 깨고 다듬는 기술자로부터 돌을 쌓는 데도 아무나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보다 많은 전문적인 기술자가 필요하였다.
돌로 쌓으면서 성벽은 보다 높게 쌓을 수 있었다. 무너지지 않게 높이 쌓아올리는 여러 기술이 발달된 토목기술의 정도를 가늠케 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특히 돌을 다루는 기술을 남달리 발전시켜 왔다. 오늘날 남아 있는 수많은 국보와 보물들에서 돌을 재료로 한 것들이 유난히 많은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탑도 돌로 쌓아 중국의 벽돌 탑이나 일본의 나무 탑(목탑)과 비교되듯이 성곽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이 흙과 벽돌을 사용하여 성곽을 축조하였는데, 우리 민족은 흙과 돌을 주로 사용하였다.
특히 돌로 쌓은 거대한 성벽은 우리나라 특유의 방법으로 쌓았으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 되는 성벽이 바로 삼년산성인 것이다.
삼년산성은 신라가 온 국력을 기울여 서기 470년에 쌓았는데, 3년의 긴 공사 끝에 완성되어서 이름을 붙인 것이라 기록되었다. 뿐만 아니라 486년에 다시 수축을 하였다고 하였다.
서기 470년에서 486년까지의 역사적 상황은 삼년산성이 축조된 배경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의 왕성(王城)이 축조된 기록이 있고, 또 많은 산성들이 축조된 기록이 있으며, 축성된 절대연대(絶對年代 : 확실한 기록상의 연대)를 아는 것은 있으나, 그 실체가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이런 점에서 삼년산성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여러 성터들 가운데 그 축조된 연대를 확실히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산성에 해당된다.
우리는 삼년산성을 통하여 5세기 후반 신라의 축성 기술을 알 수 있다. 이를 기준 삼아서 그 이후 산성의 발달과정을 알 수도 있으며, 그 이전의 산성들과 비교할 수도 있다.
기준이 없는 비교는 있을 수 없듯이, 삼년산성은 우리나라 고대 축성 기술의 한 기준이 되기 때문에, 성곽에 대해서 알려면 삼년산성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난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보은 지역의 사람들은 지금부터 약 1500년 이전에 우리 조상들이 이룩한 최고 수준의 성벽을 바라보면서 긍지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성곽이라는 언어는 정작 알고 보면 중국의 한자(漢字)이다. 이 한자 성(城)의 우리말 훈(訓)은 ‘잣’, 혹은 ‘재’이고 음(音)은 본디 ‘셩’이라 하였다. 우리말로 성을 잣이라 하여왔음은 곧 순수한 발생의 과정이 중국의 성과 다를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우리말 ‘잣’, 혹은 ‘재’는 산(山)을 ‘뫼’나 ‘메’라 하고, ‘고개’라든가 들판을 의미하는 ‘벌’이란 말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사용하던 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잣과 재가 당초 어떤 모습의 것을 뜻하는지는 명확히 모르고 있다.
이미 삼국시대에 중국의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였을 때에, 그것이 성(城)이라는 중국의 개념과 같거나 유사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같이 사용되어 왔다고 여겨진다.
지금까지 남은 우리의 고유한 땅이름에 잣을 뜻하는 말이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산을 끼고 축조된 산성의 형식에 속하는 터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보은군 내속리면 백현리(柏峴里)는 본디 마을 이름이 ‘잣고개’인데, 이곳 마을의 뒤로 돌로 쌓은 옛 성터가 남아 있다.
백현리의 백(柏)은 잣나무를 의미하고, 현(峴)은 고개를 뜻하므로, 백현을 우리말로 읽으면 잣고개가 분명하다.
그 반대로 잣고개라는 고유한 우리의 마을 이름을 조선시대에 한문께나 안다는 관리들이 한문으로 표현하다보니 백현이라 한 것이다.
동시에 1:5,000 지형도에는 잣고개 마을의 북쪽으로 넘는 작은 고개 이름을 성고개라 표기하였다. 이는 마을 이름이 잣고개이니 정작 잣(城)이 있는 곳 서쪽의 잔등이를 넘는 고개 이름을 별도로 구분하여 성고개라 부르는 것이다.
이곳 잣고개 마을의 서쪽 높고 비탈진 산봉우리를 ‘태봉’이라 표기하였다. 이곳에도 돌 성의 자취가 남아 있다. 잣고개의 성터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곳이며, 반대로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마치 산봉우리에 테를 두른 것처럼 보였으므로, 테를 두른 봉우리라는 의미로 테봉, 태봉이라 하였을 것이다.
순 우리말로 ‘테미’, 혹은 ‘테뫼’라는 이름들이 있는 것은 이처럼 산꼭대기에 테를 두르듯이 성을 쌓은 모습에서 유래된 말로 여겨진다.
그런 이름이 있는 봉우리에 작은 산성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혹은 ‘시루미’나 ‘시루뫼’라는 이름도 있는데, 대략 한자로 증산(甑山)이라 표기한다. 즉, 시루를 의미하는 증(甑)과 산(山)을 의미하는 메, 뫼를 합쳐 부른 이름이며, 이런 곳에도 거의 예외 없이 작으나마 성터가 있다.
이도 마찬가지로 산 모양이 마치 솥 위에 시루를 올려놓은 것처럼 테를 두른 모습에서 유래한 말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성터들이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다. 더욱이 예부터 사람들이 살기에 적당한 자연 조건을 갖춘 지역에 보다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래서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언제인가 성을 쌓을 필요가 생기자 유행처럼 쌓은 것임을 짐작할 수는 있으나, 그 때가 언제였는지는 아직 모르고 있다.
성을 쌓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을 쌓기 위한 여러 가지 작업을 지도하고 감독할만한 지도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 지도자는 많은 노동력을 들여서라도 성을 쌓아야 된다고 주민들을 설득하였을 것이다.
성을 쌓을만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마을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약탈하려는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마도 그 마을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의지하던 신(神)을 위한 신성한 구역에 권위를 더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현실적으로는 정신적 안정이거나 살림살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살림살이를 지키는 것은 두 가지의 도적을 지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는 사나운 맹수나 독을 가진 뱀 등으로부터이고, 또 하나는 의도적으로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약탈자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 가운데 먼저 사나운 짐승과 해로운 동물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마을 안의 가축이 일정한 범위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지키기 위한 시설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마을을 이루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시대가 되면 마을 주변에 깊은 도랑을 파고 목책을 세운 시설이 만들어진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발전하여 보다 규모가 크고 견고한 성벽을 필요로 하는 단계로 발전하였다고 믿어지고 있다.
큰 규모의 마을들이 여기 저기 자리하고, 경계를 마주하거나, 서로 다른 풍습을 가진 집단들이 자리하면서 일어난 갈등은 이웃 마을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수 있었으며, 더욱 큰 단위로 뭉쳐진 작은 나라 사이에 분쟁이 생기기도 하였다.
국가가 생겨난 시기에 이르러 다른 종족이 쳐들어와 사람과 가축, 먹을 것 등을 약탈하는 정복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더욱 주민들의 안전을 위하여 성을 쌓아 막고자 하였다.
성은 대체로 그 안에 들어가 지킬 수 있는 사람의 숫자에 의해서 크기가 결정되었다. 왕이 있어 궁궐과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도성(都城)은 매우 큰 성이 필요하였으나, 마을 단위가 크지 않은 경우에는 큰 성을 쌓아도 지키기 어려우므로 작게 쌓아야 하였다.
또한 마을마다 모두 성을 쌓을 수 있는 여력은 없었다. 몇 개의 마을이 공동으로 성을 쌓아 위급할 때에 성안으로 들어가 지키는 협동 방어가 보다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성들 가운데 인구가 많이 모여 사는 곳은 후일 현(縣)이나 군(郡)과 같은 고을이 되었다. 보은군 지역에서는 삼년산군의 중심적인 성터로 삼년산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옛 매곡현, 미곡현으로 불렸던 회인현의 매곡산성이 있고, 이 밖에 관기리의 성미산성, 백현리의 잣고개 성터와 내북면 창리의 주성산성 등이 이러한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국가가 통합되어 행정구역이 정비된 이후 산성들은 크게 변화를 겪었다. 전국적 규모의 교통의 요충지가 되는 곳이나 몇 개 고을 사람들이 함께 피난할 수 있는 큰 규모의 성들은 계속 사용되었으나, 이전의 작은 규모 성터들은 필요가 없어져서 퇴락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보다 깊은 산골짜기에 큰 규모로 쌓아 주민들이 지키기 위한 성으로 다시 축조된 것이 호점산성이었다.
성터들을 보다 유심히 보면 똑 같은 크기나 똑 같은 형태는 거의 없다. 각기 위치한 지리적 조건이 다르고, 형태도 다르며, 성벽의 축조 방법이나 내부 시설도 다르게 되어 있다. 보은군 내에 있는 산성들은 삼년산성처럼 고로봉형이 있으며, 잣미산성(백봉산성)처럼 사모봉식에 가까운 것도 있다.
내북면 창리의 주성산성은 마안봉식에 해당하고, 회북면 부수리의 매곡산성이나 백현리 태봉에 있는 태봉산성은 산봉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산성들을 평면, 혹은 입체적으로 형태에 의하여 위와 같이 구분하지만 성곽 전체를 기능을 따져서 구분하기도 하며, 축조 기술이나 재료에 의해서도 구분한다.
기능상으로는 왕의 궁전이 있어 거주하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가진 정치의 중심지는 도읍(都邑) 혹은 도성(都城)이라 한다.
지방의 고을 중심지에 축조하여 지방 행정의 중심이 되는 읍성(邑城)은 왕의 위패를 모신 객사(客舍)와 원님의 집무 장소이며 동시에 거주하는 곳인 동헌(東軒), 그리고 감옥과 각종 관청 및 창고가 있는 곳을 에워싸고 있었다.
또한 지방의 군사적 요충지에 갖추어진 각종의 진보(鎭堡), 국경이나 요새가 되는 고개를 막은 관애(關隘)나 행성(行城 : 長城이라고도 함)도 있었다.
보은군 내의 성터들도 마을이나 고을의 중심지로서 과거에 읍성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경영되었던 삼년산성과 매곡산성 등도 있으며, 먼 지역의 주민까지 유사시에 들어가서 지키기 위한 피난용의 산성인 호점산성, 망을 보거나 연락을 위한 일시적이고 규모가 작은 보루(堡壘)도 존재하고 있다.
성을 쌓은 재료에 의하여 흙으로 쌓은 토축(土築)과 돌로 쌓은 석축(石築)으로 크게 구분되며, 어떤 것은 흙과 돌을 함께 사용한 것도 있다. 토축에는 대략 두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먼저 삭토(削土)라 하여 본디의 지형을 이용하여 흙을 쌓는 것이 아니고 보다 가파른 벽이 되도록 깎아내어 벽체를 이루는 것이 있었다.
다음으로는 성토(盛土)의 방법으로서 흙을 부어가면서 다지는 것이다. 이 경우 벽체를 고추 세워 높이 쌓을 수 없다. 다음으로 판축(版築)의 방법이 있었다. 이는 일정한 구간마다 기둥을 세우고 널판을 대어 그 속에 진흙과 모래가 섞인 흙을 교대로 얇게 펴서 다지기를 반복하여 축조하는 방법으로 가장 발달된 축조방법이었다.
석축에 있어서는 크게 나누어 내탁(內托)과 내외겹축(內外夾築)의 방법이 있었다. 내탁의 방법은 성벽의 바깥에서는 돌을 쌓아 올리면서 안쪽으로는 돌 조각과 자갈, 흙을 차례로 다져 넣어가며 축조하는 방법을 말한다.
외축내탁(外築內托)이라고도 하는데, 산성의 성벽이 경사를 이룬 곳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쌓은 곳이 있다. 쌓기에 노동력이 절약되며, 시간도 절약되는 우리나라 고유의 축조방법의 하나이다.
이에 비하여 성벽의 기초에서 위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안팎으로 돌을 사용하여 박아 쌓는 방법이 겹축(夾築)의 방법이다. 쌓기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으며, 시간도 오래 걸렸지만, 한번 축조하면 견고하여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크고 높은 성벽의 위용을 남긴 것이 많다. 삼년산성은 이런 방법이 많이 적용된 대표적인 성벽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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