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명승 제34호
명 칭 : 보길도윤선도원림(甫吉島 尹善道 園林)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원
수량/면적 : 81,745㎡(지정구역), 398,983㎡(보호구역)
지 정 일 : 2008.01.08
소 재 지 :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200번지 등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완도군외3명
관 리 자 : 전남 완도군
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인인 고산 윤선도(1587~1671)가 병자호란 때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제주도로 향하다,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감동하여 머물렀다고 한다.
보길도는 그가 인조 15년(1631) 51세 때부터 13년간 글과 마음을 다듬으며, ‘어부사시사’와 같은 훌륭한 시가문학을 이루어 낸 곳이다. 또한 그가 섬 안의 바위와 산봉우리에 붙힌 이름은 아직도 남아있다.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세워 ‘곡수당’이라 하고, 그 건너 산중턱 위에 집을 지어 ‘동천석실’이라 하였다. 계곡의 동북쪽에는 ‘세연정’을 세워 책을 읽고 뱃놀이도 하며 자연을 벗삼아 지냈다.
보길도에는 동양의 자연관과 성리학의 사상이 흐르고 있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해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한 윤선도의 뛰어난 안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해남 땅끝에서 배를탄다. 30분마다있으니 가기는쉽고, 노화도로 들어가면 30여분. 거기서 차를몰고 보길도로가는것이 더 빠르다.
노화도에서 보길도로 연결되는 보길대교다.
세연정이 있는 윤선도원림이다.
입구로 들어서면 동대(東臺)다.
어부사시사가 불리워지면. 여러사람들이 군무(群舞)를 즐겼던 자리란다.
세연정이 보이고...
그옆에 서대다.
현재는 나선형으로 세단이 남아 있으며, 그 규모는 축단의 한 변이 7.5m정도의 정방형이며, 그 높이는 2.2m에 이른다. 동대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곳을 동대에서 행했던 군무 행위를 했던 곳으로 춤을 추며 돌면 정성에 오르도록 나선형 계단을 이뤘다.
회수담
세연정 동쪽 축단 밑에 계담에서 인공연못으로 흘러드는 터널식 수입구가 있다. 계담쪽에서 물이 들어가는 수구는 다섯구멍이며, 인공 연못쪽으로 나오는 수구는 세구명이다. 이를 '오입삼출'이라 하는데, 이 구조는 아주 독특한데 물막이 석축에 다섯곳의 흡수구를 만들어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되, 배출하는 구멍은 세곳만 만들어 들어오고 나가는 수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이다.
서대쪽에서 바라본 세연정.
동대옆에 판석보.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로 일명 '굴뚝다리'라 부르며,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으며,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리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보의 구조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회를 채워서 물이 새지 않게 한 다음 그 위에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다.
세연정으로 올라본다.
온돌이 마련된 자리다.
세영정에서 바라본 연못이다.
사투암
세연정 주변의 잘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여 칠암이라 불렀는데, 그 중 하나인 사투암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 발받침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연못쪽이 들려진 모습이다. 들려진 부분에 발을 딛고 옥소대쪽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비홍교에서 본 세연정.
비홍교
[보길도지]에는 '세연정이 못의 중앙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정자 서쪽, 제방 동쪽 겨우 한 간쯤의 넓이에 물이 고여 있으며, 중앙에는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암석이 있다. 거북이 등에 다리를 놓아 누에 오른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 다리를 비홍교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 자리에 잡석을 쌓아 호안과 방단이 연결되어 있어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혹약암
세연지 계담에 있는 칠암 중의 하나이다. 이 바위는 '혹약제연'이란 효사에서 따온 말로, "뛸 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즉 혹약암은 마치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말한다.
이것은 학교와 구분을 짓는 담장으로 나중에 생긴것이다.
연못주위의 길을 따라가 본다.
뒤돌아 바라본 모습.
판석보다.
물줄기를 따라간다.
여기는 연못을위한 집수시설인것 같다.
다시 되돌아간다.
비홍교를 지나 회수담으로 향한다.
건너편에 세연정이다.
고산 윤선도, 그의 나이 51세 때인 조선 인조 15년(1637)에 왕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으리라 하고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상록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섬에 터를 잡았는데, 그 곳이 바로 보길도이다.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섬의 주봉인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그 후 두 차례의 귀양을 가고 벼슬을 하여 서울로 가거나 해남의 금쇄동 등 다른 곳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결국 85세로 낙서재에서 삶을 마치기까지 섬 여기저기에 세연정,무민당, 곡수당 등 건물을 짓고, 바위 등 자연의 경승에 대(臺)의 명칭을 붙였는데, 이 정자와 대가 모두 25여개소에 이르며 오우가, 산중신곡 등 많은 가사와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비롯하여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를 남겼다. 세연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이란 뜻으로 [고산연보]에서는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때 지은 정자라 하고 있다.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 동쪽에 호광루, 서쪽에 동하각, 남쪽에 낙기란 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또 서쪽에는 칠암헌이라는 편액을 따로 걸었다.
보길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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