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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 (慶基殿)

메탈 2009. 4. 21. 12:24

분 류 : 지방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379호
지정일자 : 1992-12-23
소 재 지 : 560-070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1가 26
소유자/보유자 : 향교 재단
규 모 : 49,527㎡
시 대 : 조선 태종 10년(1410)

 

사적 제339호의 경기전 정전은 조선 왕조를 개국시킨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태조 어진을 모신 곳을 어용전, 태조진전 등으로 명명하던 것을 1442년(세종24년)에 경기전이라고 명명하였다. 1410년에 창건된 경기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고 1614년에 중건했다. 1872년 태조 어진을 새롭게 모사하여 봉안하면서(태조영정 보물 931호) 경기전의 전반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경기전에는 두 개의 숨은 문화코드가 있는데, 하나는 경기전 정문 밖 도로가에 있는 하마비요, 또 하나는 진전의 거북이 이야기이다.
하마비에는“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雜人毋得入)라고 쓰여져 있다.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의 상징인 태조어진을 봉안한 곳이어서 이 수문장의 위력은 대단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진전에는 거북이가 붙어 있는데, 경기전을 완성한 목공이 그 영원함을 위해 지붕에 암수 두 마리의 거북이를 올려놓았던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거북이가 물에서 살고 진전이 목조건축인 점에서 화재막이용 거북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경기전에서 보이는 앞산 승암산이 화산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다운 경기전, 경기전은 주변 경관이 수려해 역사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주목받는 곳이기도 하다. - 문화재청

 

정문이다.

맛배지붕형식이다. 

 

하마비.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 태조어진을 봉안한 곳이니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이나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

 

경기전의 전체모습이다.

원래는 규모가 더 컸는데, 일제 강점기때 많이 헐렸단다.

 

정문을 들어가니 홍살문이다.

 

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 더 있다. 외삼문이다.

 

 

이것은 내삼문이고...

 

 

전각이다.

 

우측회랑에 세종,정조,고종의 영정이있다.

 

 

좌측에는 영조,철종,순종의 영정.

 

정전은 다포계 양식으로 외3출목, 내3출목이고, 5량 구조의 맞배, 겹처마 지붕이다. 살미의 쇠서가 발달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초각 처리되어 안정된 조선 중기의 형식이 반영되어있다. 배례청은 이익공을 가진 익공계 양식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배례청의 박공면은 정전의 정면 모습이 된다. 정전과 배례청은 화강암 원형 초석 위에 민흘림의 원기둥을 세웠다. 내부의 5.8m나 되는 2개의 고주는 종보를 직접 받고 있으며, 양측면의 기둥도 대들보를 받는 고주로 되어 측부재 구조가 간결하고 견고하게 짜여있다. 포작의 내부 살미 조각과 보아지 및 종도리를 받는 파련 대공의 섬세한 조각과 우물천정 단청 등의 의장이 화려한 편으로 다른 유교 건축과 차별화된 권위성을 볼 수 있다. 구조 부재들의 이음과 맞춤이 정확하며 견고하고 조선 중기의 전통 건축 기법이 잘 전수된 안정된 구조와 부재의 조형 비례는 건축적 품위를 돋보여준다.

 

 

 

태조어진 ; 보물 931호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가로 150㎝, 세로 218㎝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화 1점만이 남아있다.
태조어진은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과 양다리쪽에 삐져나온 옷의 형태는 조선 전기 공신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한 바닥에 깔린 것은 숙종 때까지 왕의 초상화에 사용된 것으로, 상당히 높게 올라간 것으로 보아 오래된 화법임을 알려준다. 의자에 새겨진 화려한 용무늬는 공민왕상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왕의 초상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익선관은 골진 부분에 색을 발하게 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고,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음영법을 사용하여 얼굴을 표현하였다.

 

고종 9년(1872)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인데,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 낸 작품으로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정전 왼쪽의 문으로 나가니 정전 관리건물이다.

 

 

 

 

어정. 우물이란 뜻이다.

 

 

제기고

이렇게 생긴 전통건물은 드물다.

  

 

동재

 

이것은 옆에있는 서재(西齋).

 

서재 정면. 동재와 같다.

 

 

마청

  

 

용실

 

 

이런 건물로 가득차있다.

 

문으로 들어가본다.

 

 

수복청 건물.

 

 

건물채의 전체모습이다.

건물지붕이 거의 맛배형식이었다.

 

이번엔 정전 오른쪽이다.

 

 

 

 

 

 

문을통해 전주사고 밖으로 나왔다.

 

홍살문이 보이고 옆에 하마비다.

 

 

 

조경묘는 잠거놔서 안으로 들어갈수가 없었다.

 

 

 

 

경기전은 작은 궁궐의 느낌이다.

규모도 컸고, 형식도 궁궐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전주 경기전외에  경주에 집경전, 평양에 영흥전이 있었다하나, 현재 남아있는곳이 이곳밖에 없으니 우리역사의 한 부분으로 잘 보존해야 하겠다.